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성선설을 지지하는 이유

선과 악, 인간 본성에 대한 개념 재정립을 바탕으로

by 존둥이

들어가며


2021년 1월, 길거리마다 덮인 하얀 눈이 차가운 햇볕에 빛나던 어느 겨울 낮이었다. 졸업과 대학원 입학을 기다리던 나는 한 평이 채 안 되는 작은 공간에 겨우 들어가는 커다란 검은 의자 사이로 몸을 구겨 넣고, 가장 편하지만 허리 조지기에는 딱 좋은, 반쯤 누워 앉은 자세로 생각 없이 유튜브 영상 목록을 돌아보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 이따위로 시간과 건강을 낭비하는 것이 지겨워질 때 쯤 나는 몸을 풀 겸 밖으로 산책을 나갔다. 동네 한 바퀴를 돌고 집 앞에 도착할 때 쯤, 초등학교 3학년 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학교를 파하고 싱글벙글 실내화 주머니를 돌리며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 때 한 아이가 소리쳤다.

“어, 고드름이다!”

그 아이는 친구를 보며 자동차 하단부에 맺힌 고드름을 가리켰다. 그러고는 자동차에 다가갔다. 나는 속으로 아이들이 실내화 주머니나 발로 고드름을 깨버릴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자동차 곁에 쪼그려 앉아 조심스럽게 고드름을 똑 하고 떼어냈다. 그러고는 무엇이 그리도 신기한지 고드름을 한참동안이나 이리저리 돌려보며 관찰했다. 마스크에 가려져있었지만 그 위로 드러난 눈빛에는 알 수 없는 경이로움이 서려있었다. 그 눈빛에서 나는 “순수함”을 목격했다. 그러고는 생각했다. ‘인간 본성이란 무엇인가? 저 아이들에게 감히 “너희는 악하게 태어난 존재다”라고 할 수 있는가? 인간의 본성은 그야말로 순수함이 아니겠는가?’ 이후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성선설과 성악설에 대해 내 나름대로의 연구를 지속했다.

이에 따라 나는 선과 악에 대한 개념을 사회 교육적 관점에서 재정립하고 이에 기반을 두고 한때 “성악설”을 지지한 까닭을 제시하고, 이에 나타난 오류를 인간 본성에 대한 개념 재정립을 통해 수정하여 결과적으로 내가 “성선설”을 지지하게 된 까닭을 밝히고자 한다.



선과 악에 대한 개념 정리


특정 사안을 논의하기 전에는 사안이 다루는 개념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인간 본성이 선한가 악한가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서는 선과 악이라는 개념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에 따라 성선과 성악을 논하기 전에 우선 내가 선과 악이라는 개념에 대해 어떻게 개념을 정리하였는가에 대해 설명하겠다.


ⅰ. 사회적 개념인 선(善)


약 50만년을 관통하는 인간사(人間史)에서 인간은 극초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단 한 차례도 개별적 존재였던 적이 없다. 인간은 태초부터 집단을 이루어 생존해왔다. 거대한 몸집이나 날카로운 이빨과 같이 다른 종(種)을 뛰어넘는 월등한 신체능력을 가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최상위 포식자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은, 나약한 개인을 거대한 하나의 개체로 묶는 ‘사회(社會, society) 형성’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뒤떨어지는 신체능력 대신 인간은 뛰어난 지적능력을 통해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한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인간은 가정과 가족에서부터 국가와 세계에 이르기까지 사회를 확장하며 지구 전체의 주권을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은 사회를 이루는 사회 구성원간의 결속이 공고해질수록 사회는 더욱 커지고 강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에 따라 인간은 서로를 강하게 묶을 수 있는 ‘질서체계’를 정립한다. 이와 같은 질서체계는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법, 도덕, 규율’이 그것이다.

