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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절대낭만 Jonathan Feel Jan 21. 2018

아픔은 사랑의 다른 이름임을,

10년 전 떠난 히스 레저의 <브로크백 마운틴>을 떠올리며

7~8년 전이다.

당시 울산 MBC라디오의 한 프로그램에서 일주일에 한 번, 전화를 통해 청취자에게 영화 소식을 전하던 나는 진행자에게 느닷없이 신청곡을 주문했다. He Was A Friend Of Mine. 녹화 방송이었는데, 진행자는 틀어주겠다고 했다.(울산이라 정작 나는 라디오를 들을 수도 없었지만, 노래를 기억하는 사람과 나누고 싶었다.)


딱, 이 무렵이었기 때문이다.

저 노래(제목)를 알고 있는 이라면 벌써 눈치챘겠지만, <브로크백 마운틴>에 삽입된 곡이다.

그래 이맘때, 어쩔 수 없이, 히스 레저다. 그와 작별한 지도 어느덧 10년. 2008년 홀연히 떠난 그였다. 스물여덟. 공식 사인은 '우발적 약물 과다 복용'.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아니었(고 믿고 싶)다.

<브로크백 마운틴> 포스터

작별 전까지 절절하게 좋아했던 배우는 아녔다.

<브로크백 마운틴>을 처음 만났을 때도, 나는 히스 레저가 분한 에니스보다 잭(제이크 질렌할)에게 더 마음이 갔다. 연기 꽤 잘한다고 생각했었지만, 당시 내 취향은 아니었다. 당시 나는 윤곽 뚜렷하고 조각처럼 미끄덩 잘 생기거나 예쁜 배우를 선호했었다. 히스는 그런 내 취향에 부합하지 않았다.(실은 <브로크백 마운틴> 첫 만남에서 진짜 어메이징 한 발견은 '앤 헤서웨이'였었다. 정말 예뻤다!)


그러나 작별 이후,

<브로크백 마운틴>을 수차례 다시 만나고 그의 필모그래피와 거듭 만나면서 그에 대한 애정이 깊어졌다. 물론 더 이상 (살아서) 볼 수 없다는, 끝내 펼쳐볼 수 없는 미래의 가능성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요절은 그런 감정을 증폭하기 마련이니까. 그가 출연한 영화를 통해 가졌던 애틋함 때문에 느낀 상실감도 겹쳤을 것이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이런 말을 남겼다.

히스가 떠난 직후인 제14회 배우조합(Screen Actors Guild) 시상식, <데어 윌 비 블러드>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다니엘은 소감을 통해 히스를 거론했다. "<브로크백 마운틴>의 히스 레저는 완벽했다. 나는 그를 만나본 적이 없지만 그는 이미 인생에서 아름다운 일들을 많이 했다." 아름다운 청년, 히스 레저. 죽어서도 호명된 그의 이름에는 아름다움이 묻어있었다.

<브로크백 마운틴> 스틸컷

히스를 떠올릴라 치면 광활한 산맥이 먼저 떠오른다.

그건 <브로크백 마운틴>(Brokeback Mountain) 덕분이다. 만년설로 덮인 봉우리와 웅장하고 남성적인 산세, 맑고 깊은 계곡과 한없이 드넓은 푸른 초원. 그런 초원 위에 수천 마리 양 떼가 어슬렁거리고 그 양 떼를 지키는 두 명의 카우보이. 히스는 그 카우보이 중의 한 명이었다. 누군가는 배트맨의 조커(<다크 나이트>)로 그를 각인하고 있을지 모르겠으나 <브로크백 마운틴>을 빼고 히스 레저를 말할 순 없다.  이 영화를 떠올리는 건, 마음이 아릿하게 저리는 일이 될 수 있겠지만, 마다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누군가는 그를 향해, "I Swear..."를 읊을지도 모르겠다.

<브로크백 마운틴>, 마지막 신. 에니스는 잭이 남긴 옷을 보면서 그렇게 나지막이 뱉는다. 아마, 이 영화를 가슴으로 본 사람이라면, 히스의 죽음 앞에 이 장면을 자연스레 떠올렸을 것이다. 나는 그랬다. 슬픔을 가슴으로 삼킨 그 얼굴이 떠올랐다.

