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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절대낭만 Jonathan Feel Jul 27. 2018

아나키즘 가족공동체를 만나다!

[리뷰] <어느 가족> : 스스로 선택하면 더 좋아지는 것들

<어느 가족>은 어린 소녀의 무덤덤한 얼굴로 영화를 닫았다. 그 무덤덤함은 어떤 슬픔을 불러온다. 마지막 장면까지 차곡차곡 쌓아올린 이야기에 묻은 감정 때문이다. 복잡해진다. 그 장면은 결국 감독이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대체 가족이 뭐라고 생각하니?

피는 물보다 진하다지만 정말 그럴까?

가족을 만드는 건 핏줄일까, 아니면 함께 정을 나눈 시간일까?     


보통의 우리가 가족에 대해 가진 ‘고정관념’에 균열을 내는 질문이다.      

한편으로 나는 다른 질문도 받았다.


지금 국가가 존재하는 방식은 과연 정당한가?

태어나서 선택권 없이 주어지는 가족과 국가를 선택할 자유를 가질 순 없을까?


<어느 가족>에 대한 숱한 리뷰와 평론은 ‘가족’에 집중한다. 그러니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글에 맡기고 나는 <어느 가족>의 기저에 살짝 흐르는 ‘아나키즘’에 대해 말하겠다.      

아나키스트 가족공동체      


“(상품이) 가게에 진열돼 있는 동안은 누구의 것도 아니야.” 

“집에서 공부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가는 곳이 학교야.”     


3대가 함께 사는 집의 손자 쇼타(죠 카이리 분)가 배운 것이다. 동네 슈퍼나 마트에서 좀도둑질을 하는 것, 또래와 달리 학교에 가지 않는 것에 대해 오사무(릴리 프랭키 분)와 노부요(안도 사쿠라 분)는 그렇게 일러줬다. 가정경제를 지탱하는 가장 큰 노동은 좀도둑질(?)이고, 이는 아이까지 동참시켜 ‘패밀리 비즈니스’로 운영된다.     

기존 도덕관념이나 사회 통념으로 보자면, 이들은 범죄 집단이다. 상품에 ‘돈(이라는 사회적 약속이자 법정화폐)을 지불하지 않고’ 스스럼없이 훔칠 뿐 아니라 죄의식도 없(어 보인)다. 세탁 공장이나 공사 현장 등에서 일(노동)을 하지만 돈을 모으거나 경제적으로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하지도 않는다. 국가복지 체계를 비웃듯 (핏줄로 엮이지 않은) 노인을 연금 수령자로 내세워 연금을 받는다. 의무교육이 시행되는 사회에서 취학 연령의 소년을 학교에 보내지도 않는다.     


국가사회가 만든 체계가 요구하는 잣대로 판단하면 이 가족은 ‘사회악’이다. 이 체계가 가족 단위에게 부과하는 의무를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은 정말 ‘가족’일까? 국가는 이들을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혼인 관계도 없고 혈연(피)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정식 입양 절차도 없이 아이와 함께 산다.     


그 관계도를 보자. 할머니 하츠에(키키 키린 분)는 전 남편(의 사망) 덕분에 연금을 받고 전 남편의 재혼 가정에 종종 찾아가 용돈을 받는다(아무래도 남편 추모가 아니라 그 아들에게 돈을 받는 게 목적인 것 같다). 그 집안의 큰딸 아키(마츠오카 마유 분)도 어찌된 일인지 부모를 속이고 할머니와 함께 산다. 섹스 없이 마음으로 이어진 사이라는 오사무와 노부요는 부부처럼 보이지만 혼인 제도로 맺어진 관계가 아니다(극 중 딱 한 번 섹스를 한다). 두 아이도 피를 물려받은 후손이 아니다. 쇼타는 친부모가 방치한 차 안에서, 유리(사사키 미유 분) 또한 ‘내가 낳고 싶어서 낳은 게 아니’라는 친부모의 학대와 폭력에서 각각 구조(?)됐다. 그러나 이도 사회통념으로 보자면 유괴다. 노부요 말마따나, 감금이나 금품 요구만 없었을 뿐. 유괴의 성립 요건에 반드시 감금이나 금품 요구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님에도.      


도둑질이 가장 중요한 생계수단(?)이나 어른들도 직장을 다닌다. 쇼타는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고 노부요는 세탁공장에서 시급을 받는다. 아키는 유사성행위 업소에서 노동한다. 그렇다고 묵묵히 일만 하는 건 아니다. 일하다가 다친 쇼타는 일용직도 산재보험이 적용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어떻게든 이를 받고 싶어 하나 결국 보상받지 못한다. 그럼에도 권리를 찾을 생각은 없다. 노부요는 세탁물에 든 물품을 슬쩍 훔쳐 부수입을 얻는다. 아키 역시 국가가 인정하는 노동에 종사하는 건 아니다. 아마 그는 세금을 내지 않을 것이다.     


의도한 바는 아니겠으나 이들은 국가사회가 만든 체계를 무시한다. 즉, 이들은 (혼인과 핏줄, 때론 입양으로 맺어진) 가족 단위로 의무나 권리 등을 부과한 국가의 각종 체계의 범주 밖에 있다. 사회가 만들어놓은 ‘정상가족’의 틀에서 벗어난 것도 의도해서가 아니다. 그저 어쩌다 보니 제각각 루저가 됐고 루저끼리 할 수 있는 건 뭉쳐서 사는 것이다. 그것 역시 의도보다 우연에 기인한 측면이 커 보인다.       