법과 규율은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명문화되어 강제성이 동반되지만, ‘도덕(道德, moral)’은 굳이 명문화하지 않아, 개인이 자발적으로 행하는 것을 바람직한 형태로 본다. 가령 잘못을 하고 나서 사과를 한다거나, 선물을 받고 나서 고맙다는 말 또는 보답을 하는 것 따위에 대해 인간 사회는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라고 명문화하여 강제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사회 구성원들은 이를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구성원 서로가 이를 자발적으로 행하기를 기대하고 있으며,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구성원에 대해 사회는 이를 “못 배워 먹은 인간”, 즉 "선하지 않은 인간"으로 규정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적극적 선행”과 “소극적 선행”의 개념에 대해 설명한 뒤 넘어가겠다. “적극적 선행”이란 “타인과 사회에 쾌감과 만족감을 선사하는 사회 구성원의 행동 일체”를 뜻한다. 선물을 한다거나, 곤란한 일을 도와주는 것 등이 이에 해당한다. “소극적 선행”이란 “타인과 사회에 피해를 입히거나 불쾌감을 선사하는 행동을 자제하는 것”을 뜻한다. 법규를 준수하거나, 타인을 향해 욕설 또는 폭행 등을 하지 않는 것 등이 이에 해당한다.

즉, 사회 속에서 인간 행동은 타인을 만족시키는 것에 가까운 것일수록 바람직한 것, 멀수록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선(善)이란 “착한 것”이라는 절대적이면서 추상적인 개념이 아닌, “인간 사회와 그 구성원들이 한 구성원에게 기대하는, 사회적 만족감을 이루는 것”이라는 사회적 개념으로 볼 수 있다.


ⅱ. 선이란 배워서 아는 것, 곧 악(惡) = 무지(無知)


흔히 “성악설” 지지자들이 펼치는 논리는 대부분 “애들은 지들만 안다”라는 것에서 출발한다. “배려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가 없는데 무슨 성선설이란 말인가?” “요즘 애들 하는 꼬라지 보면 어른들도 상상 못할 악행들을 저지르고 다니는데, 당연히 본성은 악하다.” “본능적으로 모든 동물은 자신을 보호하려 하기 때문에 남을 배려하는 선한 모습은 본성이 아니다.”와 같은 의견이 성악설을 지지하는 근거로 작용한다. 그러나 이는 선과 악에 대한 개념의 부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그래, 당신은 지금 선과 악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있지 않다.

앞서 말했듯이 선은 사회적인 개념이다. 사회란 둘 이상의 개인이 결합하여 형성된다. 즉 개인은 누구의 도움이나 개입 없이 단독으로 사회라는 체계에 대해 이해 할 수 없다. 사회의 기존 구성원은 사회에 처음으로 진입하는 구성원에게 사회라는 체계가 어떤 식으로 작용하며, 이를 유지하기 위해 어떤 질서를 따라야하는지, 이것을 왜 유지해야하는지에 대해 알려줄 의무가 있다. 인간사회에서는 이를 “교육”, 또는 “훈육”이라고 명명했다. 다시 말해, 선에 대한 이해와 실천은 교육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교육은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가면서 해야 할 것과 해도 될 것,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구분하는 방법을 배우고 이를 실천하도록 훈련하는 것이다. 그러나 교육을 통해 습득하지 못했다면? 앞서 언급했듯이, 배려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가 없고 지만 알고 남들한테 피해주는 놈들을 우리는 흔히 “못 배워 먹은 놈”이라고 한다. 못 배워 먹은 놈. 제대로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렇듯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나쁜 사람”이라는 평가를 내린다. 다시 말해, 인간에게 있어 “악(惡)”이란, 단순히 말해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 일체”를 넘어 “선에 대한 인식에 대해 제대로 교육 받지 못한, 또는 습득하지 못한 상태”를 뜻하고, 이는 곧 악이 “사회 체계에 대한 이해 부족” 즉 사회를 알지 못함(無知)으로 정의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발상은 한나 아렌트가 주창한 “악의 평범성”에서 비롯되었다. 그녀의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그녀는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전범 재판에 청중으로 참여하여 그의 진술 장면을 목격하였다. 반인륜적 행위를 일삼은 나치 전범이라는 악명을 달기에는 아이히만의 모습은 지극히 평범했고, 말투와 목소리는 전혀 악행을 저지를 것 같은 악인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진술한 내용은 장내의 모든 청중을 경악케 할 만큼 악랄한 것이었다. 또한 진술 과정에서 그는 이렇게 진술했다.


“나는 독일의 군인이었고, 나의 임무는 국가와 당, 그리고 상관에 복종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임무를 충실히 따른 것뿐이다.”


