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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절대낭만 Jonathan Feel Sep 27. 2018

거짓환상을 깨는 신혼첫날의 파국에서 배울 수 있는 것

[리뷰] <체실 비치에서>

영국 남부에 자리한 체실 비치가 내뿜는 풍광, 눈이 시리도록 좋다. 해안 곳곳 자갈 마모 상태가 달라 밤에도 해안 어디쯤인지 알 수 있다는 곳, 신혼여행지로서도 적격이다. 갓 결혼을 하고 부부로서 서툰 이들이 삶의 풍랑에 마모를 당해도 어느 지점에 부부가 서 있는지 알 수 있다면 결혼 생활도 잘할 수 있을 터. 1962년 결혼한 플로렌스(시얼샤 로넌)와 에드워드(빌리 하울)가 이곳을 신혼여행지로 선택한 것은 이유가 있어 뵌다.


그러나 두 사람은 첫날부터 삐걱댄다. 자라온 환경과 배경, 성격이 너무 달랐던 그들은 결혼하고서야 그 간극을 실감한다. 연애할 때는 달라서 끌렸었지만 결혼 뒤에는 좁힐 수 없는 차이에 당황한다. ‘연애(할 때)와 결혼(할 때)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을까. 신혼여행을 간 커플이 흔히 품는 ‘첫날밤’에 대한 환상이 발단이었다.  


<체실 비치에서>는 두 사람의 만남부터 교제, 결혼에 이르는 과정을 차곡차곡 보여주며 엇갈릴 수밖에 없는 차이를 되새김질한다. 사랑의 시작은 변덕스럽기 마련인데, 이들은 서로 다른 모습에서 사랑을 싹틔웠다. 사중주단의 리더 플로렌스와 역사학도 에드워드는 집안 형편도 판이했다. 부잣집 딸이자 자유로운 삶을 꿈꾼 플로렌스와 가난한 집안 장남이자 뇌손상을 당한 어머니를 둔 에드워드에게 결혼을 향한 기대도 제각각이었다. 


서로 다른 환경과 배경을 통해 형성된 타인의 세계관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을 둘러싼 껍질을 깨는 것은 고통이며 세계를 바꾸는 일이다. 사랑으로 모든 것을 감싸고 이해한다는 건 수사에 가깝다. 사랑에 대한 관념을 실천적 행위로 옮기는 건 지극한 노력이 수반돼야 한다. 더구나 이들은 이성과 만나는 일에 서툰 사람이었다.      


사랑은 서로 비슷해서 끌릴 수도, 달라서 끌릴 수도 있다. 플로렌스와 에드워드의 끌림은 다름에서 비롯됐다. 각자의 시선에서 상대방은 새로움이었다. 연애할 때 그것은 사랑스러움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둘은 결국 신혼여행지에서 깨진다. 첫날밤을 둘러싼 상이한 기대와 연애시절에는 대수롭게 보이지 않던 벽이 서로를 등 돌리게 만든다.


맺어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스파크는 관객을 당황하게 만든다. 신혼여행지에서 깨지는 커플이 의외로 많다는 통계를 본 적은 있지만, 그들이 어쩌면 어렵사리 키워온 사랑의 싹이 제대로 꽃 피기도 전에 시들해지는 모습은 위태위태하다. 그들 사이 간극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지만 그렇다고 그것들이 파국을 부르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런 부분을 사소하게 바라본 나의 불찰(?)이었다.     


파국을 주도한 결정적 요인은 성(性)에 대한 태도였다. 섹스 경험 없이 결혼에 도달한 이들에게 섹스는 중대한 도전이었다. 첫 섹스를 앞두고 두려움을 내비치는 플로렌스와 그 두려움의 이면을 파악하고 이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결여한 에드워드의 간극은 컸다. 달라서 첫눈에 스파크가 튀었던 두 사람도 섹스라는 구체적 행위 앞에서는 어찌할 바 모른 채 도망가거나 밀어붙인다. 가치관과 세계관의 강렬한 충돌이었다.         


