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디트로이트> : '당신은 어떤 세상에 살고 싶은가'를 묻는다
1967년.
그해 1월, 짐 모리슨을 리더로 한 ‘도어즈(The Doors)’가 데뷔 앨범을 발표했다. 기성세대의 억압적인 질서와 규율에 반기를 든 이 체제 반항의 아이콘은 1960년대 미국 청년들의 절망과 분노를 대변했다. 4월에는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쏘’는 무적의 챔피언 무하마드 알리가 징집을 거부했다. 베트남은 자신을 흑인이라고 차별하지 않는데 왜 그들을 죽여야 하느냐며 베트남전에 반대했다. 백인우월주의가 만연한 미국 사회는 알리의 챔피언 타이틀을 박탈했고 징역 5년형을 선고했다.
그리고 10월, 노예였던 조부모와 기차역 짐꾼이었던 아버지를 둔 변호사 서굿 마샬은 아프리카계 미국인(흑인) 최초로 연방 대법원 판사가 됐다. 같은 달, 체 게바라는 볼리비아에서 암살당했다. 11월에는 존 레넌을 표지 모델로 “음악에 관한 것이 아닌, 음악이 아우르는 모든 사물과 태도에 관한 것”이라는 창간사를 담은 음악전문지이자 기성세대에 반기를 들고 저항 문화를 대변한 <롤링 스톤>이 창간했다.
1960년대는 그러했다. 현실은 부조리하고 진부했다. 차별은 공기처럼 일상화됐다. 많은 청춘들은 기성세대가 만들어놓은 세상에 저항하거나 도피(마약 등)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런 와중에 소수자 권리 옹호, 민권 운동, 베트남전 반대 등이 깃발을 높이고 있었다. 어쩌면 이듬해 ‘68혁명’을 앞둔 공기는 불온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게 1967년 봄과 가을 사이 여름(7월), 미국 디트로이트에는 또 다른 사건들이 있었다. 캐서린 비글로우 감독이 연출한 <디트로이트>는 그것을 다뤘다. 계엄령 상태를 방불케 한 당시 디트로이트를 혼란에 몰아넣은 시작은 단순했다. 무허가 술집을 단속한 경찰이 많은 흑인을 연행했다. 그 과정에서 마찰이 생기고 곳곳에서 소요가 발생한다. 약탈과 진압이 오가고, 혼란은 가중됐다. 그 모든 것의 시작에 ‘인종차별’이 있었다. 영화는 폭동처럼 보이는 그 소요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진실에 차근차근 접근한다.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공권력의 폭력은 정당화되기 일쑤다. 절도 혐의는 있으나 어떤 위협도 가하지 않았던 흑인은 인종차별주의자 백인 경찰인 필립 크라우스(윌 폴터 분)가 쏜 총탄에 죽는다. 하지만 살인은 ‘실수’로 치부될 뿐이다. 죽은 자가 흑인이기에 원칙과 절차는 작동하지 않는다. 필립은 당시 경찰과 미국 주류사회를 집약한 인물이다.
살인자였던 그는 계속 경찰 업무를 집행하고 또 다른 비극을 낳는다. 알제 모텔에서 흘러나온 총성이 빌미다. 투숙객 한 명이 장난감 총을 쐈다. 필립은 모텔에 있던 투숙객을 용의자로 단정한다. 모든 흑인과 그들과 함께 있던 두 명의 백인 여자를 협박하고 겁박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흑인이니까, 흑인이어서, 흑인과 함께 있었으니까. 광기에 찬 지옥도가 펼쳐진다.
필립이 동료 백인 경찰과 무고한 흑인(과 백인 여성)을 몰아세우고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은 공포 그 자체다. 어둡고 좁은 모텔 복도에서 빚어내는 무시무시한 폭력의 전시는 감독이 무엇을 의도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1967년 디트로이트에서 발생한 소요의 깊은 곳에 자리한 인종차별과 혐오. 있지도 않은 저격범 색출을 한답시고 필립이 공포를 조장하는 장면은 압권이다. 제복 입은 공권력은 윽박을 지르며 방아쇠를 쏠락 말락 겁을 주고 피해자들은 그 폭력 앞에 피눈물과 비명을 내지를 뿐이다. 워낙 감정적 격랑의 진폭이 커서 관객 심장이 쫄깃해질 정도다. 그만큼 서스펜스 연출이 뛰어나다. 필립으로 분한 윌 폴터의 연기는 압도될 만큼 악마적이다.
필립이 행사한 공권력은 당시 미국 백인 주류사회가 지닌 폭력성이었을 것이다. 알제 모텔은 당대 미국 사회의 축소판이었으며. 공권력이 소요에 대처하는 방식은 지극히 차별적이고 폭력적이다. 많은 매체와 사람이 ‘폭동’이라고 일컫지만 나는 그렇게 규정하고 싶진 않았다. 가령 일제강점기, 우리는 윤봉길 의사가 터뜨린 폭탄을 독립운동(저항)이라고 일컫지만 일본은 테러라고 말한다. 같은 사건을 놓고도 관점에 따라 용어가 달라진다. 그러니 흑인의 집단행동을 야기한 혐오와 차별에 기반을 둔 백인 주류사회의 폭력을 배제해선 안 된다. 따라서 흑인에게는 폭동이 아닌 지배 폭정 세력에 맞선 봉기가 될 수 있다. 백인 주류세력이 자기네들 입맛에 맞춰 세워놓은 사회 질서를 따라야 할 의무 따위도 없다.
