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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절대낭만 Jonathan Feel Jul 31. 2018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에 도달하지 못한 구호

[리뷰] <인랑> : 개인과 집단의 안이한 대결

개인과 집단.

매력적인 대결 구도다. 근대가 열린 것은 개인의 ‘발견’에 힘입은 바가 크다. 혹자는 인류 최고의 ‘발명품’으로 개인으로 꼽았다. 그만큼 개인은 중세를 이끌던 집단주의적 질서에 균열을 가했다. 근대성의 초석으로서 개인은 중요한 탐구 주제이자 사회 동력이었다(자유도 함께 짝을 이뤘다).  


개인에 관한 탐구는 과거완료형이 아니다. 개인과 집단의 대립은 현재진행형이다. 그러나 세계는 개인보다 집단(주의)이 지배하는 질서에 따라 작동되기 일쑤다. 자유로운 개별 인간(개인)이 모여 집단과 사회를 구성하나, 많은 경우 개인은 그 부속품에 머문다. 전체주의 체제가 아닌 민주주의 체제라도 예외가 없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개인은 취약한 주체이자 주제다. 개인에 관한 탐구와 철학은 여전히 빈곤하다. 집단과 조직을 우선시하는 인지에 포획돼 있다. 그런 한국의 현재성을 감안했을 때, 김지운 감독의 <인랑>은 반가운 시도였다. 원작인 일본의 거장 오시이 마모루의 애니메이션 <인랑> 실사화는 ‘개인을 억압하는 전체주의 시스템’을 향한 통렬한 한 방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명분 없는 전투에 동요하는 인물의 처참한 싸움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김 감독의 말이 그것을 뒷받침했다. 더구나 그의 전작 <반칙왕> <달콤한 인생>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등에서도 개인은 조직(사회)에 존재감을 뺏기지 않았다.


그러나 김지운 감독의 <인랑>은 개인과 집단의 대결을 안이하게 다뤘다. 매력적인 소재임에도 원작이 품은 아우라를 휘발시켰다. 사람과 늑대 사이 혹은 개인과 집단 사이에서 고민하는 주체여야 할 ‘인랑(人狼)’은 ‘고독한 사랑꾼’으로 전락했다. 사랑이 그 고민을 웅숭깊게 만들고 집단이 가하는 억압을 깨닫게 하는 기제로 작동했다면 좋았겠으나 사랑은 물과 기름처럼 영화에 섞이지 못했다.      



희미하게 부유하는 개인     


<인랑>은 시대적·사회적 배경부터 헐겁다. 남북 정상이 통일을 결의한 상황에서 이를 경계한 주변 강대국들의 경제 제재로 극심한 혼돈에 빠진 2029년의 한국. 통일 반대 세력이자 테러 조직인 ‘섹트’를 둘러싼 특수기동대(특기대)와 공안부의 알력은 알맹이가 빠진 채 겉돈다. 헤게모니를 잡기 위한 집단 암투 속에 함몰된 개인을 부각하기 위한 설정이었겠으나 편집 과정에서 중요한 고리를 빠뜨린 게 아닐까 의심 갈 정도로 그들은 엄정한 시대상과 동떨어진 개싸움만 펼친다.      


주변 강대국의 경제 제재에 대한 저항 없이 통일에 반대하는 섹트는 허물어진 민생에 대한 고민을 거세한 채 맹목적인 테러만 일삼는다. 특기대 해체를 위해 섹트와 거래하는 공안부는 수가 빤히 보이는 허술한 조직 체계만 노출하고 통일이라는 과업에 복무한다는 특기대는 ‘백골단’을 연상하게 만드는 파시스트 조직일 뿐이다. 그들 각자 조직의 존립 근거가 너무 애매하다. 이렇게 허술해서야 조직에 저항해야 할 개인의 존재가 부각될 리가 없다.      


<인랑>은 이들 조직의 허술한 관계도를 1시간 동안 중언부언한다. 거창하고 장황한 설정이 지속되는 사이 더 중요하게 다뤄야 할 인물과 이야기는 산으로 향한다. 1시간이 지난 뒤 인랑이 언급되면서 섹트와 특기대의 대결 구도는 특기대와 공안부의 대결로 느닷없이 방향을 바꾼다. 섹트도 휘발된다. 이 방향 선회가 매끄러웠다면 각 조직을 대표하는 개인들의 고뇌와 갈등이 좀 더 선명하게 드러났겠지만 그것도 아니다. 설득을 강요하는 로맨스도 뜬금없다.       


