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체인 선언] (8) 화폐 순환이 필요한 이유
이런 생각을 해보자.
오래 놔두면 돈이 썩는다면?
보관을 잘못해서 색이 바래거나 숫자가 희미해지는 정도가 아니라 돈 가치가 떨어진다면?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 대답은 한결같았다. “얼른 돈을 써야지. 돈 가치가 떨어지는 데 그냥 놔둘 수 없잖아. 필요한 물건이나 서비스를 당장 사야지.” 돈을 모아 재테크나 축적 수단으로 삼겠다는 어리석은 사람은 없었다.
‘돈은 왜 늙지 않을까?’ 실제로 이런 의문을 가진 이들이 있었다.
19세기 인지학자 루돌프 슈타이너(Rudolf Steiner)와 아르헨티나에서 부를 축적한 독일 경제학자 실비오 게젤(Silvio Gessel)이 그들이다. 궁금하고 이상했다. 모든 재화와 사람은 나이를 먹고 낡거나 없어지는 데 돈만 자연법칙을 거스르고 심지어 이자가 붙고 점점 더 귀해질까? 사람은 노화가 일어나고 물건은 감가상각 되지 않던가. 이들은 돈과 금융 문제에 대한 시선이 동시대인들과 달랐다. 돈에 ‘사회적’ 생명을 부여했다.
그 가운데 게젤이 돈의 속성에 관심을 가진 계기는 1890년 당시 세계 최대 은행이던 ‘베어링 위기’때문이었다. 이와 함께 주변 상공인들의 도산 원인이 궁금했던 그는 독학으로 경제학 공부에 매달렸다. 돈이 죽지 않는 부자연스러운 현상 때문에 부작용이 발생한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는 이에 1906년 자신만의 생각을 내놨다.
‘돈에도 생사가 있어야 경제가 살고 세상이 산다.’ 즉 돈을 계속 갖고 있으면 가치가 떨어지게 만들자는 이론이었다. 화폐 발행 다음 해부터 일정 비율로 가치가 깎이는 ‘자유 화폐’를 고안했다. 이에 따르면 돈을 빠른 시일 내 써야 했다. 돈이 썩는다는 새로운 개념이었고, 화폐 유통을 활발하게 만들고 순환시키는 방법이었다. ‘나이 먹는 돈’(Aging money)은 소유 욕구를 줄여 돈의 축재 기능을 없애는 대신 교환 기능을 극대화했다. 참신한 아이디어였다. ‘늙지 않는’ 돈에 대한 집착과 소유욕이 부르는 부작용을 줄일 수 있는 방안이었다. 특히 불황기를 떠올려보자. 이 시기엔 돈이 돌지 않아 기업이 파산하고 실업자가 증가한다. 결국 물건은 넘치나 이를 소비하지 못하고 돈이 돌지 않아 발생했던 대공황 등의 경제위기는 돈을 축적하려는 욕구 때문이다. 도대체 돈이 뭐기에.
게젤 이론의 핵심은 ‘기본으로 돌아가자’로 요약할 수 있다. 돈(금융)은 종종 혈액에 비유된다. 인간 몸은 혈액이 돌아야 움직이고 살아있다. 돈도 유기체와 같은 사회와 경제 곳곳에서 펼쳐지는 활동을 돕는 혈액이다. 문제는 돈은 이를 넘어 자기 증식을 한다. 또 돈 자신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올려놓는다. 이런 가치 전도로 돈이 돌지 않는 진짜 경제는 쪼그라든다. 반면 돈이 넘쳐나게 된 부동산과 같은 투기 공간은 거품을 부풀린다. 케인스도 돈이 목적이 아닌 수단의 자리로 내려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게젤과 슈타이너의 생각은 현실에 수용되지 않았다. 쉽사리 동의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돈이 이미 수단을 넘어 목적이 됐다. 누가 쉬이 돈을 죽게 만들 수 있을까? 그럼에도 이들의 혁신적인 해법을 믿는 소수가 곳곳에 나타났다. 대공황기, 오스트리아와 독일이 과감하게 자유 화폐를 도입했다. 돈 가치가 떨어지기 전에 돈을 사용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화폐 유통속도가 빨라졌다. 경제가 돌기 시작했다. 일자리도 자연스레 늘어났다.
역시 대공황으로 피폐해진 스위스.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모인, 게젤 이론을 따르고자 하는 ‘게젤리안’이 모였다. 그리고 결의했다. “우리끼리는 늙는 화폐를 써보자.”
