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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요나 Sep 22. 2017

빌보드 키드의 80년대 음악이야기 vol.1

Oldies But Goodies


무라카미 하루키가 7년 만에 발표한 신작 ‘기사단장 죽이기’가 발간 3주 만에 50만부 이상이 판매되면서 한국 팬들에게 다시 한 번 하루키의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하루키는 1979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일본 문학계에 화려하게 데뷔하였고 이 작품으로 군조 신인 문학상을 수상했다. 1982년에는 장편소설 ‘양을 둘러싼 모험’으로 제4회 노마 문예 신인상을 수상했고, 1985년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로 제21회 다니자키 준이치로 상을 수상하면서 일본 최고의 작가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하루키 붐이 일어난 것은 1987년 ‘상실의 시대(노르웨이의 숲)’이 발간되면서부터였다. 무기력한 신세대의 상실과 아픔을 하루키  특유의 문체로 매력적으로 그려낸 ‘상실의 시대’는 전 세계적으로 1,000만 부 이상의 판매량을 기록하며 순식간에 '하루키 신드롬'을 일으켰다.

1987년도에 하루키 열풍을 겪었던 구세대가 기억하는 한국의 1980년대는 그야말로 상실과 혼돈의 시대였다. 정권을 강탈하다시피한 제5공화국은 국민들의 반발을 회유하고 억압하는 정책으로 신문화개국(新文化開國)을 선택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모든 외제는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격한 반대의 대상이 되어서 외제담배를 피우는 것도 불법이고, 영문이 새겨진 티셔츠도 입는 것을 금지시키더니, 어느 날부터인가 갑자기 해외여행이 자유화되고 외국 문물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쌍화차를 파는 음악다방 대신 DJ가 음악을 틀어주는 서구풍의 카페에서 비엔나 커피와 아이스크림 파르페를 처음 먹어본 청년들은 촌스러운 88 대신에 독한 레드 말보로 담배를 마음껏 피웠고, 아가씨들은 가느다란 손가락에 버지니아 슬림을 멋들어지게 끼우고 다녔다.

시내 곳곳에 있던 소극장에서는 항상 영화 2본 동시상영을 했다. 2천원만 내고 들어가면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잘생긴 얼굴의 미키 루크(Mickey Rourke) 앞에서 금발의 킴 베이싱어(Kim Basinger)가 조 카커(Joe Cocker)의 ‘You Can Leave Your Hat On’ 음악에 맞춰 에로틱한 춤을 추는 ‘나인 하프 위크(Nine 1/2 Weeks)’와 제42회 스위스 로카르노영화제서 최우수작품상과 감독상, 촬영상, 청년비평가상을 휩쓸며 현존하는 한국 최고의 예술영화로 평가받는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합법적으로 유통되는 음반보다 한발 앞서 유행 음악들을 산별 해 내는 선견지명을 가지고 있어서 ‘길보드차트’라 부르던 불법복제 카세트테이프를 판매하는 리어커상들 덕분에 퀸(Queen)의 ‘Another One Bites The Dust’와 비틀즈(Beatles)의 ‘I Wanna Hold Your Hand’와 둘리스(Dooleys)의 ‘Wanted’를 테이프 하나에 다 들을 수도 있었다. 집집마다 한 대씩 놓여있던 독수리가 그려진 태광 에로이카 전축은 아버지가 거금을 주고 구입하신 세계 영화 음악 레코오드 전집이 차지했고, 정식 음반을 살 돈이 없는 아이들은 청계천으로 빽판을 사러 다녔다.

마분지 위에 조잡하게 흑백으로 인쇄된 표지 안에 속지도 없이 덜렁 들어있는 레코드판은 빈대떡처럼 두껍고 기스도 많이 나있었지만, 카세트테이프와는 또 다른 맛의 완성된 LP를 소장하는 그 느낌은 내가 마치 음악도 모르는 조무래기 친구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유명한 DJ가 되기라도 한 듯이 어깨가 으쓱한 기분이었다.

