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잉글랜드 이즈 마인> : '더 스미스' 비긴즈
청춘이 마냥 반짝반짝 빛나는 것은 아니다. 청춘은 때론, 어쩌면 자주 우울과 비참을 등에 지고 산다. 빗물이 줄줄 새고 눅눅한 집안의 음습함을 닮았다. 뭐 하나 제대로 되는 일도 없고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도 없다. 어쩌다 반짝 빛나는 순간이 있어도 그 순간이 지속되진 못한다. 내가 왜 세상에 있는 건지 이유도 못 찾겠다.
여기 이 청춘이 그러하다. <잉글랜드 이즈 마인>의 스티븐(잭 로던 분)에게 인생은 그저 따분한 장식품 같다.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세상도 야속하다. 그렇다고 세상을 향해 소리치거나 맞짱 뜰 용기도 없다. 한마디로 심약한 청춘이다. 주저하고 돌아서며 낙담하는 것이 일상화된 우울한 청춘의 자화상.
<잉글랜드 이즈 마인>. 사전 정보 없이 만났다. 그저 청춘을 다룬 영화로 읽었다. 스티븐에게 착 들러붙은 청춘이 막막한 한 시절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청춘의 시기를 묘사하는 두 극단 중 우울에 집중했다고 생각했다. 그래, 그땐 그럴 수 있어. 저 우울한 청춘도 언젠간 비상하겠지,라고 애써 애틋함을 담아 바라봤다. 글도 쓰고, 음악도 하지만, 곧잘 그 재능이 반짝 빛나 보여도 좌절은 일상이요, 낙담은 DNA였다. 그나마 결말에 희미한 빛이 살짝 들어오는 순간, 희망의 지푸라기가 낙하한다고 여겼다. ‘골방 청춘 표류기’ 정도로 여겼다.
극장 문을 나와 포스터를 만나고서야 알았다. 이런. 브릿팝의 전설 ‘더 스미스’의 리더, 스티븐 모리세이! 순식간에 영화와 주인공이 퍼즐처럼 제 자리를 잡아갔다. 애벌레가 껍질을 깨고 날갯짓을 할 거란 희미한 기대는 이미 증명된 미래였다. 골방 셰익스피어는 브릿팝의 셰익스피어가 되었다. 음악영화라고 했을 때 흔히 예상하는 폭발적인 무대공연 따위의 클리셰가 없어서 다른 결의 영화라고 생각했었는데, ‘더 스미스’의 프리퀄이었던 셈이다.
모리세이가 스티븐이었던 시절. 스티븐은 험하게 요동치는 물결을 바라본다. 그것이 지금 내 마음인 마냥. 영화는 종종 강둑을 흐르는 흙탕물을 비춘다. 뿐만 아니다. 안개 내린 도시의 음울한 풍경, 가로등 불빛 아래 흔들리는 발걸음, 담배 연기 자욱한 바, 불투명한 유리창 너머. 때때로 클로즈업된 사물이 스크린을 차지한다. 불안과 흐림, 흔들림을 드러내는 장면이 순간순간 드러난다.
영화는 詩的이다. 영상詩라고 불러도 무방하겠다. 의식의 흐름이 드라마를 장악한다. 관객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겠지만, 과감하게 때로는 과하게 강조된다. 글 쓰는 암울한 골방 청춘 스티븐을 묘사하기 위한 선택이다. 그에게 큰 영향을 준 오스카 와일드의 詩나 문구가 종종 스크린에 스민다. 스티븐이 가진 특유의 ‘블랙 포스’가 스크린 너머로 뚝뚝 떨어진다. 음울한 감수성 과잉의 청년은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을 그저 골방에서만 재단할 뿐이다. 그러니 스티븐은 뮤지션보다 ‘음유시인’이 더 잘 어울린다. 문학청년의 신춘문예 분투기 같은 분위기다.
그래서 <잉글랜드 이즈 마인>은 평범한 전기영화가 아니다. 극 중 ‘더 스미스’는 결성되지도 않았으니 스미스에 대한 미완성 퍼즐로 접근할 수도 없다. 더 스미스의 노래도 없다. 영화를 통해 슈퍼스타가 되기 전 여느 청춘보다 더 암담했던 미완성 유충의 꿈틀거림을 만날 뿐이다. 오스카 와일드를 흠모하는 습작생이 머지않은 훗날 브릿팝의 셰익스피어가 되기까지 자신만의 세계를 만드는 과정을 엿볼 수 있다. 그 과정은 보는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것 같다. 청춘의 불안과 열병을 앓아보거나 앓고 있는 사람에겐 남다르게 다가올지도 모른다.