이는 인간 사회 전체가 설정한 보편적 선악의 기준이 유보되고 개인이 편입된 소규모 사회가 새로이 설정한 선악의 기준이 적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이히만에게 있어 유대인 학살은 자신이 소속된 나치 정당이라는 소규모 사회가 설정한 선악의 기준으로 볼 때 지극히 선한 행동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도 인간이었기에 유대인 학살을 자행한 뒤 괴로운 모습을 보이는 등 마냥 인간 사회의 보편적 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그러나 나치 정당이 새로이 제시한 선의 기준을 통해 그는 이를 정당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한나 아렌트는 더욱 지배적인 인간 보편적 선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지엽적이고 편협하게 설정된 선의 기준에 기대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을 “무사유(thoughtlessness)”로 칭하며 이를 곧 “악(惡)”으로 정의하였다.

이를 사회 교육적 관점으로 치환하자면, 무사유는 곧 무지(無知)로 이어진다. 교육은 교수자의 정보전달과 학습유도, 학습자의 자발적 학습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자발적 학습이란 혼자 자습하고 문제 풀고 그런 게 아니라 스스로 습득하는 것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 선생이 아무리 떠들어봤자 학생이 공부를 하지 않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면 그것은 학습이 안 된다는 소리다. 학습은 학습자 스스로의 사유와 탐구를 통해 이루어진다. 즉, 선에 대한 무사유는 곧 선에 대한 몰이해, 무지로 이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선이 “학습을 통해 이루어지는, 사회 유지를 위한 질서 체계”라는 점에서, 악을 ‘선의 부재’ 혹은 ‘선의 반대 개념’으로 본다면 “악(惡)”이란 “선에 대한 학습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로 볼 수 있다.



성악설에 대한 일차적 옹호, “순수 = 무지 = 악”(?)


앞서 인간의 본성에 대해 “순수함(purity)”라고 말했다. 순수함이란 완전무결의 상태, 백지와 같은 상태임을 우선적으로 밝히겠다. 순수함이란 “모르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사회에서 누군가가 어떤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가정해보자. 잘못한 사람이 “미안합니다” 다음으로 많이 하는 말은 “모르고 그랬어요”일 것이다. 여기서 발화자는 자신의 잘못에 대해 알지 못했음을 어필하는데, 이는 자신의 잘못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갓 태어난 아기의 상태는 어떠한가? 선악에 대한 기준과 개념에 대해 정확히 인식하고 있는가? 그 누구도 감히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직 순수성만을 갖고 있는 아기에게 선의 개념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태어나기 직전까지 지극히 개인적인 존재였던 아기에게 있어 선은 그야말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아기는 태어나 점차 성장하면서 부모와 교사, 또래들과 수많은 관계를 맺고 사회를 형성한다. 이를 통해 사회 구성원이 되기 위한 질서 체계를 학습하고 훈련을 거듭하면서 선에 대한 개념을 습득하고 내면화하는 것이다. 즉, 인간 본성은 “순수함”이라고 밝혔으나, 이러한 순수함은 학습을 통해 이루어지는 선의 개념 습득이 부재한 상황, 즉 선에 대한 몰지각으로 치환할 수 있으며 이는 곧 “순수 = 무지 = 악”의 논리 전개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에 따라 나는 성악설을 지지해왔던 것이다.



이에 대한 자기 반박, 인간 본성에 대한 개념 재정립


ⅰ. 순수함 → 결백성


앞서 주장했던 바에 대해 완전히 반박할 수 있게 됨으로써 나의 쓸데없는 사유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우선 인간 본성이 “순수함”이라는 주장에는 큰 허점이 있다. 인간에게도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선천적으로 갖는 “본능”이 있다. “순수함”이라는 표현은 이와 같은 본능의 실재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우선 “순수함”이라는 표현을 “결백성(innocent)”으로 고치겠다.

“결백성”이란 한 개인이 자신의 행동 일체에 대해 선악을 구분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즉 유아기 어린이들의 결백성에 의해 그들의 선에 대한 무지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 유아기 어린이들은 선과 악의 개념에 대해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이에 대해 인간 사회는 정당성을 부여하고, 선을 지키지 못한 어린이를 비난하거나 지탄하기보다는 선의 개념에 대한 이해를 시키는 데에 중점을 둔다. 이는 성인 사회에서도 적용된다. 앞서 언급한 “모르고 그랬어요”가 정당화 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 결백성 때문이다.

