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가요계-
댄스뮤직이 서서히 가요계를 장악하기 시작한 1994년에는 서태지와 아이들을 선두로, 015B ‘신인류의 사랑’, 김건모 ’핑계‘, 투투 ’일과 이분의 일‘, 박진영 ’날 떠나지 마‘, 룰라’비밀은 없어‘, 듀스’여름 안에서‘, DJ DOC ’슈퍼맨의 비애', 박미경 ’이유 같지 않은 이유‘등이 댄스가요 차트에서 치열한 순위 다툼을 벌였다.
의아한 것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3집 ‘발해를 꿈꾸며’가 한 번도 가요차트에서 1위를 하지 못했다는 것인데, 150만장이라는 음반판매고를 놓고 볼 때 그만큼 서태지 팬들의 구매력이 강력했던 것인지, 정치와 사회를 비판한 내용에 대한 모종의 장치가 있었는지는 당시 음반과 방송관계자들만이 알 일이다.
-국내 드라마-
이 당시에는 불타는 가요계의 접전만큼 드라마도 풍년이었다.
심은하가 주연을 한 납량특집 드라마 ‘M’은 서스펜스와 SF를 혼합해 국내 드라마의 새로운 장르를 선보이며 무려 52.2%라는 경이로운 시청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역시 심은하가 주연한 ‘마지막 승부’도 48.6%의 시청률을 올리며 함께 출연한 장동건과 손지창을 청춘스타로 발돋움시켰다.
김민교가 부른 ‘마지막 승부’는 지금도 사람들이 선호하는 드라마 OST중 한 곡이다.
그 당시 MBC방송은 ‘드라마 왕국’이라는 호칭이 무색하지 않게 한석규, 최민식 주연의 ‘서울의 달’이라는 웰메이드 드라마와, 차인표가 흔드는 손가락과 섹소폰 연주 장면이 기억에 생생한 ‘사랑을 그대 품 안에’라는 신데렐라 콤플렉스의 대표적인 드라마로 시청률 고공행진의 대힛트를 연이어갔다.
한편 KBS에서 방송한 드라마 ‘느낌’은 김민종, 손지창, 이정재라는 꽃미남 F3를 앞세워 당시 톱탈렌트였던 우희진과 사랑과 혈연의 삼각관계를 만들어 여성 시청자들의 애닳는 본방사수와 궁금증을 자아냈다.
‘느낌’의 주제곡이었던 ‘그대와 함께’는 김민종과 손지창이 함께 한 ‘더 블루’의 대표적인 힛트곡이 되었다.
-국내 영화계-
영화계에도 훈풍이 불었다.
최명길은 김홍준 감독의 데뷔작 <장미빛 인생>으로 프랑스 낭트 영화제와 청룡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김홍준 감독은 1996년 음악 영화 <정글 스토리>이후 감독보다는 영화비지니스에 몰두하면서, ‘부천판타스틱영화제’, ‘충무로 영화제’등 굵직한 영화제들을 기획했다.
장현수 감독의 <게임의 법칙>은 코믹한 이미지가 강했던 배우 박중훈을 ‘연기자’로 거듭나게 한 영화였다.
<게임의 법칙>은, ‘삶은 단 한 번의 게임!’이라는 카피만큼 박중훈의 멋진 연기는 물론 완성도에서도 수작으로 꼽히지만, 개봉 당시 ‘지존파 사건’이라는 희대의 연쇄살인사건으로 인해 빛을 보지 못한 불운한 작품이기도 하다.
하지만 박중훈은 그 해 영화 <투캅스>로 안성기와 함께 대종상 최초로 남우주연상 공동수상의 영예를 안는 배우가 되었다.
이 외에도 1994년에는 제 32회 대종상 작품상 수상작 <두 여자 이야기>, 여균동 감독의 <세상 밖으로>, 박중훈과 최진실 주연의 코미디 영화 <마누라 죽이기>, 최초의 국내 컴퓨터 그래픽 영화라 할 수 있는 고소영 주연의 <구미호>, 그리고 배창호 감독, 이정재, 신은경 주연의 <젊은 남자>등 많은 국내 영화들이 개봉되었다.
