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에 묘지를 허하라!
세월호 참사 직후의 서울광장이나 지금 세월호 천막이 들어선 광화문광장을 만날 때마다 나는 죽은 자를 떠올리고 추모한다. 그리고 살아있음을 감사하게 여긴다. 그것이 내 마음을 경건하게 만든다. 이 바삐 돌아가는 서울에서 그런 마음을 들게 하는 공간이 있음에 안도한다. 물론 그것이 임시라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잊지 않겠다는 다짐과 함께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서울이 ‘죽음’을 허투루 다루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하나, 우리 사회가 여전히 죽음을 쉽게 다루거나 공포로 포장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지점이 있다. 6.13 지방선거를 앞두고 안산에서 일부 시장·시의원 후보들이 펼치는 작태를 보면 그렇다. 정부는 세월호 참사 4주기 합동 영결·추도식에서 화랑공원의 일부 유휴부지에 생명안전공원(세월호 추모공원)을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봉안시설은 지하에 별도로 마련하고 기억과 치유, 안전의 상징공간으로 '4.16생명안전공원'을 조성하겠다는 구상이다.
그러나 자유한국당을 비롯한 야당 시장·시의원 후보들이 생명안전공원을 납골당 등으로 표현하면서 '세월호 혐오'뿐 아니라 '죽음 혐오'를 부추기고 있다. 이민근 자유한국당 안산시장 후보는 왜곡된 통계까지 들이대며 불안감을 자극하고 있다. 안산시 자살률(10만 명당 29.2명, 2016년)을 보여주며 이보다 자살률이 낮은 경기도 내 다른 시·군을 대비시켜 세월호 참사 때문에 안산시 자살률이 높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안산시 자살률은 세월호 참사 전인 2013년 31.4명에서 2014년 30.5명, 2015년 29.3명으로 외려 매년 줄고 있음을 감안하면 선거용 공포 마케팅으로 악용하고 있는 것. 박주원 바른미래당 안산시장 후보 역시 마찬가지다. 세월호 추모공원 조성과 관련, "안산을 영원히 세월호의 도시, 슬픔의 도시로 남게 할 것"이라며 세월호 혐오를 퍼뜨리고 있다. 일부 안산 시민이나 아파트 입주자 대표회의 등도 집값 등을 이유로 추모공원을 반대하는 '님비'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런 주장은 죽음을 공포와 두려움으로 연결시키는 전형적인 공포 마케팅이다. 그러나 이는 자신들이 삶에 대한 철학이나 인식이 부재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행태에 지나지 않는다.
인권은 안드로메다에 있는 무언가가 아니다. 시민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깃든 삶의 태도에 가깝다. 생활권, 사회권, 노동권 등 시민이 함께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가 ‘인권’이라는 이름 안에 포함돼 있어야 한다. 인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주어진 권리이자, 함께 살아갈 것을 약속하는 책임이자 의무이다.
그렇다고 죽은 이에게 소홀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인권은 한 사회의 품격을 드러내는 지표다. 인권이 생활 속에서 자연스레 녹아있고 소외되는 사람이 없도록 만듦으로써 한 사회의 품격은 증명된다. 모든 생명이 똑같이 소중하다면 죽음에 대해서도 같아야 한다. 그것은 인간이 누리는 거의 유일한 평등이며 중요한 가치이자 실천적 인식의 토대이다. 평등과 공정이 아름다운 도시를 만들고 그런 도시에서 시민들은 함께 살고 싶은 도시를 가꾼다.
그래서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서울에 쉬이 접할 수 있는 묘지나 추모공원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성찰적 도시를 만들고 아름다운 도시를 만들 수 있다고 본다. 우리가 아름답다고 묘사하는 선진국 도시에는 묘지가 꼬박꼬박 있다. 외려 묘지가 없는 도시를 찾기 힘들다. 이탈리아 베니스에는 묘지 섬(산 미켈레 셈 공동묘지)이 있으며, 스웨덴 스톡홀름에는 세계 각국 묘지 디자인에 영향을 미친 우드랜드 묘지공원(스코그스키르코가르덴 묘지공원, 199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이 있다. 프랑스 파리에는 에디트 피아프, 이브 몽땅, 오스카 와일드 등이 묻힌 페르 라 쉐즈 묘지를 포함한 3대 묘지가 있을 정도다.
묘지는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자연스레 일상에서 만난다. 묘지는 그래서 죽은 이를 위한 것만이 아니다. 산 사람에게 삶을 누리는 것이 어떤 가치가 있는지, 사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여준다. 즉 삶을 성찰하게 만든다. 죽음이 두렵고 무서운 것이 아님을 인식하게 만든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 생과 함께 죽음도 부여받았음에도 죽음을 사는 동안 피해야 할 무엇처럼 밀어둔다.
세월호 참사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죽은 이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우리 사회가 지닌 인권 수준이 드러났다. 나는 죽은 이들을 대하는 태도가 살아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 모두에게 차별 없이 대하는 태도가 그래서 필요하다. 성별, 외모, 성적, 학벌, 직업, 지위 등 어떤 것으로도 우리는 차별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 어떤 삶과 죽음이든 홀대받지 않는 것, 그것이 도시혁신과 인권도시의 기본이 아닐까.
그나마 종묘라는 공간이 서울에는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묘지여서 남겨놓은 것이 아니다. 삶이 기억이고 이야기라면, 그 삶이 모여 사는 도시는 기억의 의무가 있다. 독일 베를린의 한 광장에는 홀로코스트 탑이 있다. 탑이 있는 광장의 바닥 1미터 아래에는 유리로 된 빈 서가가 있다. 칼 맑스, 토마스 만 등 유대인 학자 책을 괴벨스 지시로 2만 권을 불사른 야만의 현장이다. 이곳에는 시인 하이네가 쓴 “책을 불태우는 곳에서는 결국 인간도 불태운다”는 시구가 적혀있다. 그것은 홀로코스트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산 자들의 의무를 상기시킴과 동시에 다시는 끔찍하고 불행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성찰과 사유가 필요하다는 사실도 일깨운다.
묘지가 도시 안에 함께 있어야 삶이 경건할 수 있다. 그럼에도 지금 우리는 부동산(가격)에 목을 매달아 묘지를 허락하지 않는다. 나는 이렇게 주장하고 싶다. 도시에 묘지를 허하라. 그것이 인권이 살아 숨 쉬는 도시를 향한 기본이라고 본다. 그래서 나는 그런 도시의 시민으로 살아가고 싶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할 도시(서울)에서 나는 삶과 죽음을 분리해서 좋고 나쁨으로 재단하고 싶지 않다. 모두가 함께 누린다는 것은 분리하지 않는다는 말의 다른 판본이다.
오스트리아 빈의 중앙 묘지에는 베토벤, 모차르트, 슈베르트, 브람스, 요한 스트라우스 등이 묻혀 있다. 누가 이곳을 혐오시설이라고 말하겠는가. 묘지에서 음악이 연주되지 않아도 우리는 아름다운 음악을 떠올린다. 그리고 삶이 살아갈 만하다는 것을 느낀다. 나는 내가 사는 도시가 그랬으면 좋겠다. 사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여주는 도시에서 나는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