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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요나 Nov 09. 2018

내 인생의 책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지금으로부터 십년전, 나는 ‘선천성 관절기형’이라는 병명을 선고받고, 오른쪽 골반을 벌리고 크레인으로 다리를 뽑아서 정밀한 톱으로 썰어 끼워맞추는 수술을 받은지 채 일주일도 안되어 반대쪽 다리를, 그 일주일 후에 다시 오른쪽 다리를 수술받았다.


두 다리를 헝겊처럼 더덕더덕 이어붙이고 나니, 당연히 누워서 밥도 먹고 용변도 봐야했다. 하지만, 소변은 그렇다치고 똥은 도저히 누워서 눌수가 없었다.이것은 중환자가 되어본 사람들만 알리라.
참혹함과 부끄러움은 뒷일이고, 누워있으면 똥이 나오지를 않는다. 허리와 아랫배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질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무리 간병해주시는 이모님이 같은 여자라해도 철벅철벅 똥으로 문대어진 내 엉덩이를 닦아달라는 말은 차마 할수가 없었다.


이모님이 외출을 하신 틈을 타서, 침대에서 굴러내려와 휠체어에 어찌어찌 몸을 얹고 욕실까지 가서 있는 힘을 다 쥐어짜 변기위에 앉는데 성공했다.
너무 기뻐서 30kg짜리 보호대를 하체에 두르고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린채, 허겁지겁 환자복 끈을 풀고 똥을 누었다.
그 후로도 한참 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변기에 앉은 채로, 예정보다 늦게 돌아오신 이모님에게 발견되었다. 눈물콧물 범벅이 된 채로.

병실이 일인실인데다, 지식인성 꼴값환자 히스테리로  악명높았던 나는 스스로 누군가를 부르지않는 이상, 고독하게 변기위에 앉아 30kg짜리 갑바를 유산으로 남기고 횡사할 응급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벽에 붙은 응급벨도 누르지 않은 채 꿋꿋이 변기위에 앉아 책을 읽었다.
사실 이모님이 발견했을 때, 눈물범벅이 되어있었던 내 모습은, 혼자 똥싸러 갔다가 똥도 못닦고 갑바에 눌리고 걷지도 못하는 두 다리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화장실에 꼼짝없이 갇혀버린 병신같은 내 모습이 매우 서글프고 한탄스러워서가 아니라, 때마침 화장실에 놓여있던 책 한권이 나에게 준 아름다운 감동 때문이었다.


포레스트 카터의 자전적 소설에는 체로키 인디언의 피를 받은 '작은 나무'가 할아버지 할머니와 어린시절을 보냈던 에팔레치아 산속에서의 나날들을 마치 정교한 그림처럼 보여주었다. 내게 들려주고 보여주는지 이야기들이 얼마나 눈물겹게 아름다운지, 나는 내가 지금 앉아 있는 곳이 병원 화장실인지, 알키메데스의 서재인지도 잊을 정도로 책에 빠져들어, 책속의 작은 나무와 함께 웃고 울었다.


뒤늦게 오신 이모님의 비명과 함께 나는 침대로 들려올라가 포박되었고, 그 뒤로는 똥을 누워서 잘 쌌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날 화장실에서 읽었던 책을 난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한번씩 책을 다시 읽을 때마다 그때의 기억들이 되살아난다. 고통과 수치심과 원망속에서도 살아야 했던, 다시 일어서야 했던 내 삶의 이유들.


삶은 늘 불행만 가져다주는 것 같지만, 불행의 이곳저곳에 작은 행복을 놓아둔다. 많은 것을 잃었다고 원망하거나 자책하지 말아야 한다. 어차피 잃어야 했던 것들 대신에 내 곁에 무엇인가는 남아있을테니.
설사 그것이 작은 책 한권일지라도, 책을 읽을 힘이 남아 있다면 나는 행복한 것이다.

좁은 한평 화장실에 갇혀 인간의 존엄성 따위는 다 포기한 절망스러운 순간 내 손에 쥐어졌던 그 희망의 이름은,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The Education of Little Tree)- 포레스트 카터 지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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