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9시의 커피] ‘무지개 카페’에 피어난 환대와 사랑
‘밤9시의 커피’는 다정하고 환대가 넘치는 가상의 카페입니다. 불면을 부르는 커피가 아닌, 분주한 일상이지만 늘 깨어있는 존재로 남고 싶은 사람들의 바람을 상징합니다. ‘음료, 그 이상’인 커피를 매개로 가상 인물과 이야기를 통해 함께 상상하고 공감합니다. <편집자 주>
<밤9시의 커피>가 부산하다. 단골들끼리 작당했다. 뭔가를 조각하고 붙이고 꾸민다. 뚝딱뚝딱, 우당탕탕. 밤 9시를 넘어선 시간이지만, 모두 신났다. 그리고 무지개가 떴다. 휘황찬란하다. 이 시기가 그렇다. 단골들이 함께 <밤9시의 커피>를 무지갯빛으로 물들인다. 맞다. 프라이드 먼스(Pride Month)니까! 이름에 걸맞게 자긍심이 뿜뿜 한다.
스톤월 항쟁의 기억
여름, <밤9시의 커피>는 ‘무지개 카페’가 됐다. 뉴욕의 ‘스톤월 인(Stonewall Inn)’ 주점을 본뜬 장식과 소품이 자리했다. 평소에도 그렇지만, 이달만큼은 더욱 강력하게 ‘모두의 카페’를 지향한다. 단골 두리안이 무지개 카페를 제안했다.
소셜벤처에서 마케터로 일하는 그는 인권에 관심이 많다. 무엇보다 그는, LGBTQ(Lesbian, Gay, Bisexual, Transgender, Queer) 당사자는 아니지만, LGBTQ에 대한 차별을 반대하고 연대하는 ‘앨라이(Ally; 당사자가 아닌 사람이 그 차별을 반대한다는 뜻에서 서로에 대한 연대를 표현하는 단어)’다. 자신이 속하지 않은 집단을 지지하기 위해 행동하는 사람이다. 그의 손목에는 때를 맞춘 건지, 애플워치 프라이드 에디션이 빛나고 있다.
“우리도 동네에서 퀴어 퍼레이드는 아니어도 퀴어 카페 위크 같은 거 해요. 무지갯빛으로 장식하는 거죠. 스톤월 인 주점을 연상하면서. 제가 같이할 사람들 불러올게요.”
스톤월 인은 1969년 6월 스톤월 항쟁(Stonewall riots)이 있었던 역사적인 현장이다. 당시 미국은 동성애를 정신질환으로 치부했다. 대부분 지역에서 동성애는 불법이었기에 커밍아웃하든, 아우팅 당하든, ‘자연을 거스르는 범죄’로 체포됐다. 스톤월 인은 그런 시절, 안전하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공간이었다.
“아무리 하 수상한 시절이라도 경찰에 공격당할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만약 경찰이 쳐들어오면 목숨 걸고 막을게요. 아니 쳐들어와야 좋은 건가? 그러면 <밤9시의 커피>가 노이즈 마케팅이 되면서 전국에서 유명해질 텐데. 하하.”
두리안의 말에 나도 따라 웃었다. 1969년 6월 28일, 경찰들이 스톤월 인을 급습했다. 이들은 손님들을 수색하고 당시 젠더 규범에 어긋난 옷차림을 한 사람들을 체포했다. 3명의 여성이 경찰의 폭력에 반기를 들었다. 수많은 사람이 호응했고, 같이 움직였다. 경찰은 해산을 시도했지만, 이들은 나흘여 동안 저항했다. 스톤월 항쟁은 LGBTQ 인권 운동의 시발점이 됐다.
