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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요나 Sep 28. 2018

군대도 안가본 주제에

너는 애낳아서 키워봤냐고 묻는다

지인의 아들이 신검 받을때가 되었다고 해서, “남자는 해병대 가야지!”라고 말했다가 무지하게 핀잔을 먹었다.

“너는 행군해봤냐.”

“연병장 뛰어봤냐.”

“군대 짬밥 먹어봤냐.”

“여자들은 도대체 가보지도 않고 쉽게 말을 해. 해마다 군대에서 죽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안다. 나는.

나랑 두살 차이가 나는 오빠는 병장 진급을 눈앞에 두고  죽었다. 오빠의 묘는 대전 현충원 사병묘역 아랫쪽에 새로운 묘비들과 함께 마련되었다.

오빠를 찾아갈때마다 놀라웠던 것은 그 아래와 옆으로 빽빽히 생겨난 새 무덤들이었다. 사람들은 말했다. 개죽음. 개죽음이라고. 군대에서 죽는건 개죽음이라고.비석이라도 번듯하게 세워진게 천만다행이라고.


몇년 뒤에는 남동생이 군대를 갔다. 오토바이에 치었는데 하필 가해자가 신문배달하는 고학생이어서 합의를 하자는 말이 안떨어졌다. 전후방 십자인대 파열과 반월상 연골   파열인 다리로 군대를 갔던 동생은 일년동안 강원도 철원에서 또 어디로 어디로 거의 전국에 있는 국군병원을 전전하다가 두 다리가 완전 악화되어서야 제대를 했다. 대학병원에서 수술을 했지만 결국 4급 장애인이 되었다.


나는 서른일곱에 결혼을 했다. 그리고 다음해에 엄마가 되었다. 홍대에서 친구를 만나고 홍대에서 밥을 먹고 홍대 클럽에서 춤추고 홍대에서 어린 친구들과 놀기만하던 나에게 임신이란 정말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난 결혼도 안하고 애도 안 낳을거야.”라는 말을 달고 살았기 때문에 임신 소식을 들은 친구들은 모두 “왜 때문에?”라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아기를 한 명밖에 낳지 않은 이유를 꼽아보면 뭐 열 몇가지는 되겠지만, 최악의 이유는 입덧이었다. 입덧을 일으키는 약물이 존재했다면, 마티하리든 흑금성이든 물한모금 먹지못하고 말라들어가다가 결국 아무거나 몽땅 자백을 했을 것이다.

아홉달 내내 입덧을 하면서 생각한 것은 밥 한 숟가락 제대로 먹어보는 것이었다. 입덧은 폭풍우치는 바다 한가운데에 다 떨어진 뗏목을 타고 심한 멀미를 하면서 십분에 한번씩 구토를 하는 기분이랄까. 삼십분동안 스무번을 토한적도 있었다. 군대 짬밥이 아니라 임금님 수라상을 차려줘도 내가 먹을 수 있는게 없었다. (못먹는데도 신기하게  살은 찌더라)

살이 25kg이 찌고, 냉하던 체질이 열나는 체질로 바뀌면서 한 겨울에도 베란다 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고 잠을 잤다. 배에는 20kg짜리 쌀자루가 올려져 있으니 잠을 자는 건지 자다가 압사하는 것은 아닌지, 또 오줌은 수시로 마려워서 욕실앞에 기대서 깜박깜박 잠을 잤다.

임신말기가 되면서 배에 털이나기 시작했다. 시커먼 털이 배를 뒤덮어서 병원에 정기검진하러 갈때마다 너무 창피했다. 나 늑대인간이심? 신기하게도 나같은 사람이 종종 있다고 한다.

뱃속의 아가랑 노는 것은 너무도 즐거웠다. 태동도 신기하고 커갈수록  내 말을 알아듣고 반응하는게 이쁘고 신기했다. 예정일을 2주일 앞두고 새벽에 양수가 터졌다. 분만실 침대에 누워서는 살만했다. 셀카도 찍고. 이 정도면 참을만해 라도 생각했던, 훗, 역시 나는 풋내기였다.