그는 일관적이지 않다. 물론 그것이 그를 인간적으로 가깝게 느끼게 만든다. 자의식이 충만하지만 소심하기 이를 데 없다. 그것을 예술가적 기질이라고 받아들이기에 그는 그저 괴팍한 청년일 뿐이다. 내성적인데도 자기 과신이 강하다. 문밖을 나서기 전 쭈뼛거리기 일쑤지만 공연 뒤 천재성이 발견됐다며 자아도취에 빠져 으스댄다.
이 캐릭터는 복잡해 뵌다. 쟤, 뭐야? 쟤, 웃긴다. 이런 말이 그의 주변을 행성처럼 맴돌 것 같다. 생계를 위해 마지못해 하는 세무서 잡일에 좀처럼 집중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남들이 자신의 진면목을 알아봐 주지 않는다는 투정만 부린다. 남들이 그를 알아봐야 할 이유가 없음에도 말이다. 과감하게 알을 깨고 나서지 못해 당연히 맞닥뜨린 실패도 감당하지 못하는 연약함은 어떻고.
흥미로웠던 건 무기력한 그를 추동하는 여성들의 존재다. 제각각 연관성 없는 우연으로 구성됐지만 그 우연들이 빚어내는 앙상블이 스티븐을 조금씩 변화하게 만든다. 그것을 우연이라고 표현했지만 우연을 하나씩 ‘도장 깨기’하면서 나아가는 건 결국 스티븐이다. 제 아무리 좋은 우연이 다가와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그건 그저 스쳐가는 바람이다. 받아들이고 행동하는 건 자신이니까.
뭣보다 스티븐의 주변에 있는 여성 대부분은 그와 달리 진취적이다.
친구 안지(캐서린 피어스)는 소심한 그에게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라고 직설적인 조언을 날리고, 세무서에서 함께 일하는 크리스틴(조디 코머)은 스티븐을 대놓고 유혹한다. 스티븐이 좋아하는 예술가 린더(제시카 브라운 핀들레이)는 끊임없이 그를 격려하고 세상 밖으로 나가길 권한다. 스티븐의 엄마는 또 어떻고. 무기력한 스티븐에게 “너만의 세상을 만들어. 오직 너 자신만이 유일한 너야”라며 토닥거림은 감독이 청춘에게 건네는 메시지 같다.
다만 극 중 엄마가 건넨 한 마디는 속 보이는 전환용 억지 같았다. 극 중에서 이전까지 엄마가 하던 역할은 병풍이었다. 좋은 메시지를 던질 만큼 차곡차곡 쌓아 올린 캐릭터가 아니었다.
청춘의 시간은 길고 지루하다. 느낌이 그렇다는 얘기다. 똑같은 시간이 주어져도 청춘에게는 유독 깊고 긴 침잠의 시간이 될 수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제 아무리 뛰어난 재능도 뚜껑을 열고 나와야 한다. 뚜껑을 열지 않으면 무엇이 들어가 있는지 알 수 없는 단지 같은 것이 청춘일지도 모른다. 단지 안에서 익어갈 수도 있고 썩어갈 수도 있다.
모리세이는 ‘스티븐’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싫어했다고 한다. 그러니 <잉글랜드 이즈 마인>은 ‘더 스미스’도 아니요, 브릿팝 셰익스피어의 유충기도 아니다. 못난 청춘 스티븐이 세상의 문을 열어보고자 던진 무수한 노크다. 우리는 결과를 안다. 더 스미스는 위대한 탄생을 하였고, 5년 뒤 밴드가 해체하긴 했으나 모리세이는 솔로로서도 여전한 스타의 지위를 누렸다.
문을 두드린다고 세상이 문을 활짝 열어주진 않는다. 하지만 문을 두드리지도 않는다면 세상이 문을 열어줄 이유도 없다. 누가 문을 두드렸는지 알아차리지도 못한다.
서성인다면, 좀 더 과감해지면 좋겠다. 청춘에게만 해당하는 말은 아니다. 중년, 장년, 문앞에서 서성이기만 하는 우리에게 건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