그것은 1962년이라는 시대 배경과 관련을 맺을 것이다. 사람은 어떻든 시대상(사회상)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감안하면 당대 영국 사회의 보수성은 두 사람이 건강한 섹스에 대한 인식을 갖게 만드는 데 장애였을 것이다. 원작 《체실 비치에서》의 첫 문장이 그것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들은 젊고 잘 교육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둘 다 첫날밤인 지금까지 순결을 지키고 있었다. 물론 요즘에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 시절은 성문제를 화제에 올리는 것조차 불가능하던 때였다.” (이언 맥큐언, 《체실 비치에서》)      


두 사람에게 섹스는 미지의 것이었다. 교육을 잘 받았지만, 섹스는 당대 교육 커리큘럼에 없는 교과였다. 두려움도 당연하고, 결혼하면 섹스를 해야 한다는 인식도 당연했다. 그러나 서로 다른 태도를 풀어나갈 수 있는 지혜(!)가 그들에겐 없었다. 에드워드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플로렌스의 태도를 ‘불성실’로, 플로렌스는 기다림 없는 에드워드의 태도를 ‘강압’으로 해석한 것 같다. 미숙했다.

      

한 꺼풀 더 벗기자면, 두 사람은 스스로를 알지 못한 우를 범했다. 반전(反戰)운동을 하는 등 부유한 집안에서 자유로운 삶을 꿈꿨던 플로렌스였지만 과거 트라우마에 얽매인 강박을 마음 깊은 곳에 묻어두고 있었다. 그 트라우마 뇌관이 하필 신혼여행지에서 불붙은 셈이었다. 뇌손상 사고를 당한 어머니 아래 꾹꾹 눌린 채 살아온 에드워드는 욕정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모르는 어린아이였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는 이들이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기다리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서툴고 어리숙한 두 사람이 택할 수 있는 건 이별밖에 없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기다려주는 지혜는 자신을 알고 타인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가미돼야 가능하다.      


두 사람은 의심에 사로잡히는 순간을 넘어서지 못한다. 믿고 사랑해도 넘어야 할 고개가 많은 결혼이다. 굳은 다짐으로 넘기에도 힘든 결혼 생활인 데도 미리 의심하고 잰다면 떠나는 것이 상책이다. 체실 비치에 있는 조각배는 그런 두 사람의 관계를 보여주는 상징물이다.      


서툴고 기다리지 못한 이들이 세월과 함께 우연하게 맞닥뜨린 상황은 체실 비치에서 두 사람이 내린 관계의 종말이 얼마나 성급하고 서툴렀던 것인지 보여준다. 순수하게 사랑했으나 불안한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지 못한 어리석음은 노년의 플로렌스가 공연하는 장면에서 여실하게 드러난다. 그땐 왜 그랬을까, 두 사람의 회한이 눈물로 대화를 나눈다. 미완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사랑이 건너뛴 세월 속에서 음악과 함께 흘러내린다.  

<체실 비치에서>는 음악이 많은 부분을 이야기한다. 두 사람의 감정이 음악 선율을 따라 흐르고 그 감정의 파고는 극적인 전개 없이도 관객의 마음을 풍랑 속으로 밀어 넣는다. 원작자 이언 매큐언의 문체를 닮은 음악이 주인공처럼 작동한다. 그 음악이 없었다면 더없이 심심했을 것이다. 영화의 품격을 높여준 음악의 공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영화를 본 뒤, 로이킴의 노래 <그때 헤어지면 돼>가 떠올랐다. 사랑하는 법을 몰랐던 서툰 신혼부부에게 건네고 싶은 음악이었다.  


나를 사랑하는 법은 어렵지 않아요.

지금 모습 그대로 나를 꼭 안아주세요.

우리 나중에는 어떻게 될 진 몰라도

정해지지 않아서 그게 나는 좋아요.     

남들이 뭐라는 게 뭐가 중요해요.

서로가 없음 죽겠는데 뭐를 고민해요.

우리 함께 더 사랑해도 되잖아요.     

네가 다른 사람이 좋아지면 

내가 너 없는 게 익숙해지면 

그때가 오면 그때가 되면 

그때 헤어지면 돼.     

너를 사랑하는 법도 어렵지 않아요. 

한 번 더 웃어주고 조금 더 아껴주면

우리 사랑하는 법도 어렵지 않아요.

매일 처음 만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봐 주면     

남들이 뭐라는 게 뭐가 중요해요.

서로가 없음 죽겠는데 뭐를 고민해요.

우리 함께 더 사랑해도 되잖아요.     

네가 다른 사람이 좋아지면 

내가 너 없는 게 익숙해지면 

그때가 오면 그때가 되면 그때 

그때그때      

네가 원하든 말든 널 잡을 거고 

내가 더 이상 지쳐 걷지 못할 때 

그때가 오면 그때가 되면

그때 헤어지면 돼. 

그때 헤어지면 돼.


(* 브런치 무비패스를 보고 느낀 그대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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