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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요나 Nov 01. 2018

그 해 겨울

꿈속에서 나는 너를 만났다



시청앞 지하철역에서 그애를 처음 만났던 날도 몹시 추운 겨울이었다. 두 사람은 첫번째 차량의 문이 열리는 곳에서 만나기로 했었다.
H는 차가운 벤치에 앉아 지하철에 오르내리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서로 얼굴을 모르니 스쳐지나갔을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종종 걸음으로 빠르게 역을 빠져나갔고, H와 벤치만 정지화면처럼 플랫폼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한참뒤에 한 남자애가 H 앞에 걸어왔다. "우리 만나기로 했죠?"
매서운 바람이 부스스한 머리카락과 대충 걸친 점퍼를 두들겨댔다. 겨우 찾아낸 찻집은 어릴적 엄마 손을 잡고 칼피스를 마셨던 다방을 연상시켰다.
그애는 더 일찍 올수도 있었지만 도중에 내려서 전람회를 구경하고 오느라 늦었다고 말했다. H는 담배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친밀해질대로 친밀해져서 이미 모르는 것이 없는 사람들처럼 낯선 목소리로 자신의 일상을 이야기했다. 소통되지 않는 대화가 담배연기와 함께 카페 천장을 빙글빙글 돌다가 잿빛 탁자위로 바스라져 내렸다.

그애는 보름을 H의 방에서 지냈다. H가 깨어있을 땐 그애가 잠을 잤고, 그애가 깨어있을 때는 H가 잠이 들었다. 그들은 함께 있었지만 완벽히 격리 된 각자의 시공간속에서 생활했다. 창백한 모습으로 잠이 든 H의 얼굴에 그 애가 가끔 이마를 마주댔다. 그 곳에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는 행동은 그게 전부였다.
H는 깨어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눈을 뜨고도 꿈을 꾸었다. 창문을 모두 막아버린 집안에서는 시간을 알 수 없었다.
그애는 종종 영웅본색이나 주성치의 비디오를 빌려왔다. '안달루시아의 개'나 '헨리-연쇄살인범의 초상'등을 빌려오는 날도 있었다. 그런 날에는 동네 비디오가게의 진열대를 몽땅 다 뒤져야 했다. 비디오가게 사장은 이런 영화는 대여기간이 따로 없으니 보고싶은만큼 실컷 보라고 했다. 숨어있는 비디오 찾아내기 놀이가 시시해지면 H는 로이 오비슨의 'In Dreams'를 틀어놓고 또다시 깊은 잠이 들었다.

눈이 아주 많이 내리던 날, 누군가가 와인 한병과 꽃을 선물했다. 붉은 와인 한병을 모두 마시고 난 뒤, H는 새파랗게 날이 선 칼로 손목을 그었다. 피가 분수처럼 천정으로 솟구치는 것을 보면서 정신을 잃었다.
"야, 니가 무슨 연예인이냐?" 병원에 온 그애가 이죽거렸다. 그애는 너댓살이 어렸지만 항상 H를 “야"라고 호칭했다. 제대로 죽지도 못할거면서,라고 투덜거리면서도 그 애는 H에게 밥을 떠먹여주고, 머리를 감겨주고 화장실도 데려가 주었다.
계절이 바뀌고 봄이 왔다. 비현실적인 오만함에 취해있었던 그 겨울은 H의 오른팔에 80바늘의 수술자국과 함께 영원히 불구라는 상처를 남기고 과거 속으로 사라졌다.
그 후로 흉터를 볼때마다 시청앞 지하철역에서 처음 만났던 그 아이가 문득 생각이 났다. H가 그렇게 놓고 싶어했던 이 삶이, 뇌종양을 앓고 있던 그 애에게는 몸부림치도록 붙들고 싶었던 마지막 시간들이었다는 잔인한 아이러니.

다시 겨울이다. ...

무심히 맞는 이 계절이 누군가에게는 절실했던 바램이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가장 지리멸렬한 시간일지라도,

그렇게 삶은 계속 이어져야만 한다.


도움 준 노래들
시청앞 지하철역에서-동물원
옛 이야기-김규민
당신은 천사와 커피를 마셔본 적이 있습니까-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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