다시 학생이 되니, 일상은 학교 생활과 공부로 빡빡하다. 우리 부부는 -물론 계획했던 대로- 제2의 인생을 살기 위해 지난 8월 여기 부다페스트로 이주해 다시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학교에 가서 수업을 듣고 집에 와서 함께 식사를 한 후 각자의 방에서 새벽 한 두시까지 공부를 하고 잔다. 토요일에는 일주일 동안 먹을 식량(?)을 구비하러 큰 마트에 가서 식료품을 사고, 늘어지게 잔다. 일요일에는 가능한 집에 머물며 쉬거나 각자 공부를 한다.
매주 월요일, 애정 하는 Film Adaptation 수업이 있는 날인데 오늘 담당 교수의 학회 발표로 휴강이 되었다. 덕분에 여유로운 월요일 오후를 보내며 내일 있을 Film Image Analysis 수업 발표를 준비하고 있는데, 학교에 간 J에게 사진과 문자가 왔다.
알리에가 직접 구운 케이크와 커피. 학교에 컵이 없다고 집에서 유리컵까지 다 가지고 오셨데요...^^;
케이크 사진을 보내주며 동기인 알리에가 만들어 와서 다 같이 먹는다고 한다. 월요일에 J는 8시부터 3시까지 점심시간도 없이 수업이 있어서 안 그래도 식사때문에 마음이 걸렸는데, 동기 알리에가 이렇게 요기할 것을 챙겨 온다고 하니 고맙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 이제 남의 학교 이야기를 좀 해보자.
서울에서 일 년 전부터 유학 준비를 시작했던 나와는 달리 J는 부다페스트로 이주하기 2주 전까지 회사를 나갔다. J는 부다페스트에서 1년 동안 대학교에 있는 어학당을 다니며 헝가리어, 영어, 그리고 경영/경제 수업을 들은 후, 내년 9월 학기에 MBA를 시작하기로 했다. 오기 전에 J에게 두세 번 물어본 적이 있다.
"자기, 어학당 진짜 괜찮겠어? 어학당에 애들이 너무 어릴 것 같은데..... 그냥 MBA 지원해서 다녀도 될 것 같은데....."
"아니야. 나도 좀 쉬고 싶어. 십삼 년을 회사를 다녔잖아. MBA에 끝나면 또 바로 일 할 텐데.... 나도 한 일 년 쉬고 싶어. 일 년 쉬면서 헝가리어도 배우고, 영어도 해결해야지. 그래야 나중에 편할 것 같아."
J와 나는 워낙 각자 '확고한' 생각이 있기에, J가 혹은 내가 스스로를 위해 무언가를 결정 내리면 반대하지 않는 편이다. 사실, J의 실력이면 바로 MBA에 들어가서도 무리 없이 학교생활을 해낼 테지만 J가 쉬고 싶다는 말에 적극적으로 동의했다. 그렇게 J는 남들이 이십 대에 하는 "어학연수"를 J는 마흔세 살에 시작했다. 마침 내년에 MBA를 지원할 학교에, 대학원 입학 전 예비과정이라는 명목으로 10달 동안 영어, 헝가리어, 경영, 경제 수업이 있는 과정이 있어서 지난 10월부터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첫 수업을 듣고 온 J가 말했다.
"있지, 우리 반에 나보다 나이 많아 보이는 사람이 있어."
"에이, 설마..... 말도 안 돼. 아무래도 서양사람들이 우리에 비해서 노안이잖아. 알고 보면 막 25살 이럴걸?"
"그런가? 그래도 너무 나이가 들어보는데...."
"노노! 여기서 다른 건 몰라도, 나이로는 우리가 일등이야! 진짜 별걸로 다 일등을 하네. 아니, 나도 수업에 삼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친구가 있어서 그런가 했거든. 알고 보니 스물다섯 살이야."
그렇게 말하고는 서로 늦은 나이에 다시 학교 다니느냐 고생이 많다고 이야기하며 키득키득 웃었다. 다음 날 학교를 다녀온 J가 애들이 어려도 너무 어리다고 대학교 입학 과정과 대학원 입학 과정이 따로 있지 않고 섞여 있어서 16살, 17살 아이들이랑 함께 수업을 듣는다고 했다. 둘이 순간 까르르 웃었고 그래도 나이가 무슨 상관이냐며 어차피 그들과 친구로 지낼 것도 아니니 수업만 잘 듣고 오면 된다고 하면서 J가 말했다.
"근데 자꾸 17살 중국 남자아이가 같이 담배 피우자고 오네. 애들이 너무 어려서 내가 나이가 많은 걸 모르는 것 같아. 빨리 마흔세 살이라고 말을 해야겠어."
"에이, 그럴 건 또 뭐 있어? 원래 외국에서는 나이 물어보는 거 실례야. 아무도 안 물어봐. 아니, 근데 17살이 담배 피워도 돼? 그 친구 부모님이 아시면 속상하시겠다. 멀리 부다페스트까지 비싼 돈 들여서 유학 보냈는데.... 여기 담뱃값도 비싼데.... 그럼 안 되는 거 아니야?"
아, 옛날 사람! 내 안에 있던 옛날 사람이 나와 버렸다. 이럴 때 나이가 나온다. 꼰대도 꼰대로 이런 꼰대가 없지 하면서 자신을 타일렀다. 그렇게 오리엔테이션으로 한주가 가고 수업 시작된 첫날, J가 집으로 오자마자 내 눈을 보며 말했다.
"대~박~!"
"왜?"
"내가 이야기했던...... 나보다 나이 많아 보인다고 했던 그 터키 여자분. 쉰세 살 이래!"
"WHAT????? FIFTY-THREE???? 오십삼???"
그녀의 이름은 알리에. 국적은 터키, 남편이 독일계 회사인 보쉬의 중역이며 작년 부다페스트 지점으로 발령받았다고 한다. 아들이 하나 있는데, 로마에서 의대를 다니고 있다며 엄청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알리에는 이제 아들 뒤치다꺼리도 끝났고 남편도 알아서 회사를 잘 다니니 자기 삶을 살고 싶어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고 한다. 알리에는 내년에 사회복지를 전공으로 대학원에 지원할 예정이라고 한다. 아, 정말 어학당을 다니기엔 적지 않은 나이다. 그것도 자기 아들보다 어린 친구들과 함께 앉아서 공부한다는 거 정말 쉽지 않은 선택이다.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 정말 늦은 거 맞는데,
늦은 거 알고도
지금이라도 시작하는 거,
이게 정말 멋진 거구나.'
여기나 저기나 엄마로, 주부로, 사회인으로 살아가는 여성들의 모습은 별반 다르지 않다. 터키는 다를 것 같고, 유럽은 또 다를 것 같지만 엄마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유사하다. 물론 아빠들도 마찬가지고. 어쨌든 중요한 건, 알리에가 가족에 대한 자신의 숙제를 다 해놓고, 오십이 넘은 나이에 자기 삶을 다시 살아가기 위해 무언가를 시작했다는 것은 너무나 멋진 일이다.
자기 삶을 이 보다 더 예의 있게 대할 수 있을까? 자신의 삶에 대한 존중이 없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 내 삶을 사는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