지금은 낯설게 들리겠지만 그 당시에는 AFKN이라는 주한미군 전용 채널이 있었다. 6.25 전쟁 당시 유엔군과 주한미군의 사기진작을 위해 처음 이동용 라디오 방송을 시작한 AFKN은 1954년 용산기지에 키스테이션을 설치하고 이후 텔레비전까지 확대하여 1996년까지 ‘채널2’라는 고유번호를 갖고 국내에서 미국 프로그램을 방송했다.

외국 방송을 접하기가 쉽지 않았던 시절에 AFKN은 국내 공영방송만큼이나 인기가 높았다. 특히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AFKN 라디오를 즐겨들었다. 그중에서도 팝송을 좋아하는 아이들이라면 ‘AFKN~Super Station!’하는 로고송을 들으며 하루를 시작하고, 빰빠밤빰빰빰~하는 미국국가 ‘성조기여 영원하라’가 나올 때까지 밤을 새우는 경우가 많았다.

팝송 마니아들 사이에서 AFKN이 유명했던 것은 라디오 프로그램 ‘American Top 40’와 DJ 케이시 케이슴(Casey Kasem)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American Top 40는 미국 ABC Radio에서 제작하는 주말 프로그램으로 한주간의 빌보드 차트 100중에서 40위부터 1위까지를 차례로 소개해주는 인기방송이었다.

1970년부터 1988년까지 American Top 40를 진행했던 케이시 케이슴은 주한미군으로 한국에 주둔하며 AFKN의 DJ로 활동했었던 이력으로 우리에게도 친근한 느낌을 주었고, 특유의 유려한 발음과 세 시간동안 지루할 틈 없이 이어지는 화려한 말솜씨로 국내 음악팬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1980년대는 진정한 뮤지션들의 군웅할거의 시대였다. 매주 American Top 40에서는 가슴이 뜨거워지는 명곡들이 쏟아져 나왔다. 1983년에는 영화 ‘플래시댄스(Flashdance)’가 전 세계적으로 히트를 하면서 명작곡가 조르지오 모로더(Giorgio Moroder)가 맡은 O.S.T가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의 ‘Thriller’를 누르고 정상에 올랐다. 아이린 카라(Irene Cara)가 부른 주제가 ‘Flashdance…What A Feeling’은 6주간 차트의 정상을 지켰고, 마이클 셈벨로(Michael Sembello)의 ‘Maniac’ 역시 상위권에 올랐다.
1984년에는 프린스(Prince)와 록웰(Rockwell)이라는 걸출한 흑인 뮤지션이 두 명이나 등장했다. 프린스는 [Purple Rain] 앨범에서 ‘When Doves Cry‘와 ’Let's Go Crazy‘가 연달아 1위를 차지했고, 록웰의 ’Somebody's Watching Me‘도 상위권에 올랐다.

1984년에는 이변도 많았다. 헤비메탈 밴드 최초로 반 헬렌(Van Halen)이 ‘Jump’로 정상에 올랐으며, 포인터 시스터즈(Pointer Sisters)의 동명이곡 ‘Jump (For My Love)’도 동시에 차트에 올랐다. 또 하나의 이변은 프로그레시브록 밴드 예스(Yes)가 ‘Owner Of A Lonely Heart’라는 파퓰러 송으로 차트 정상에 오른 일이었다. 이 무렵에는 케니 로긴스(Kenny Loggins)의 ‘Footloose’와 레이 파커 주니어(Ray Parker Jr)의 ‘Ghostbusters’, 필 콜린스(Phil Collins)의 ‘Against All Odds’처럼 영화가 히트를 하면 O.S.T도 자연스럽게 히트했다.

1980년대 사람들은 예술이란 함께 하는 것이고 조화를 이루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무엇보다 잘 알고 있었다.