도리가 없잖나.

당신이라면 그의 어떤 얼굴을 떠올렸겠나. <다크 나이트>의 조커? 글쎄, 그가 조커를 맡아 지나치게 몰입해 정신적인 혼란을 겪었다는 소문도 있었다만, 그건 배우가 가진 일종의 숙명이었을 터. 온전하게 배우였던 그가, 조커를 즐겼을망정, 그것을 자신의 마지막 얼굴로 삼고자 했을 리는 없다.


히스의 마지막 얼굴을 꼽으라면,

역시나 <브로크백 마운틴>의 에니스가 제격이다. 세상 시선이 두려워 사랑과 마음을 숨겨야 했지만 평생 동안 사랑하겠다는 맹세를 하는 얼굴. 완벽에 가까운 배우, 다니엘 데이 루이스도 완벽하다고 격찬했던 그 얼굴. <브로크백 마운틴>의 잔상이 그의 모든 것처럼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아픔, 사랑의 다른 이름이었다.

세상에서 지독하게 파멸당한 사랑이었다. 사랑했지만,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못하고, 밖으로 표출하지 못한 채, 안으로만 삭혀야만 했던 사랑. 해서는 안 될 사랑, 그런 게 있어선 안 된다. 사람을 때리는 게 나쁜 거지, 사람을 사랑하는 게 나쁠 턱이 있나. 하지만 세상은 때론 제멋대로 사랑을 속박한다. 울타리를 치고 박는다. 브로크백 마운틴에 풀어놓은 양들 같은 처지다. 방목하는 것 같지만, 결국 누군가의 소유이며, 정해진 틀을 벗어나선 안 되는. 그저, 울타리 안에서만 가능한 활동. 대체 사랑이 왜 그래야 돼?


사랑에 필요한 건 세상의 윤리가 아니다.

사랑에는 오로지 사랑의 윤리만 있으면 된다. 사랑에 관한 이치는 단순하다. 사랑은 당사자의 선택이 돼야 한다! 오지랖은 지랄이다. 왜 간섭하니. 어떤 권리로 참견하니. 부디 네 사랑에만 집중해라. 남의 사랑에 시시콜콜 감 놔라 배 놔라, 오버다. 세상아, 사랑은 사랑의 것이다. 사랑에 혐오를 날리는 꼬락서니, 참 꼴불견이다.  


사랑은, 세상의 윤리가 갖다 댈 수 있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사랑은 ‘누가 누구와 함께하고 싶은가’의 문제다. 함께하고 싶은 사람들이 함께하면 그건 옳다. 그렇지 않은 사람, 서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 함께하면 그르다. 사랑은 세상의 윤리가 가늠하거나 잣대를 들이댈 것이 아니다. 옆에서, 혹은 당사자도 아닌 이가, 너의 사랑이 이러쿵저러쿵, 말짱 헛것이고, 헛말이다. 닥치고 꺼져라, 외쳐도 좋을 터.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아쉬운 건 그것이다.

극 중에서 닥치고 꺼져라, 하고 외치지 못했다. 몰래 한 사랑은 너무 슬픈 사랑이었다. 이 사람이 내 사람이다, 이 사람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슬픔과 아픔.  잭이 세상의 삐뚤어진 시선에 'F word'를 날리자고 했으나, 에니스를 칭칭 감은 세상의 윤리는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겁이 날 만도 했으리라. 더 없이 보수적인 시선이 시대를 감싸고 있었다. 또 가난한 노동자가 택할 수 있는 선택의 폭도 그닥 넓지 않았다. 그것이 사랑이라도 말이다.


결국 그 사랑, 파멸당했다.

브로크백은 어쩌면 '시크릿 가든'이었다. 둘만의 사랑을 간직했지만, 실상은 마법도 없고, 체인지도 없는. 현실에서 인어공주는 거품이 될 뿐이다. 하늘은 가끔, 지상의 위대한 연인을 질투해 자신의 처소로 불러들인다. 히스도 아름다운 사람을 먼저 하늘로 데려가곤 하는 하늘의 습관에 불려 간 건 아닐까. 하늘은 그렇게 제 욕심을 채우곤, 지상에 슬픔과 아픔만 똑 남긴다. 그건 남은 사람들의 몫인 양. 사랑이 한편으론 아픔이요, 슬픔이라는 것을 알라는 하늘의 뜻인가.