돈을 은행에 넣어도 이자를 주지 않는 커뮤니티화폐 ‘비어’(WIR)가 1934년 탄생했다. 이들은 소유나 축적을 위한 돈을 거부했다. 목적도 명확히 했다. 돈을 돌게 만들자! 돈이 수중에 들어오면 서둘러 서비스나 물건으로 바꾸려 할 것이고 자연스레 돈이 돌고 도는 구조였다.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자본금 4만 스위스프랑(이하 프랑)으로 창업한 중소기업을 위한 협동조합 은행 ‘비어뱅크’는 그렇게 출발했다. ‘돈이 썩지 않으면 문제가 생긴다’는 게젤이 가진 문제의식을 현실에 구현한 사례였다. 덕분에 대공황이라는 위기에서 프랑 신용도가 떨어져 있을 때 비어는 안전망이 되었다.
비어를 사용하는 네트워크는 자신을 ‘비어 서클’(WIR Circle)이라고 부른다. 경제가 순환돼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개념이다. 화폐는 순환을 위한 매개체 혹은 촉매제로 존재해야 한다고 여겼다. 비어의 존재 목적은 단순했다. 순환. 혈액 순환이 되지 않으면 몸이 굳거나 썩듯이, 돈이 돌지 않으면 경제와 사회가 위기에 빠진다는 명확한 논리에 기댔다.
지역 내 기업 간 거래와 교류에만 사용됐던 비어는 이후 일반인에게도 예금 계좌를 개방했다.
흥미로운 건 실물(종이)이 없다. 가상 화폐인 셈이다. 회원 간 계좌이체와 전자 결제 방식을 취한다. 비어 계좌가 있어야 거래가 가능하다. 비어를 통해 상품과 서비스를 교환할 수 있다. 또 이자가 없다. 비어는 1936년 100만 프랑으로 시작해 1970년 1억 8000만 프랑, 1992년 20억 프랑으로 성장했다. 현재 스위스 기업의 약 20%에 해당하는 6만 개 기업이 이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실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썩는 것을 불편해한다. ‘썩는 돈’ 이론은 좋았지만 애로가 있었다. 기존 법정통화(프랑)와 경쟁이 붙었다. 비어만 있었다면 모를까, 가격이 유지되고 이자가 붙는 프랑을 이겨낼 순 없었다. 돈으로서 매력은 비어가 떨어졌다. 경기가 나쁠 때 비어는 좋은 대안이었으나 반대로 경기가 좋을 때는 프랑을 가지고자 하는 욕구가 강했다. 이런 점 때문에 비어는 지속가능성에 문제가 있었다.
그럼에도 비어는 80년 넘게 이어졌다. 이것은 중요하다. 오래 살아남았다. 변화에 적응하려고 노력하면서도 기본 정신과 전통을 유지했다. 비어 서클이 유지된 덕분이다. 비어뱅크는 구성원에게 비어와 프랑 모두를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비어 신용카드도 만들어졌다. 가령 우리나라로 치자면 농협 화폐가 따로 있고 원화를 함께 다룬다고 보면 된다. 비어뱅크는 기업이 대출을 원할 때는 비어를 권장한다. 이자가 없기 때문이다. 비어로 대출받으면 그 돈은 비어 서클에서만 쓸 수 있다. 반면 저축이나 외부와 결제·교류할 때는 프랑을 쓰도록 유도한다. 비어와 프랑은 1대 1 교환 비율을 갖고 있으나 은행에서 비어를 프랑으로 바꿔주진 않는다. 대신 프랑을 비어로 바꿀 수는 있다. 서클 내 순환을 위해서다. 무한 확장은 비어 취지와 맞지 않다. 스위스 내 기업 대상으로 커뮤니티를 한정해서 설계했다.
비어 대출을 받고자 한다면 명확한 자기 쓸모와 필요가 있어야 한다. 비어로 부를 축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든 기업이든 돈놀이나 재테크가 아닌 목적이 명확할 때 비어를 빌린다. 실물 경제와 통합된 형태다. 돈의 본디 목적에도 맞다. 이는 돈의 본성에 대한 게젤의 사유를 따라가고자 노력하는 태도다. 그러면서도 현실 시장에 적응하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비어는 경제가 어려울 때 특히 빛을 발했다. 비어 시스템은 경제 위기가 발생하면 기업들에게 정책을 지원할 수 있었다. 이는 시장 원리에 반주기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이었다. 시장에 주기적으로 작용하는 일반 은행은 호황일 때는 쉽게 대출해주나 불황일 때는 대출을 줄이고 이자를 상향 조정하거나 담보 기준을 엄격하게 제한한다. 이는 은행이 경제 상황에 유동적으로 대응해 시장을 안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경제의 흥망성쇠를 두드러지게 만든다.