인간 사회는 선에 대한 무지에 대해 관대하다. 모르면 알려주면 되니까. 그러나 이는 인간 사회가 “알고도 저지르는 악행”에 대해 더욱 엄격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생각해보라. 어느 한 사회 구성원이 모르고 그랬다고 하길래 몇 번 알려 줬는데도 또 잘못을 반복하면 우리는 그 구성원에게 짜증을 낼 수 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자신이 그런 잘못을 하면 남들이 피해본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이 편하고 싶어서 이를 반복해왔다면? 인간 사회는 그 구성원을 “악인(惡人)”으로 판단한다. 이 구성원이 유아기 어린이와 다른 점이 무엇인가? 인간 사회는 성인 사회 구성원에게 사회적 개념 습득 완료를 기대한다. 즉 사회적인 인간상을 기대하는 것이다.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인간 간의 유대 및 결속이 강해야하며, 이는 질서 체계가 엄격할수록 활성화된다. 그렇기 때문에 성인 사회 구성원에게 이를 기대하는 것이다. 이는 “악”이 “선에 대한 무지”가 아닌, “선을 인식하고 있음에도 이를 의도적으로 붕괴시키는 것”으로 볼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에 따라 인간 본성은 순수함이 아니며,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순수함이 곧 악이 될 수는 없다는 점을 밝힌다.


ⅱ. 성선설을 지지하는 결정적인 근거 - 인간 고유의 “공감능력”


그렇다면 완전무결하지 않은 인간이 갖고 있는 본능은 무엇인가? 인간은 “감정”을 갖고 태어난다. 감정은 교육을 통해 후천적으로 습득하는 것이 아니다. 희로애락을 비롯한 수많은 복잡한 감정을 인간은 타고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감정을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치부한다. 그러나 인간은 개인적인 것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요소 역시 선천적으로 갖고 태어난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는 감정과 깊은 연관이 있다. 타인의 감정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능력. 우리는 이를 “공감능력”이라고 부른다.

“공감능력”이란 타인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엄마가 웃으면 아이는 웃고, 엄마가 울면 아이도 운다. 인간은 선천적으로 표정과 말투, 목소리에서 상대방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타고 나는 것이다. 완전히 상대방의 마음을 알아내는 독심술과 같은 초능력이 아닌, 여러 형태의 간접적 표현 수단을 통해 상대방의 마음을 짐작해낼 수 있다는 말이다. 공감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인간은 무력이 아닌 대화를 통해 분쟁을 해결하는 방법을 찾아냈고, 정서를 교류하는 여러 형태의 예술을 창작하고 향유해왔다. 인간은 누구나 표현의 욕구를 갖고 있다. 이는 상대방이 내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즉 인간은 선천적으로 타인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타인의 마음을 알고자 하는 욕구를 갖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 비롯된다.

앞서 선(善)이란 “인간 사회와 그 구성원들이 한 구성원에게 기대하는, 사회적 만족감을 이루는 것”이라는 사회적 개념이라고 밝혔다. 공감능력은 사회와 사회 구성원이 한 개인으로 하여금 어떠한 것을 기대하는 지 알 수 있는 능력이다. 타인이 처한 상황에서 자신에게 어떠한 것을 기대할 것인지 짐작할 수 있는 능력, 자신 역시 타인에게 이해받음으로써 어떤 이익을 기대할 수 있을지 짐작할 수 있는 능력이 공감능력인 것이다. 즉 공감능력은 곧 사회적 능력이며 이러한 사회적 능력을 갖고 태어난다는 것은 곧 인간은 선한 능력을 선천적으로 갖고 태어나는 선한 존재임을 시사한다.



마치며


정리하자면, 선이란 사회 유지를 위한 질서체계이며 악은 이러한 질서체계를 이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의도적으로 붕괴시키는 것이다. 인간은 결백한 존재로 태어나기 때문에 자칫 악으로 간주될 수 있는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받을 수 있는 유예기간을 가지며, 사회는 그 기간 동안 한 개인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가져야할 질서체계인 선을 습득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사회가 이러한 기대를 가질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이 공감능력을 선천적으로 갖고 태어나기 때문이며 이는 타인의 상황과 감정을 이해하는 능력이므로 사회적 능력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적 능력을 갖고 태어나는 인간은 선한 존재로 태어난다고 볼 수 있다.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쓰되 그래도 구색은 맞춰야 할 것 같아서 각잡고 썼다. 질문 있으면 카톡이나 전화로 물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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