테러 진압 과정에서 여고생 몰살을 야기한 ‘과천 사태’를 트라우마로 가진 임중경(강동원 분)은 국가에 의해 감정을 거세한 인간병기로 길러졌다지만 너무 뻣뻣하다. 육중한 강화복에 압도된 탓이 아니라 이윤희(한효주 분)와 속없는 사랑을 강요받기 때문이다. 감정을 쌓아 올릴 틈 없이 두 사람은 시종 모호한 관계로 서로 스며들 수 없는 사랑을 한다. 집단적 사고에 균열을 가해야 할 사랑이 작동하지 않으니 캐릭터는 무너졌다. 조직(국가)의 명령에만 움직이도록 세팅된 임중경의 인간적 갈등은 드러나지 않고 인랑의 인간성과 개인을 일깨우는 중요한 부싯돌 역할을 해야 할 이윤희는 그저 임중경의 보호에만 의존하는 캐릭터로 전락했다.    

중심인물이 흔들리는 데 다른 캐릭터라고 살아날 리 없다. 한상우(김무열 분)는 ‘열일’하지만 불분명한 동기와 허술한 작전으로 헛발질만 일삼는다. 임중경의 인간적 배신(?)과 대비되는 집단주의의 분신으로 기능해야 할 특기대 훈련소장 장진태(정우성 분)도 “내가 부당한 지시를 했나? 몇 번을 생각해 봤어. 하지만 아니었어”라는 기계적 말만 내뱉는 평면적인 캐릭터로 머문다. 엄중한 조직의 논리를 뚫고 나오는 개인을 다뤘어야 할 <인랑>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부유하는 조직형 개인만 양산하고 말았다.        


비주얼만 남고 이야기를 잃은 아쉬움


아마 기대치가 높아서였을 것이다. 김지운의 영화였기에 그렇다. 조직의 논리를 뚫고 나오는 개인의 존재감을 잘 보여주리라는 기대였다. 더구나 배경도 통일을 앞둔 한반도라는 점에서 새로운 상상력을 기대했지만 이야기와 전혀 섞이지 못한 채 맥락 없이 소비되고 말았다. 왜 그런 배경이 필요했는지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다.       


<인랑>은 표면적으로는 권력기관끼리 벌이는 암투를 다루지만 기실 조직에 소외된 개인의 고뇌와 조직을 뚫고 나오려는 개인의 서사를 다루고자 했을 것이다. 김 감독은 개인을 억압하는 ‘시스템’을 거대 악으로 해석하고 5·18 때 양민을 학살한 공수부대, 시위를 폭력으로 진압한 백골단 등 부당한 조직의 명령을 수행해야 했던 개인이 그 트라우마를 어떻게 치유하고 구원받을지 살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또 최근의 집단화(진영논리)와 혐오 문화 등으로 개인이 사라지는 세상에 위기감을 가졌다고 덧붙였다.         


<인랑>은 좋은 취지와 목적이 반드시 좋은 결과를 낳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주제 의식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한 이야기는 그럴듯한 비주얼만 가지고선 빈틈을 메우지 못한다.(지하수로와 광화문 전투 장면의 비주얼은 스타일리스트로서 김지운의 장점을 잘 보여준다.) 어설픈 사랑꾼이 주춤거리다가 자기 마음도 제대로 전달 못하고 산 위에 올라가 ‘사랑한다’는 공허한 외침만 울리는 격이랄까. 늑대소년의 풋사랑은 익지도 못하고 툭 땅으로 떨어졌다. 개인과 조직의 대립이라는 매력적인 소재를 변죽만 올리다 말았다.       


어쩌면 <인랑>은 특기대와 공안부의 조직 간 암투 속에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the personal is political)’라는 공기를 불어넣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20세기 중요한 사건이자 운동이었던 68혁명과 페미니즘이 내세운 구호를 각성한 늑대가 ‘빨간 두건’을 쓴 소녀를 잡아먹지 않고 반성했다면, <인랑>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달콤한 인생>의 선우(이병헌)가 한 말이 떠오른다.

“말해 봐요. 저한테 왜 그랬어요?”

그저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이다. <인랑>의 실사화가 그만큼 어려웠던 탓일 게다. 아쉽고 아쉽다.


(※ 브런치무비패스를 통해 관람하고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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