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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절대낭만 Jonathan Feel Oct 02. 2018

‘조물주 위의 건물주’라는 허상에서 벗어나기

[리뷰] <명당> : 땅에서 다시 ‘뉴 노멀’을 기대한다면?

지난 9월 서울 집값 상승률이 10년 만에 가장 컸다. 한국감정원이 조사한 전국주택가격 동향을 보면 서울 집값 월간 매매 가격 변동률이 1.25%로 지난해 같은 기간(0.07%)보다 1.18%포인트 상승했다. 2008년 6월(1.74%) 이후 가장 높은 변동률이었다. 정부도 이처럼 치솟는 집값을 잡기 위해 ‘913 부동산 대책’을 내놨다. 핵심은 ‘종합부동산세’ 강화였다. 투기와 전면전을 선포하겠다는 정부의 강력한 의지가 있었다. 실효 여부를 떠나 많이 보아온 모양새다. 부동산은 불패 신화 인양 바벨탑을 쌓아 올리고 정부는 탑의 축적이 불러올 사회적 파장을 끊임없이 견제한다. 집값이 땅값이 계속 오르는 것은 과연 정상일까? 노멀 한 일인가?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세계는 ‘뉴 노멀’로 포장됐다. 뉴 노멀은 잘못된 과거를 반성하고 새로운 질서를 모색해 시대 변화에 따라 새롭게 부상하는 기준을 뜻한다. 이코노미스트 모하메드 엘 에리언이 저서 《새로운 부의 탄생》(When markets collide)에서 세계 금융위기 이후 경제를 뉴 노멀로 일컬으면서 널리 퍼졌다. 당시 금융위기는 허구적 화폐금융과 불평등의 악순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세계는 ‘올드 노멀’에 기댄 채 거대한 불평등과 지대 수탈에 기생한 축적 방식 등을 그대로 유지했다. 토지나 화폐금융의 미친 상품화 흐름을 전환할 수 있는 기회를 내쳤다. 비정상의 정상화를 유지하는 올드 노멀이 뉴 노멀로 포장돼 인민의 삶을 불안으로 잠식하는 흐름은 바뀌지 않았다. 

땅은 세상의 불평등 구조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씁쓸한 우스개가 진리처럼 받아들여지고 장래희망을 묻는 질문에 아이는 당당히 건물주라고 말하는 세상은 노멀 한 것일까. 영화 <명당>은 지금 땅에 대한 노골적 욕망이 ‘올드 노멀’ 임을 직시하게 만든다. 명당을 찾는다는 명분이 가미돼 과거를 배경으로 삼았을 뿐 여전히 땅을 탐하는 지금 세태를 엿보게 만든다. 즉 <명당>은 과거의 이야기처럼 포장했을 뿐 지금 우리네 이야기다.      


<명당>은 사실과 허구를 적절히 버무린 팩션인 데 역사는 무시해도 좋다. 대신 땅을 둘러싼 욕망의 협잡은 현실 적합도가 꽤 높다. <관상>(2013), <궁합>(2015)에 이은 ‘역학 3부작’으로 명명된 이 이야기는 흥선대원군이 지관의 조언으로 자신의 아버지 남연군 묘를 왕이 나오는 묏자리로 이장한 역사적 사실만 가져왔다. 나머지는 그저 상상으로 빚었다고 보면 된다. 굳이 역사적 사실과 고증 여부에 에너지를 쏟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다.  

  

가령 영화에서 지성이 연기한 흥선은 ‘상갓집 개’로 불리면서 난봉꾼처럼 산다. 무소불위의 세도정치를 펼친 안동 김씨의 레이더망에 걸리지 않고자 함이었다는 설을 차용한 것이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김동인 소설 《운현궁의 봄》이 극적인 효과를 위해 흥선을 상갓집에서 술이나 얻어먹고 다니는 파락호(집안을 말아먹은 사람)나 궁도령으로 묘사한 허구가 사실처럼 퍼졌을 뿐이다. 안동 김씨 치하에서 흥선을 비롯한 왕족은 권력만 없었을 뿐 명예를 지키며 살았다. 흥선도 <명당>이 묘사하듯 룸펜이 아닌 종친부의 유사당상으로 임명돼 벼슬을 살았다. 집안도 넉넉했고 전답도 16만 평에 달했다. 


영화에서 세도정치 가문인 ‘장동 김씨’는 ‘안동 김씨’에서 비롯됐다. 실제로 안동 김씨 일부가 서울에 와 장동에 터를 잡고 살면서 장동 김씨로 불렸고 이들이 세도정치를 주도했다.       

<명당>이 액면 상 보여주는 묏자리 쟁탈전은 ‘부동산 투기’의 은유다. 풍수지리를 통해 운명을 바꿀 터를 찾는 욕망은 부동산 투기를 통해 돈을 벌거나 자녀 교육을 명분으로 위장전입을 대수롭지 않게 행하는 지금 이 땅과 다를 바가 없다. 특히 조선 고관대작과 지금 기득권층은 시대를 넘어선 도플 갱어다. 부를 세습하고 권력을 갖고 싶은 욕망을 또 다른 욕망이 뒤덮는 <명당>의 아귀다툼에서 나는 지금 돈과 출세의 노예가 된 ‘땅 (정신)거지’를 읽었다.      