1981년 미국의 MTV가 개국하면서 처음으로 VJ(Video Jockey)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말 그대로 DJ(Disc Jockey)가 음반을 틀어주듯이 VJ는 뮤직비디오를 틀어주는 사람이라는 의미였다. 우리나라에서는 1987년 ‘쇼 비디오 자키’라는 KBS의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처음으로 VJ 방식을 사용했다. 미국식 코미디 클럽을 표방했던 ‘쇼 비디오 자키’는 각 코너별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프로그램 마지막에 DJ 고 김광한 선생님이 외국 뮤직비디오를 한 편 틀어주었다. 비디오 자키라는 용어 자체가 생소했던 만큼 우리나라 사람들은 평소 경험하기 힘들었던 뮤직 비디오를 보기 위해 토요일 저녁에는 모두 집안에 모여앉아 목을 빼고 티브이를 시청했다.
MTV가 방송한 첫 번째 뮤직비디오는 버글스(Buggles)의 ‘Video Killed the Radio Star’였다. 마치 대중음악이 가야 할 미래의 운명을 예언이라도 한 것처럼, MTV는 음악을 듣는 시대에서 보는 시대로 바꿔놓았다. 하지만 초기 MTV는 흑인뮤지션의 뮤직비디오는 거의 방영하지 않았다. 미국인들은 음악을 듣는 방식을 혁신적으로 바꿔놓았지만 그 혁신 속에는 여전히 인종차별이 존재했다. 그 차별의 벽을 허문 것은 마이클 잭슨이었다.

마이클 잭슨은 MTV에 자신의 뮤직 비디오를 방영하기 위해 애를 썼고, 1983년 마침내 방송된 ‘Billie Jean’ 뮤직비디오는 엄청난 인기를 끌면서 MTV가 Rock 음악 중심에서 벗어나 Pop과 흑인 R & B 음악에 관심을 돌리는 데도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이후 프린스(Prince)와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 자넷 잭슨(Janet Jackson)과 같은 흑인 아티스트들의 음악이 꾸준히 방송될 수 있는 힘이 되었다.


음악성과 함께 비주얼을 중시하는 뮤직비디오가 점차 음악계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면서 MTV의 영향력도 그만큼 막강해져 그 해에 제작된 뮤직비디오만으로 시상식을 하는 MTV 뮤직 어워즈가 개최되었다. 1984년 뉴욕 라디오시티홀에서 처음 열린 ‘제 1회 MTV Video Music Awards’의 수상자는 ‘You Might Think’의 ‘카스(The Cars)였다.

이 날의 퍼포먼스 공연으로 마돈나(Madonna)가 가터벨트 차림의 짧은 웨딩드레스를 입고 무대 위를 굴러다니며(she rolled around on the floor) ‘Like A Virgin’을 불렀는데, 경쟁자였던 신디 로퍼(Cyndi Lauper)는 이 모습을 ‘엑소시스트를 보는 것처럼 역겨웠다.’라고 표현했다. 신디 로퍼는 이 날 ‘Girls Just Want to Have Fun’으로 ‘Best Female Video’상을 수상했다.

이후 수상자들을 살펴보자면, 1985년에는 ‘The Boys of Summer’의 돈 헨리(Don Henley), 1986년은 ‘Money For Nothing’의 다이어 스트레이츠(Dire Straits), 1987년은 ‘Sledgehammer’의 피터 가브리엘(Peter Gabriel)이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MTV의 성장을 지켜보던 미국의 거대 음반시장은 지금까지 고수하던 듣는 음악에만 치중하지 않고 시각적인 분야를 개척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국에서 가장 권위있는 음악 시상식 그래미 어워즈는 MTV의 ‘Video Music Awards’에 대한 대안으로 ‘Grammy Award for Best Video, Short Form’ 부문을 신설했다.

1984년 최초로 시상한 베스트 비디오상은 영국에서 온 다섯 명의 비주얼 천재 듀란 듀란(Duran Duran)의 ‘Girls On Film’과 ‘Hungry Like The Wolf’에게 돌아갔다. 듀란 듀란이 1982년 발표한 두 번째 앨범 [Rio]는 멤버들의 출중한 외모와 함께 각각의 스토리와 감각적인 연출이 돋보이는 뮤직비디오의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어 빌보드 차트 상위권에 진입했다. 듀란 듀란의 성공은 비틀즈(Beatles) 이후 영국 뮤지션들의 두 번째 미국 침공(Second British Invasion)으로 불리며 팝시장에 ‘뉴 웨이브(New Wave)’의 물결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펑크나 로큰롤들은 지겹고 흥밋거리가 사라졌으며 생동감을 줄 수 있는 음악, 즉 신나게 춤추고 무언가 직접적으로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음악을 만든다는 것에 중점을 둔 뉴 웨이브는 멜로디 라인과 리듬 비트를 부각시켜 경쾌하면서도 신디사이저를 이용한 윤곽이 뚜렷한 사운드와 글램록을 연상시키는 독특한 패션 스타일로 영국과 미국에 이어 전 세계적으로 일대 센세이션과 유행을 불러 일으켰다.