하지만 그들을 가족이라고 부르지 않을 이유도 없어 뵌다. 한 자리에 모여 서로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고 좋아하는 떡을 훔쳐주기도 한다. 어설픈 마술을 보여주면서 함박웃음을 짓고 훔치다 빠뜨린 것을 다시 챙기겠노라 일상처럼 말한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제도로서 가족이 아니다. 함께 시간을 보내고 정을 나누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곧 그들은 공동체다. 제도권 밖의 아나키스트 가족공동체다.       


어쩌면 일어날지도 몰라기적        


‘아나키즘’(anarchism)을 단순히 ‘무정부주의’로 해석하는 것은 게으르다. 백과사전식 정의에 의하면 아나키즘은 모든 정치조직과 권력 체계를 부정하는 사상 및 운동이다. 무정부주의라는 해석이 게으르다고 말하는 것은 아나키즘이 국가권력만 비판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자본이나 종교 등 권력 체계가 작동하는 모든 영역을 비판하며 정치적 지배뿐만 아니라 경제적 지배 등을 포함한 모든 영역의 지배를 부정하고 의문에 붙인다.     


따라서 좀도둑질도 자본가의 화폐적(경제적) 지배에 태클을 거는 행위가 될 수 있다. 진열대에 있는 상품은 누구의 것도 아니라는 극중 대사는 도둑질을 정당화하기 위한 오사무의 고육지책이지만 나는 그 이면에 고레에다 감독의 은근한 아나키즘이 도사리고 있다고 읽었다.      


그들이 도둑질에 나서는 이유도 좀 더 깊게 들여다봐야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어떤 사상이나 철학에 의한 것이 아니다. 당장의 ‘빈곤’이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국가사회의 오래된 노동관은 구닥다리로 전락했다. 많은 사람이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는 현실이다. 더구나 이 노동관은 사회적 약자에게 더욱 가혹하다. ‘가난 구제는 나랏님도 못한다’는 말도 국가사회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비겁한 변명이다. 루저들의 좀도둑질을 너무 확대해석한 것이 아니냐고?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나는 빈곤을 조장하고 방조한 권력 체계에 똥침을 날리는 기제의 은유로 좀도둑질이 선택됐다고 여겼다.     


고레에다 감독이 이들을 가족으로 엮은 것도 기존 가족 체계나 통념에 균열을 가하기 위함이다. 유리의 마지막 표정은 ‘가짜’가 ‘진짜’를 이길 수 있음을 보여준다. 국가가 자신의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가족 제도가 실은 얼마나 허술할 수 있는지, 때론 폭력적인지 깨달을 수 있다. 지나치게 참견하고, 쉽게 폭력을 휘두르고 깊은 상처를 주고 거짓말하는 진짜 가족보다 ‘핏줄이 아니어서 기대가 없’고 참견과 강요 없이 그저 옆에 있으면서 안아줄 수 있는 가짜 가족이 원론적인 가족의 정의에 더 부합하게 보인다.       


공권력과 보통 사람들의 비틀어진 시선도 강력한 권력 체계로서 작동해 왜 그들이 함께 살았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등에는 관심이 없다. 좀도둑 가족의 유대감과 정은 고려할 대상이 아니다. 노부요가 자식을 낳지 않은 사실에만 매달려 아이를 갖고 싶어서 유리를 유괴한 것이 아니냐는 취조를 빙자한 비난은 국가 권력 체계가 개인과 가족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여실하게 보여준다. 그들에게 개인과 가족은 국가 생산력과 재원(세금) 확보를 위한 기본 단위일 뿐이다.      


그러니, 훔친 것이 아니고 주운 것이며, 버린 사람이 잘못한 것이지, 버려져 있던 것을 주운 것이 왜 잘못이냐는 항변은 옳다. 그렇게 항변한 노부요의 마음을 영화를 본 사람은 안다. “네가 잘못한 게 아니야. 사랑해서 때린다는 건 거짓말이야. 정말 좋아한다면, 사랑한다면 이렇게”라며 친엄마의 폭력에 상처 입은 유리를 꼬옥 안아주는 장면을 봤으니까.   

<어느 가족>은 기존 사회 체계에서 절도, 유괴, 유사성행위, 등교 거부 등으로 단죄할 수 있는 행위의 이면을 바라본 영화다. 그리고 생각하고 질문을 던지게 하는 영화다. 이 영화의 기저에 깔린 아나키즘은 개인의 선택에 방점을 둔다. 어린 유리는 친부모보다 좀도둑 가족을 선택했다. 실은 좀도둑 가족 각자도 선택을 한 것이다. 노부요가 하츠에에게 건넨 말이 귓가에 남는다.  


“선택할 수 있다면 더 강해지는 것 같아. 연대, 정 같은 것 말이야.”     


피보다 진한 물도 있다. 국가, 가족, 성 등 선택할 수 없이 주어진 것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에 대하여 우리는 다시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낳기만 하면 엄마가 되는 것이 아닐 수도, 낳지 않아도 엄마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온전하게 자신이 선택할 수 있다면, 자기결정권이 더 커진다면 우리는 더 좋은 삶을 살고 더 좋은 세상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유리(린)의 얼굴이 장식한 <어느 가족> 마지막 장면은 올해 가장 강렬한 마지막 장면으로 자리매김할 것 같다. 올해 말까지 여러 영화를 만나겠지만 이것을 능가할 마지막 장면을 접하긴 쉽지 않을 것이다. 질문과 슬픔이 한꺼번에 가슴에 박히는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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