필립의 무자비한 폭력에 무릎 꿇을 수밖에 없었던 이들도 국가가 정한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시민이자 성실한 노동자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죽거나 평생 트라우마에 시달리거나 살인 누명을 쓴다. 관객의 분노는 단순히 백인 경찰의 폭력에만 머물지 않는다. 명백한 인종차별이 빚은 혐오범죄지만 미국 사회에도 사법 농단이 자리한 걸까. 어쩌면 ‘색깔’때문일지도 모를 진실의 은폐. 법원은 살인은 물론 폭력까지도 애써 눈을 감는다. 사법 농단과 재판 거래가 횡행하는 한국의 지금은 어떤가.
차별은 흑인만을 향하지 않는다. 여성도 희생자다. 흑인과 함께 있었단 이유만으로 두 명 백인 여성은 창녀 취급을 받는다. 그들은 폭력과 성추행을 당한다. 흑인과 여성, 차별은 다르지 않다. 백인 남성 외에는 모두가 열등 인종일 뿐이다.
가장 분노가 치민 것은 무너진 삶 때문이었다. 필립이 강요한 침묵에 가수 래리(알지 스미스)는 대중(정확하게는 백인) 앞에 노래 부르기를 그만뒀다. 성실한 사설 경비원이자 공장 노동자 멜빈(존 보예가)은 살인 용의자로 체포됐다. 특히 멜빈은 피해자가 아닌 위치에서 백인에게 협조했지만 백인의 친구나 조력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만 확인했다. 제 아무리 애써도 성골이 될 수 없는 육두품의 한계 같은 것. 차별은 결국 뛰어넘을 수 없는 벽으로 작동했다.
캐서린 비글로우 감독이 던졌다는 이 말은 의미심장하다. “이 영화는 세상이 얼마나 바뀌었는지, 얼마나 바뀌지 않았는지 질문을 던질 기회였다.” 미국 사회의 아킬레스건인 ‘인종차별’은 여전히 미국을 지배하고 있다. 영화의 핵심인 알제 모텔 시퀀스에 도달하기까지 ‘폭동’으로 여겨질 법한 장면이 이어지나, 이것에 넘어가선 안 된다. 애초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다. 차별을 근거로 야만과 폭력을 행사하며 이것을 질서(?)로 만든 백인 주류사회였다. 이에 대한 저항을 비폭력에 기대라고 말한다면, 그건 너무 나이브하다. 역사(실화)의 빈틈을 메워 영화로 재구성한 캐서린의 시도가 빛나는 이유는 지금 세상을 돌아보게 만드는 데 있다. 50년이 넘은 이야기가 여전히 만연한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을 곱씹게 만든다.
특히 한국 사회에도 <디트로이트>가 던지는 질문은 유효하다. 차별과 혐오가 불러온 폭력의 역사에서 우리도 자유롭지 않다. 한국에 인종차별이 없는 것도 아니다. 특히 뿌리 깊은 여성 혐오를 우리는 매일 매 순간 목격한다.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 나오는 여성 혐오 범죄가 그것을 증명한다. 오늘도 헤어지자고 말한 여자친구를 흉기로 살해한 30대 남자가 붙잡혔다는 소식이 뉴스로 흘러나왔다. 이밖에도 공권력이 가하는 폭력, 불공정한 사법행위 등 <디트로이트>는 지금 우리 사회를 미러링 하듯 비춘다.
결국 <디트로이트>는 이런 질문들을 던지는 영화가 아닐까.
당신은 어떤 세상에 살고 싶은가.
살고 싶은 세상을 위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가.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기 위해 나는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
1968년, 미국 사회는 점점 더 양극을 향해 치달았다. 꼰대들이 휘어잡은 세상은 억압적이고 강박적이었다. 의미 없는 베트남전에서 청년들은 계속 죽어나갔다. 억압이 아닌 자유를 향한 욕구가 폭발 직전에 도달하고 있었다. 꼰대들을 다 타도하자는 소리도 나왔다. 그리고 미국 아닌 곳에서 68혁명이 먼저 타올랐다. 1968년 3월 프랑스 파리, 일군의 대학생이 미국이 가한 월맹 폭격에 항의하며 아메리카 익스프레스 지점을 습격했다. 5월에 본격화될 68혁명의 발단이었다. 이 와중에 흑인 인권운동 지도자였던 마틴 루터 킹 목사가 4월 암살당했다.
금기와 기성 질서를 거부하던 이들은 9월, 여성해방에도 나섰다. ‘뉴욕의 급진여성들’은 미스 아메리카 대회가 열린 애틀랜틱시티에 모여 ‘여성해방’과 ‘노 모어 미스 아메리카’를 외쳤다. 그리고 ‘자유의 쓰레기통’이라고 적힌 통에 코르셋, 하이힐, 브래지어, 잡지 <플레이보이> 등을 버렸다. ‘여성 고문의 도구’를 처박았고 강요된 여성성을 거부했다. 여성 권리와 해방에 대해 미국 사회가 눈을 뜨기 시작했다. 새로운 시대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1967년 여름 '디트로이트'는 다가올 1968년 그리고 그 이후에 어떤 영향을 줬을까.
(※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스포일러’가 될 만한 부분도 있으나 영화 감상에 큰 지장을 주지 않을 겁니다. '브런치 무비 패스'를 통해 시사회를 관람하고 내가 본 대로 느낀 대로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