X세대의 무모한 욕망과 탐닉이 낳는 허무한 결말을 보여준 <젊은 남자>로 이정재는 제 33회 대종상 신인남우상, 제 16회 청룡영화상 신인 남우상, 제 15회 영평상 신인 연기자상, 제 31회 백상예술대상 남자신인연기자상등을 휩쓸며 무서운 신인으로 등극했고, 이후, 드라마 <모래시계>에서 사랑하는 여인을 목숨 바쳐 지켜내는 순애보의 남자 ‘백재희’역할로 대중과 미디어 광고 부문에서 모두 사랑받는 제1순위 배우가 되었다.
-헐리웃 영화들-
블록버스터들을 앞세운 헐리웃의 공세도 만만치 않았다.
키아누 리브스 주연의 <스피드>와 아놀드 슈왈제네거 주연의 <트루 라이즈>, 탐 행크스 주연의 <포레스트 검프>, 탐 크루즈와 브래드 피트의 흡혈귀 영화 <벰파이어와의 인터뷰>, 여기에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대작 <쉰들러 리스트>까지, 국내영화들이 감성을 이야기하는 소품들이었다면, 헐리웃 영화들은 거대한 스케일과 압도적인 물량으로 우리 극장가를 장악했다.
이 대작들 속에서, 제목처럼 이것도 저것도 아닌 싸구려 잡동사니를 뒤섞어 놓은 듯 유쾌하고 개성 짙은 영화 한편이 매니아들을 불러 모았는데, 바로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펄프 픽션>이었다.
캘리포니아의 한 비디오가게 점원이었던 타란티노는 <황혼에서 새벽까지>의 원고료로 첫 장편이자 헐리웃 데뷔작인 <저수지의 개들(1992)>을 완성했다.
두 번째 작품인 <펄프픽션>에서 타란티노는 등장인물들의 관계와 시간의 해체와 재성립을 싸구려 잡지를 도배하듯 교묘하게 배치시키며 그가 사랑하는 개성 넘치는 배우들과 함께 명작을 탄생시켰다.
폭력으로 시작해 마약과 욕설로 끝나는 B급정서로 관객들의 환호를 받은 <펄프픽션>으로 타란티노는 94년 칸느 영화제의 ‘황금 종려상’을 수상하며 세계적인 감독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한편 팝계에서는 미국 그룹 ‘너바나’의 리더였던 ‘커트 코베인’이 자살하면서 얼터네이티브(Alternative Rock)과 그런지(Grunge Rock)라는 생소했던 장르의 음악들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Nirvana’, ‘Pearl Jam’, ‘Sound Garden’, ‘Alice in Chains’등의 음악이 크게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베르테르 효과’로 연쇄 자살과 함께 상실감, 무정부주의에 빠져 방황하는 젊은이들을 지칭하는 ‘X세대’라는 신조어도 생겨났다.
더글라스 코플랜드의 소설 ‘Generation-X(1991. 캐나다)’에서 시작된 이 단어는, 1960~1980년대에 태어나서, 물질적인 풍요 속에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가치관을 형성하여 사회와 가정의 틀에 반발하며 성(性)적인 개념도 자유로웠던 그 당시 신세대를 뜻했다.
-사건과 사고들-
다들 믿기 어려웠던 북한 ‘김일성 주석’의 사망과 전 사회에 충격을 던져 준 ‘지존파 살인사건’등으로 민심이 흉흉해져 있던 1994년은, 최악의 사고였던 삼풍백화점 붕괴사건과 함께, 한강의 성수대교가 붕괴되어 38명의 희생자가 나고, 제주공항에는 KAL 비행기가 추락했으며, 충주호 유람선 화재 사건과 아현동 가스폭발 사건들이 줄을 이어 대형 참사를 냈던 비극의 한해이기도 했다.
우리 국민들은 불안한 정치적 상황도, 안전 불감증에 만연된 사회적 비극도, 역대 최고의 여름 폭염도 굳건히 이겨내며 월드컵을 응원했고, 드라마 ‘마지막 승부’가 던져준 여운을 농구 대잔치로 이어갔으며, 우리나라 국기인 태권도가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것을 너도나도 기뻐하였다.
그리고 1994년 11월 29일 서울이 수도가 된지 600년이 되는 기념으로, 이후 천년을 기약하며 400년 뒤에 개봉할 타임캡슐이 남산 한옥마을에 묻혔다.
그 시절을 기억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제 새로운 ‘신세대’에게 자리를 넘겨주는 7080년대 세대일 것이다. 향수와 추억을 안고 살아가는 이 시대 마지막 X세대들에게 미래는 이렇게 묻는다.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응답하라, 70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