에니스는 터뜨리지 않고 꾹꾹 누르고 삼키던 사람이었다.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던 사람. 히스는 그런 에니스로 각인된 것이 어떨지 몰라도, 그 모습은 예민하고 섬세한 예술가의 초상 그 자체였다. 고전 ≪폭풍의 언덕≫의 주인공 히스클리프를 본뜬 이름부터, 그는 깊은 강이 되고 싶었다. 호주 출신으로 할리우드의 포화와 공세에 잡아먹히지 않은 배우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예술적 영혼 덕분이 아녔을까.  


히스는 <아임 낫 데어>에서 '밥 딜런'의 어떤 한 모습을 그렸다.

그는 세상에 없는 모습을 구현하지 않았음에도, 영화 제목처럼, 'I'm Not There'를 실현했다. 이제 더 이상, 새로운 그를 스크린에서 불러낼 재간은 없다. 디지털 매직이 그것을 가능케 한다 해도 그건, 히스가 아니다. 그는 이제 박제된 채로만 나타난다. 성장도 노화도 멈춘 그때 그 청춘으로만.

<아이 앰 히스 레저> 포스터

2017년 가을,

<아이 엠 히스 레저>는 그런 청춘을 고스란히 담았다. 오랜만에 만난 그 청춘, 눈물겹게 청춘이었다. 청춘으로 삶을 온전하게 채우고, 충실히 실패했던, 그럼에도 히스 레저로 남았던 히스 레저. 충분히 좋았다. 완전한 오늘을 사는 청춘. "I completely live in the now, not in the past, not in the future."(나는 완전한 오늘을 살아요, 과거도 미래도 아닌.)


10년.

그를 애도하고 추모하는 물결이 넘실댄다. 그는 없지만, 없는 것이 아니다. 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명복을 빌거나 어쩌다 히스가 그리워지는 날에 영화를 돌려보고, 추모를 공유하는 일밖에 없을지라도. 브로크백이 안겨준 에니스와 잭의 사랑에, '사랑 확신범'으로서 응원할 수밖에 없어도. 1월 22일 메모리얼 데이 상영도 있지만, 좋아하는 히스의 영화 한 편 봐줘도 좋겠다. <브로크백 마운틴> 외에 추천하자면, <내가 널 사랑할 수밖에 없는 10가지 이유>. <다크 나이트> <기사 윌리엄> <아임 낫 데어> 등도 좋겠고.  


10년 전, 2008년 1월 22일 히스 레저가 영영 떠났다.  

나는 1월 22일의 커피로 평소와 다른 커피를 고른다. '에스프레소 리스트레토(ristretto)'에 스티밍 우유, 한 점을 찍는다. 내가 멋대로 붙인 메뉴 이름은, 브로크백 마운틴. 시간과 양을 제한한 채 추출한, 맛이 진하고 짙은 풍미를 지닌 리스트레토. 거기에 덧붙여진 한 점은, 에니스와 잭의 사랑을 위한 포인트. 서른 즈음 요절한 배우 예술가를 위한 커피 한 잔의 시간이다.  


남겨진 사람은 일상을 살아간다.

그가 없는 삶을, 누군가는 살아가고 있다. 죽기 전 약혼했다가 헤어졌던 미셸 윌리엄스(브로크백 마운틴에 에니스 부인으로 출연했었던), 그리고 그녀와 약혼해 낳은 딸 마틸다 레저. 잘 살고 있겠지. 당신과 함께 브로크백 마운틴 커피 한 잔, 나누고 싶다. 사람의 있을 곳이란, 이렇게 커피 한 잔에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안녕 에니스, 안녕 히스 레저. 참, BGM은 <브로크백 마운틴> OST로. He Was A Friend Of Mine이 나오면 나는 한 마디 던질 것이다.


"아, 커피 참, 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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