사람들은 차별과 폭력에 저항한 이 상징적인 행동을 기념했다. 이듬해인 1970년 6월 28일, 스톤월 인이 있는 크리스토퍼 거리에서 첫 프라이드 행진이 열렸다. 이를 기획한 브렌다 하워드(Brenda Howard)의 애칭인 ‘긍지의 어머니’(Mother of Pride)를 따 6월을 ‘프라이드 먼스’라 불렀다. 이 퍼레이드는 전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LGBTQ와 앨라이가 모여 다양한 방식으로 그들만의 자긍심을 드러낸다.
모두를 위한 카페는 있다!
여성 인권단체에서 활동하는 양양, 인디뮤지션 미연, 문학청년에서 작가가 된 동호, 이주노동자 날름이 두리안의 제안에 붙었다. 또 다른 단골 친구 레즈비언 커플 묘와 링을 위한 묘수였다. 묘와 링은 결혼했지만, 법적으로 결혼하진 못했다. 이들은 <밤9시의 커피>에서 조촐한 웨딩 파티를 열었다. 그때 초대받은 이들 중심으로 ‘무지개 카페’를 준비했다.
“묘와 링은 <밤9시의 커피>가 안전한 곳이라고 생각하니까 저렇게 커밍아웃도 하고 자주 오는 거예요. 우리도 그런 묘와 링을 위해 뭔가를 하고 싶었어요. 저는 새로운 곡도 만들었어요.” 미연이 말하자, 양양이 맞장구를 쳤다.
“작년에 미국에서 갤럽이 조사했더니 미국 성인의 7.2%가 성소수자라고 했대. 생각해 봐. 주변에 100명이 있으면 7명이 성소수자라는 거잖아. 한국도 미국과 큰 차이가 안 날 텐데, 우리 주변에 성소수자를 그렇게 볼 수가 없잖아. 안전하지 않아서, 미덥지 않아서, 온갖 이유로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지 못한 성소수자가 많을 거야.”
동호도 나섰다. “이참에 우리 동네에 숨어 있는 앨라이든 성소수자든 모든 사람에게 안전하다는 느낌을 줄 수 있는 무지개를 띄워보자! 어때? 앞으로도 계속 가는 거지. 6월마다 우리도 프라이드 카페 위크 하는 거지. 여기를 본거지로 하고 점점 더 키워서 프라이드 동네 위크로도 가보자.”
단골 공동체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있었다. “새로운 세상은 장소가 아니라 행동”이라고 했던 왕진의사 양창모 선생의 말씀이 떠올랐다. 이들 덕분에 <밤9시의 커피>는 모두의 카페, 모두를 위한 카페가 되고 있다. 노키즈존, 노시니어존, 노펫(반려동물)존 등 온갖 분리와 차별, 배제, 혐오를 근간에 둔 영업이 성행하지만, <밤9시의 커피>는 그러지 않았으면 싶었다.
“우리 단골들 정말 멋져부러요. 성소수자, 이주민, 장애인, 비정규직, 아동, 여성 등이 이렇게 빛날 수 있다니! 최소한 이곳에서는 안전하다고 느끼고 마음껏 얘기할 수 있으니, 여기가 바로 스톤월이네요!”
세계 최저 출생률에도 노키즈존 영업이 성행하는 지독한 아이러니가 떠올랐다. 무지개 카페를 준비한 우리는 같은 생각을 했다. ‘차별금지법(평등법)의 부재가 불러온 파국의 징조’라고.
합리적 이유 없이 성별, 장애, 인종, 성적지향, 고용 형태 등을 이유로 차별적 구조에 놓인 개인이나 집단의 소수자를 구제하고, 국가와 지자체가 평등을 증진해야 할 의무를 명시해 헌법상 평등권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법률. 무지개 카페는 차별금지법을 환대한다.
무지개는 자연현상, 연결의 메시지
“고향에 온 느낌이에요. 오늘만큼은, 여기서만큼은 나를 마음껏 드러내도 된다는 생각에 편안해져요.” 태국이 고향인 날름은 프라이드 퍼레이드의 느낌을 알고 있었다. 환대받는 느낌이라고 덧붙였다.