뉴 웨이브 시대는 1982년 휴먼 리그(The Human League)의 ‘Don't You Want Me’가 3주 동안 빌보드 차트 1위에 머무르면서 시작되었다. 듀란 듀란과 같은 시기에 활동을 시작한 컬쳐 클럽(Culture Club)과 웸(Wham!), 유리드믹스(Eurythmics)의 대성공도 미국시장에 영국음악의 전성기를 확산 시키는 것에 기폭제가 되었다. 빌리 아이돌(Billy Idol)의 ‘White Wedding’, 존 웨이트(John Waite)의 ‘Missing You’, 로버트 팔머(Robert Palmer)의 ‘Addicted to Love’가 연이어 히트를 기록했고, 여성 파워 보컬의 대명사 보니 타일러(Bonnie Tyler)의 ‘Total Eclipse Of The Heart’와 걸 그룹 ‘바나나라마(Bananarama)의 ‘’Venus’ 역시 차트 탑에 오르며 걸 크러쉬를 보여주었다. 영국 뮤지션의 미국 빌보드차트 점령은 릭 애슬리(Rick Astley)의 ‘Never Gonna Give You Up’이 차트 1위를 차지한 1987년까지 계속되었다.

1987년 빌보드 차트는 황제들의 싸움이었다. 원조 꽃미남 오빠 본 조비(Bon Jovi)의 ‘Living On A Player’가 1위에 올랐고 뒤이어 아일랜드의 혁명을 노래하는 U2의 ‘With Or Without You’와 마돈나의 ‘Who's That Girl’, 휘트니 휴스턴의 ‘I Wanna Dance with Somebody (Who Loves Me)’가 번갈아 가며 1위 자리를 탈환했다.

마이클 잭슨의 [Bad] 앨범은 ‘I Just Can't Stop Loving You’, ‘Bad’, ‘The Way You Make Me Feel’, ‘Man in the Mirror’, ‘Dirty Diana’가 모두 빌보드 핫 100 싱글의 정상에 오른 기록을 세운 첫 음반이 되었다. 그렇게 뜨거운 각축전을 벌였던 87년의 빌보드 차트 대미는 4주 동안 1위에 오른 조지 마이클(George Michael)의 첫 솔로 데뷔곡 ‘Faith’가 장식하며 마이클 잭슨 ‘Bad’의 열풍을 잠재운 마지막 승자가 되었다.

1987년의 국내 정세는 연일 이어지는 시위와 민주화 운동, 오대양 사건, KAL기 폭파 사건 등으로 혼란스러웠지만, 음악계에서는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 이문세 4집 [사랑이 지나가면], 조하문의 [이 밤을 다시 한 번], 최성수의 [동행] 등 주옥같은 앨범들이 꾸준히 발표되어 피폐해진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해주었다.

사회와 문화가 급격하게 변해가는 혼란의 시간 속에서도 아이들은 열심히 음악을 듣고 그 음악에 꿈을 품고 자라났다. 디제이의 멘트가 끝나기 무섭게 버튼을 눌러서 음악을 녹음해 듣던 카세트와 라디오가 CD 플레이어로 변하고, CD에 구워서 듣던 음악을 mp3로 다운받아 휴대용 mp3 플레이어로 듣던 시절을 지나보내면서 그 아이들은 이제 나이 먹은 어른이 되었다.


생각하면 웃음이 나는 촌스러웠던 1980년대를 회상하면서 오늘처럼 바람이 차가운 날에는 커피 한잔과 함께 옛 노래를 들어보자. 늘 피곤하고 시간이 없고 이제는 아는 노래도 없이 하루하루를 무미건조하게 살아가다가도 어느 날 문득 듣고 싶었던 옛날 노래 한곡이 1987년의 내가 2017년이 나에게 보내는 따뜻한 추억담긴 위로가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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