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변산> : 님아 그 노을을 함께 봐 주오
고향을 떠난 사람이 내뱉는 다짐은 거칠게 두 개로 나눌 수 있다.
성공해서 꼭 돌아오마.
이놈의 고향,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
다른 소수 의견도 있겠지만, 고향을 떠나 살면 ‘나의 살던 고향’은 뒷방으로 밀리게 마련이다. 그리워하든 미워하든, 다 마찬가지다. <변산>은 두 다짐들 중에 후자로 시작한다. 학수(박정민 분)가 등 떠밀려 고향 변산에 돌아와 파출소까지 가야 하는 해프닝에 휘말리자 한마디 내뱉는다. “아, 이놈의 동네 정말 가지가지하네, 정말!” 스웩.
학수에게 고향은 그저 태어나 자란 곳일 뿐이다. 어머니를 잃은 곳이며, 어머니를 외롭게 한 아버지가 있는 곳. 첫사랑의 고백이 차인 곳. 그리고 문학소년이었던 그가 詩를 도둑맞은 곳이다. 그가 쓰다 만 이 詩에는 고향에 대한 복잡한 심정이 담겨 있다. 가난과 노을.
내 고향은 포항
내 고향은 가난해서 보여줄 건 노을 밖에 없네
변산은 학수의 뿌리지만 또 다른 뿌리인 어머니의 죽음 이후 그는 뿌리에 미련이 없다. 고향과 가족을 뒷방으로 밀어놓고 서울로 떠난다. 그를 채운 건 아마 분노, 특히 가정을 내팽개친 아버지에 대한 분노였을 것이다. 때문에 그는 아버지가 있는 고향을 부정하고 싶었던 것 같다. 분노를 어떻게든 분출해야 하니 래퍼를 선택한 건 아니었을까. 랩이 그렇잖아. 부조리한 현실과 처지를 견딜 수 없어서 쏟아내는 해방구. 고향을 버린 마당에 문학이라고 온전할쏜가. 대신 랩이 문학의 빈자리를 메운다.
학수는 어쨌든 ‘쓰는 사람’이라는 익숙한 정체성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변산>은 또 다른 ‘쓰는 사람’을 학수의 파트너로 소환한다. 선미(김고은 분). 어린 날부터 학수를 줄곧 짝사랑하여 문학소년을 따라 하다 보니 진짜 ‘작가’가 된 고향 친구. 학수 아버지가 쓰러졌다는 연락을 취해 학수를 변산으
로 재소환한 장본인이다.
학수에겐 선미도 고향에 묻은 흑역사다. ‘과거사 청산’ 작업을 할 수 있다면 깡그리 묻고 싶은 기억들. 아버지 안위
만 확인하고 서울로 향하고자 하나 고향은 다시 발목을 잡는다. 말도 안 되는 이유가 그를 붙들어 매는데, 나는 그것을 학수 마음이 이전과 달라진 때문으로 해석했다. 그 이유, 무시하고 서울로 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고향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달라진 것이다. 분노 게이지가 만랩일 때 떠난 고향과 지금의 고향은 다르다.
고향을 떠나 있는 동안 학수는 많은 것이 바뀌었고 학수가 떠난 고향과 고향 사람들도 바뀌었다. 모든 것이 변화했고,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은 없었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나 썩지 않고 흘렀다.
학수에게도 서울 생활은 지치고 고달팠을 것이다. <쇼 미 더 머니>는 시즌1부터 시즌6까지 말이 좋아 개근상이지, 얼굴만 팔릴 뿐 성과는 없지, 생계유지 차원의 발레파킹과 편의점 아르바이트는 고단하다. 한 몸만 꾸역꾸역 들어가 뉘일 자리조차 불편한 고시원 방은 어떻고.
꿈이 있어서 버텼다는 말은 너무 나이브하다. 어쩌면 고향으로 돌아가고픈 충동도 있었을 것이다. 학수 마음 깊은 곳에 ‘금의환향 콤플렉스’가 있다는 증명이다. 고향이 싫어 떠났다고 말하고, 성공해서 돌아오고 싶었다고 적는다.
그러니까,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가 아니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도 아니다. 그땐 그때 나름의 떠난 이유가 분명히 있었고, 지금은 지금 나름의 돌아온 이유가 있을 뿐.
나는 그 이유 하나로 ‘노을’을 꼽고 싶다.
학수에겐 다시 만난 노을이었다. 가난한 고향이지만, 자랑하고 싶었던 노을. 학수와 선미를 쓰는 사람으로 만든 노을. 두 사람의 공통점은 어쩌면 ‘노을 마니아’. 변산의 노을이 각자를 작가와 래퍼로 만든 것은 아닐까.
우리는 잊었다고 생각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불쑥 튀어나오는 무언가를 맞닥뜨릴 때가 있다. 그것은 여물지 않은 채 서둘러 봉합한 상처나 해결되지 못한 문제일 수도 있다. 또 나를 형성한 근원과 추억일 수도 있다. 학수에겐 짜증 나고 분노 게이지를 높이며 흑역사로 치부했던 고향이었다. 노을을 바라보자 그게 고향의 전부는 아니었다. 나를 키워 준 팔 할이 고향이라는, 뿌리 의식이 살아났다. 물론 여기서 고향은 물리적 고향뿐 아니라 정서적 고향을 포괄한다. 노을을 보자 정서적 고향이 목 놓아 부르고 싶은 노래(랩)가 되었다. ‘고향이란 출생지가 아니라 삶을 지어 올린 곳’이라는 표현에 고개를 끄덕이는 이유다.
나의 살던 고향이 지겹고 지긋지긋한 모습에서는 <레이디 버드>가 떠올랐다. 시얼샤 로넌이 연기한 크리스틴도 그랬다. 떠나고 나서야 조금 알게 된다. 아, 지금의 나는 고향이 있기에 가능했구나. 과거와 화해하는 건 중요하다. 불편하다고 외면하거나 도망치거나 견디는 건 능사가 아니다. 고단했던 서울 생활도 고향을 다시 바라보게 만들었을 것이다. 계기는 특별하지 않다. 그저 예전과 다른 형상으로 변했고 그에 맞춰 시선도 달라지고 태도 역시 변화했을 뿐이다.
학수가 앞으로 래퍼를 계속할지 모르겠지만, 나비가 되고 싶은 유충이 일단 단단한 껍질을 깨고 나왔기에 어떤 길을 택하든 날갯짓을 잘 할 것 같다.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한다는 것을 전제로 이준익 감독은 충만한 청춘송가를 부르고 있다. 다만 영화가 좀 길다. 이준익 감독이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처럼 보였다. 학수와 용대가 앙금을 털기 위해 갯벌 맨몸 격투 씬은 적정함을 넘어선다. 클라이맥스라고 하지만 길다.
<변산>을 왜 봐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노을이요, 라고 답해줄 것이다. 오죽하면 이준익 감독도 그랬겠나. “학수와 선미가 노을을 바라보며 정말 솔직한 순간을 맞이하는 그 씬 때문에 <변산>을 연출했다.” 노을이 스크린을 통해 펼쳐지는 순간, 나도 함께 노을 앞에 서 있게 된다. 에필로그 집단 군무는 유쾌한 엔딩을 선사한다. 보너스 장면 같다. 신이 난다. 스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