인류가 무지개를 처음 만났을 때는 공포심을 느꼈다고 한다. 하지만 차츰 무지개에 대한 공포심을 지웠다. 자연현상임을 알았으니까. 인위적으로 거부할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자연 그대로의 현상. 무지개는 인류사에서 하늘과 땅, 신과 인간을 잇는 다리 구실을 했다. 노아의 대홍수 뒤에 등장하는 무지개가 그랬고, 한국 무속신앙에서 천지신명에게 기도하는 제사상에 올리는 무지개떡과 무당의 무지개 색동옷이 그랬다.
여름이면 세계 곳곳에서 무지개가 휘영청 떠오르는 이유는 사람과 사람을 잇기 위함이 아닐까. 분리하고 배제하면서 차별과 혐오를 쏟아내지 말고 잇고 연결하라는 에너지가 발산하는 것은 아닐까.
<밤9시의 커피>가 무지개 카페를 준비할 때만큼이나 왁자지껄하다. 무지개는 온 힘을 다해 빛나고 있었다. 무지개는 물방울이 태양 빛을 반사함으로써 나온다. 태양 빛의 지극히 작은 양이 형형색깔로 나타나 세상을 비춘다. 무지개 덕후 김상협 씨는 무지개의 물리 현상을 알면 무지개를 만나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 알 수 있다고 했다.
묘와 링은 이날 아주 멋진 무지갯빛 미니드레스를 입고 왔다. 두 사람은 좋아서 펑펑 울었다. 이럴 때 <밤9시의 커피>가 할 수 있는 일은 이에 걸맞은 커피를 내놓는 일. 우선 무지개 색 머그와 유리컵을 준비했다. 두리안은 내년에 회사에 얘기해서 무지갯빛 텀블러를 준비할 테니 굿즈로 팔자고 했다.
커피는 동성결혼이 허용된 코스타리카, 쿠바, 콜롬비아, 브라질, 남아공 원두를 각각 싱글오리진으로 준비했다. 각자 가고 싶은 나라의 커피를 골랐다. 이 가운데 카페인에 거부감이 있는 사람을 위해 준비한 남아공 라케모사 와일드(Racemosa Wild) 커피는 독특하다. 한국에서 접하기 힘든 이 희귀종 커피는 크와줄루나탈(KwaZulu-Natal) 지역의 세계문화유산인 세인트루시아 호수에서 아프리카 동부 해안을 따라 모잠비크까지 이르는 야생 해안 숲에서 자란다. 물 없어도 잘 견디고 모래 토양에서도 5m까지 자라지만, 재배가 어려운 보호종이다. 여느 아라비카 커피콩보다 1/3 가량 작고 재배도 쉽지 않다. 박하, 건조된 나무와 스모키 한 향을 품고 있다.
협력과 연대의 안전망
미국 스타벅스는 직원들이 성소수자 권리와 프라이드 행진을 지지하는 의미로 무지개 깃발과 장식을 매장에 달려고 하자 이를 막았다. 직원들은 이에 항의해 파업하면서 피켓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밤9시의 커피>는 단골 시민들이 참여해 무지개를 피웠다. 삶과 친구, 이웃이 있는 동네에서 다양한 자신을 드러내고 환대하고 받았다. 우리의 행동이 바로, ‘새로운 세상’이었다.
무지개 커피 잔을 마주치며 “혼인, 평등”을 외친 풍경은 내년에도 이어질 것이다. 당신도 초대한다. <밤9시의 커피>에서 사랑이 혐오를 이긴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경계를 지우며 포용과 존중, 자율과 의존의 감각을 키우고, 다르지만 협력과 연대를 통해 상호 안전망을 만드는 무지개를 만날 수 있다.
글 | 낭만(김이준수)
* 카페문화웹진 카페인(https://www.cafein21.co.kr) 기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