“죽은 사람이 머물 땅이 아닌 산 사람을 위한 땅을 찾고 싶”다는 지관 박재상(조승우 분)은 그런 땅거지들의 질펀한 욕망에 저항하는 인문학자였다. 그는 땅의 기운을 읽지만 함부로 자신의 출세나 부를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지 않는다. 땅을 재물로 만들려는 구용식(유재명 분)과 파트너지만 사익을 취하지 않는다. 재상이 무너진 시전을 살리는 대목에서는 ‘대형마트와 프랜차이즈 등에 짓눌린 골목상권’을 살리는 모습으로 연결됐다. 풍수를 이용해 시전을 재배치하고 설계하는 모습에서 도시재생가나 도시기획자가 연상돼 흥미진진하고 생동감 있다. 물론 그는 기본적으로 아픔을 가진 사람이다. 왕에게 직언을 고하다 땅으로 나라를 가지려는 김좌근(백윤식)의 눈 밖에 나 가족을 잃고 나라(왕)에게 배신당하지만 세상을 향한 책임감이 그를 붙든다. 용식(유재명)과 돈을 모아 김좌근의 부친 김조순 묘 터를 알아내 장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끝내기 위함이었다.      

재상이 흥선과 손을 맞잡은 것도 아들을 왕으로 만들려는 흥선의 욕망을 미처 읽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재상이 좀 더 입체적이었다면 극이 더 흥미진진할 수도 있었겠지만 재상이 중심을 잡고 있었기에 천하명당을 차지하려는 욕망과 대립이 더욱 확연하게 드러날 수 있었다. 가장 흥미로운 장면은 그런 면에서 “이 터는 내가 가져야겠소”라며 천하에 없는 허허실실에서 욕망의 화신으로 본색을 드러낸 흥선의 일성이었다. 지성은 흥선의 변화를 잘 드러냈다. 가야사를 불태우는 장면에서 그의 욕망이 불길과 함께 치솟고 있었다. 김좌근의 아들이자 대대손손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땅을 찾는 김병기(김성균 분)는 지금의 세계와 가장 닮은 인물이었다. 세도와 권력, 부를 누리고 있음에도 이를 불안해하며 끊임없는 자기 증식하고자 하는 자본의 속성을 빼다 박았다.  

    

애초 땅은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자연, 동식물, 인간이 살기 위해 꼭 필요한 공유재였다. 그리스 신화의 가이아(대지의 여신)도 그래서 혈연관계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한 신이었다. 그러나 인간이 땅을 소유물로 규정하면서 비극은 시작됐다. 흔든 것은 사람이었지만 땅이 사람을 쥐고 흔들고 조종하는 모양새로 바뀌었다. 인간의 욕심이 모든 것을 바꿨고 <명당>은 그것을 잘 보여주는 ‘불편한’ 영화다. 이전이나 지금이나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그것이 화를 부르고 어리석음을 알면서도 인간은 실수를 계속 반복한다. 재상과 쌍벽을 이룬 정 지관(정만인, 박충선 분)의 대사가 그것을 대변한다. “사람은 죽어도 땅은 남는 법이지. 결국 땅은 또 다른 김좌근을 만들 것이야.”      

<명당>을 ‘불편한’ 영화라고 언급한 이유가 있다. <명당>의 다소 부진한 흥행은 이런 불편함을 동반해서가 아닐까(라고 혼자 생각해본다). (돈을 빌려서라도) 부동산을 더 갖는 것이 뭐가 죄인가. 돈을 불리고 부와 명예를 지속하고자 하는 욕망이 뭐가 잘못된 것인가. 내 재산에 왜 국가가 멋대로 세금을 올리는가. 여전히 많은 이들이 욕망에 목을 맨다. ‘불패 신화’라고 명명하며 부동산 등에 욕망을 투사한다. 사회적 자산이자 공유재 혹은 커먼즈에 대한 사유는 내팽겨 쳤다. 이런 이들에게 자신의 욕망의 끝을 보여준 <명당>은 불편할 것이다. 건설사 롯데캐슬이 2000년대 들어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줍니다”라는 노골적 문구를 사용한 광고를 내보냈다. 땅에 목 맨, 부동산(토건족) 공화국의 정체성을 그대로 노출한 물신의 주술이었다. 물신에 포섭돼 오염된 우리는 공공성을 포기했다. 아니 공공성과 커먼즈는 사회 구성원들에 의해 배반당했다. 정부가 끊임없이 대책을 내놓지만 그것은 턱없이 약하고 무기력하다.      


땅으로 왕권을 지키려고 했던 헌종(이원근 분)은 필요 없다. 그는 죽어도 된다. 그러나 땅의 비밀을 품은 초선(문채원 분)의 자결은 못내 안타까웠다. “세상이 바뀌는 것을 보고 싶”다고 했던 초선의 죽음이 공공성과 공유재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사족처럼 보였을 <명당>의 마지막 장면은 진짜 ‘뉴 노멀’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일제강점기, 이회영·이시영 형제가 재상을 찾아 독립운동을 위한 무관학교 터를 묻는다. 재상은 서간도를 찍으며 보물과 땅문서를 건넨다. 루쉰은 희망은 원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고 했다. 희망은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땅은 여전히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재상과 같은 지관도 아직 있을 테니까. 그의 말을 다시 되씹는다. “사람을 살리는 땅,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좋은 터, 이제 그런 땅을 찾고 싶네.”  

(* 브런치 무비패스를 통해 영화를 보고 제 감상 가는 대로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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