보스코인 등 일부 암호화폐 설계와 내용도 비어와 비슷한 철학과 방향성이 있다. 코인(돈)을 축적 모델이 아닌 활용 모델, 즉 생태계 내 유통을 목적으로 한다. 물론 현재 시장을 무시할 순 없다. 시장에서 암호화폐는 주식처럼 거래되고 있다. 현재는 구매 결제용과 투자(투기)용으로 혼용돼 있다. 결제에 쓰기 어려운 이유가 가격 등락이 심하기 때문이다. 오늘 100원짜리 빵이 내일 1000원, 모레 10원이 된다고 가정해보라. 빵을 살 수 있을지 없을지 예측할 수 없다. 암호화폐는 이런 것을 극복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 보스코인과 페이익스프레스가 협력해 선보인 ‘보스프라임’ 쇼핑몰은 이에 대한 실험을 하고 있다. 암호화폐(보스, 페스 토큰)를 통해 시중가보다 저렴한 가격에 상품을 살 수 있고 시세 변동에 따른 손해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암호화폐 시세가 오를 때 마일리지를 추가 제공(15일 후 시세 상승 분 95%, 30일 후 상승 분 90%)하는 ‘시간차 마일리지 적립’ 제도를 도입했다.
암호화폐는 다음과 같은 큰 장점도 있다. 지역은행 하나 만들고자 하더라도 금융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만 하드웨어 투자비용만 최소 수십억 원이 든다. 블록체인 기술은 이런 투자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다. 개인이 참여해서 개인이 비용을 지불하는 네트워크이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네트워크 구축이 가능하다. 그렇다고 모든 지역화폐를 블록체인으로 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블록체인으로 신뢰를 만든다는 아이디어는 좋은 발상이나 규모의 경제가 뒷받침해야 한다. 블록체인도 아주 싼 것은 아니어서 수천~수만 단위의 지역화폐 네트워크로 활용하기에는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가 좋지 않다. 서울 정도나 국가 단위 커뮤니티로 묶거나 타깃팅을 명확히 해야 한다. 게젤리안까지 가지 않더라도 순환을 잘하기 위해 만들고 공공 인프라를 설계하는 등 명확한 목적도 있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시장에 적응해야 한다. 게젤리안도 비어 운영 과정에서 포기한 부분이 있듯이 철학은 지키되 수단은 유연하게 가야 한다.
경제는 축적이 아닌 순환이 기본이어야 한다. 위기가 오면 정부 차원에서 돈부터 푸는 이유가 그것이다. 돈이 장롱이나 부동산 등에 묶이는 ‘돈맥경화’는 악순환을 부를 뿐이다. 돈을 시중에 풀어도 쉬이 경기가 풀리지 않는 건 축적을 향한 욕망이 똬리를 틀고 돈을 다시 움켜쥐기 때문이다. ‘늙는 돈’ 이론은 널리 퍼지지 못했지만 일부 실험은 성공했다. 특히 ‘탐욕을 배제한 시장경제’라는 평가도 받았다.
늙는 돈은 선택되지 못했지만 대신 기술로 가능한 ‘진짜’가 나타났다. 늙는 돈의 정신을 물려받은 암호화폐가 순환을 약속하고 있다. 게젤이 구상한 돈은 본질적으로 순환이 중요했다. 순환을 만들어내는 것이 이 돈의 설계 용도였다. 말인즉슨 돈 자체가 중요하지 않았다. 돈이 돌아가는 순환 시스템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에 집중했다. 그가 늙는 돈을 구상한 것도 돈이 순환해야 한다는 의미를 일깨우기 위함이었다. 중세에도 한쪽 면만 새겨진 동전을 정기적으로 수거해 화폐를 순환하는 정책을 시도했다. 이 주화를 3~4년마다 수거하고 10~20% 주화량을 줄여 새로운 주화를 발행했다. 이렇게 줄인 차액은 시민이 낸 세금으로 인정됐다. 이런 정책은 장기 관점에서 통화 가치의 안정성 유지, 무이자 대출의 가능성 등 여러 장점을 지닌 것으로 평가됐다.
그렇다면 어떻게 돈이 순환하도록 할 것인가. 사람들에게 돈을 줘서 순환하는 방법이 있다. 기본 배당이다. 돈에 대한 시스템을 재설계해서 기본 배당을 받게 하거나 순환 고리를 만들겠다는 발상이 가능하다. 이 순환을 만드는 주체는 개개인이다. 부자가 만들지 않는다. 지금처럼 돈이 돈을 낳는 구조가 아니다. 1인 1표를 가진 시민에게 배당이 가면 순환이 만들어진다.
돈에 대한 또 다른 상상과 가능성이 열리고 있다. 케인스의 말이 옳았다.
그는 《고용·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마르크스보다 게젤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배울 시대가 올 것이다.” 자, 그런 시대가 오고 있다.
이를 증명하는 현상도 있다. 조세 회피처로 활용되는 등 스위스에 돈이 몰리면서 스위스 평균 이자율은 마이너스에 가깝다. 의도하지 않게 이자율 장사가 작동하지 않게 됐다. 아이러니하게도 실비오 게젤이 기본 현상이 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