자궁문이 4cm 열리고부터는 이것이 지옥으로 가는 후룸라이드인가! 호텔 스위트룸을 구현해놓은 가족분만실의 아로마향도 바흐의 음악도 아니, 옆에 있는 누구라도 손에 잡히면 다 쥐어뜯고 던지고  물어뜯고 싶었다. 아파서!

간호사는 이제 시작이라고 하는데, 파란색 가운을 입은 내 밑으로는 피와 똥이 함께 흘러내렸다. 생똥 싸고있네. 건달 영화에 자주 나오는 대사인데, 얼마나 아파야 생똥이 싸지는지 처절하게 깨달았다.

산모가 기절하면 태아의 생명이 위험해 진다는 말을 수없이 들었기에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애를 썼는데, 가족분만실에 들어와서 낮 11시가 될때까지 다섯시간동안의 일을 지금도 기억을 못한다. 통증때문에 부분기억상실이 된 것이다. 아픈와중에도 ‘난 스파이는 못하겠구나. 없는 일도 다 불어버릴거 같아.’는 한심한 생각을 했다.


자궁문이 10cm가 열리면 메스로 회음부에서 항문까지 절개한다. 태아의 머리가 좀 더 수월히 나올수 있게 하면서, 혹시라도 가로로 회음부가 터져버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정신을 차리고 시계를 보니 열한시였다. 엉엉 울면서 나 제왕절개 할거라고 의사를 불러 달라고 했지만,

태아의 머리가 보인다고 힘주라는 말만 반복해서 들었다.

‘아, 유관순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가. 아아,독립 운동가들은 얼마나 용감한 사람인가. 아아아, 나도 이렇게 죽나보다.’

“힘을 주면 오히려 안아파요. 힘주세요.” 간호사 말에 “거짓말이잖아뇨! 나 집에 갈래요!” 내가 끝까지 고집을 부리자 그 분이 오셨다.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지만 수간호사였던 것 같다. 수간호사는 내 손을 잡고 “모모씨, 난 애를 셋이나 낳았어요. 날 믿어요.” 하더니, 허공에 바둥거리는 내 발을 잡아서 자신의 갈비뼈밑에 끼우셨다. “지금 엄마가 받는 고통의 20배를 아기는 받고 있어요. 힘을 내요. 아프면 내 갈비뼈를 차세요.” 무지막지, 선혈낭자, 악전고투, 요단강 건너기 직전에있던 나는 온 몸의 뼈와 살이 분리되는 고통속에서 기를 쓰고 힘을주었고 그 간호사님은 나의 무지막지하고 악에 받친 발길질을 자신의 온 몸을 바쳐 (세상에 그 작은 몸의 갈비뼈와 배의 힘으로) 받아주셨다.

낮 12시 3분. 내 못난이가 태어났다. 아들이었다. 천사처럼 이쁠줄 알았는데 쭈글쭈글 너무 못생겨서 깜짝 놀랐다.

수간호사도 담당의사(차갑고 냉정해서 별명이 얼음공주였다. 간호사들 얘기를 엿들음)도 모두 나가고 텅 빈 병실천장을 보고 누워있는데 눈물이 났다. 잘했어, 잘했어. 이제 너 엄마네.


지금도 그 수간호사님이 생각난다. 갈비뼈는 온전하실까. 누가 뭐래도 그분이 아니었으면 나도 내 아기도 위험했을 것이다. 의학이 이렇게 발달했음에도 세상의 산모와 태아가 무사히 출산을 할 확률은 50%밖에 되지 않는다. 결국 우리 엄마의 엄마의 엄마들도 생명을 걸고 우리를 낳았으며, 우리들도 내 목숨을 걸고 아기를 낳은 것이다.

이것은 위대한 이야기다.

자식을위해서라면 해병대 자원해서 일년동안 짐수함안에서 배멀미를 하라고 해도 버티는 사람이 엄마다. 이렇게  여자들은 내 자식을 위해 여성을 버리고 아줌마가 된다.


아들을 키우며 겪었던 눈물젖은 이야기는 다음번에

계속...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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