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독한 운명론자의 교만한 낙관론
오늘 아침에 까마귀가 울었다. 그것도 아주 힘차게. 오늘은 좋은 일이 있으려나보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평소보다 특별히 즐거운 날이었다. 출근 버스에 올라타 내릴 때까지 죽 좌석에 앉아갈 수 있었고, 강의실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아이들은 여느 날처럼 밝고 명랑했으며 나는 그들로부터 위안과 에너지를 얻었다. 오늘도 평소처럼 유난히 행복한 날이었다. 등따시고 배부르면 그게 행복이지, 뭘.
배와 머리는 비례적 관계에 있다. 배가 차면 생각이 많아지고, 배가 비면 생각 또한 사라진다. 이렇게 생각이 많은 것보면 난 참 배부르고 머리 부른 인간이다. 그런데 배가 너무 많이 차면 속이 얹혀 몸이 불편해지듯이, 머리도 너무 많이 차면 생각이 얹혀 불편해진다. 마음 속의 불안은 체기처럼 거슬린다. 과식으로 몸이 불편해지면 움직여 소화를 시켜야 한다. 마음도 마찬가지, 소화를 시켜야 한다. 그래서 나는 말을 하고, 글을 쓰고, 마음을 소화시킨다.
마음의 불안은 생활의 불안정에서 온다. 생활의 불안정은 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유발한다. 왜 변화를 두려워할까? 두려움은 무지(無知)에서 비롯된다. 무지가 왜 두려움을 가져오는가? 무지의 끝에는 죽음이 있다. 물질적인 것과 관념적인 것을 포함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개념이 규명되어있고, 규명될 수 있다 하더라도, 여전히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는 무지하며, 무지할 것이다. 즉 우리는 죽음이라는 체험이 우리에게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 지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막연한 두려움을 갖고 있는 것이다. 또한 작든 크든 변화는 그러한 무지에 한발짝 다가가는 것이고, 안정되지 않은 생활은 어떠한 변화를 초래할지 모른다는 무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첫번째 이유이다. 나는 죽음 이후에 대해 알고 있다. 나는 이승에서의 삶을 끝내고 죽은 자들의 사회에 편입되어 다시 살아가거나, 다시 한 번 이승에 태어나 또 다른 삶을 살거나, 먼지가 되어 세상에 존재한 적이 있었나 싶게끔 완전히 사라져 무(無) 그 자체가 될 것이다. 이 외에 다른 일이 있을 수 있겠지. 중요한 건, 죽음 이후는 내 알 바가 아니라는 것이다. 죽음은 삶의 끝이다. 정확히는 내가 '나'로써의 존재를 끝맺음하는 것이다. 즉 죽음 이후의 나는 "없다". 죽음 이후의 나를 내가 생각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두번째 이유는 다중우주와 운명론에 대한 이야기에서 비롯된다. 수많은, 무한대에 가까운 우주와 그 속에 존재하는 또 다른 나. 크고 작은 모든 경우의 수의 갈림길에서 분화된 수 많은 '나'가 있을 것이다. 그 모든 경우의 수에는 나의 죽음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나는 교통사고로, 암으로, 2020년 처음으로 겪었던 우울과 그로 인한 극단적 선택으로 충분히 죽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아직 살아있다. 내가 인식할 수 있는 이 우주에서 숨 쉬고 있는 '나' 하나뿐이다. 나는 죽으려면 충분히 죽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 살아있다. 지독한 운명론자인 나는 그러한 수많은 죽음의 기회(?)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마 수없이 많은 죽음의 경우의 수에서 다른 우주의 '나'들은 수없이 죽어나갔을 것이다. 지금 내가 인식하고 있는 이 우주 속에서의 '나'는 죽음을 각오하더라도 죽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아직 하고 싶은 것이 많고 미련이 많이 남아있는 나는 무로 돌아갈 준비가 되지 않았다. 정리가 되었을 때, '아 이제 진짜 죽어도 되겠다'라는 생각이 들기 전까지 나는 죽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의지'가 아니라 '예견'이다.
그렇다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도 내가 죽음을 피하고자 하는 이유는 뭘까? 방금 말했던 것처럼 나는 아직 하고 싶은 일들이 너무 많고, 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다. 이 일을 다 하기 전까지 나는 죽지 않으리라 확신하고 있지만, 반대로 이를 다 하기 위해 나는 살아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죽게 된다면, 나는 거기까지일 것이다. 내가 죽는 순간, 내가 할 일은 거기까지인 것이다. 그래도 기분이 그렇잖아. 그래도 할 건 다 하고 가야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아니다. 내가 두려워하고 걱정해야할 것은, 나의 죽음이 아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내가 죽고 나면 남겨질 나를 사랑했던 이들. 그들의 슬픔은 이루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이 나의 영정 앞에서 눈물 흘리며 그리워할 모습을 생각하면 내 가슴 역시 찢어지게 아프다. 나의 죽음 이후를 나는 알면서도 모른다. 하지만 나의 죽음 이후 남겨질 이들의 반응은 불보듯 뻔하다. 이것이 내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도 죽음을 피하고자 하는 이유이다.
내가 죽음에 대해 깨달은 것은 비약적 논리와 억측에서 비롯된 착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말도 안 되는 주장이 내 마음의 불안을 덜어준다는 이유로 계속해서 고집하고 있다. 얼마든지 반박해도 좋고, 욕을 해도 좋고, 받아들이고 공감해도 좋다. 어차피 이건 내 생각이고, 당신의 생각은 다를테니까. 내가 당신의 생각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당신도 이 점을 알기를 바랄 뿐이다. 소화제를 영양제로 생각하고 먹는 사람도 있고, 다른 사람들이 모두 흉조라고 하는 까마귀를 나는 길조라고 생각한다. 내가 죽고싶다고, 아니 죽어도 괜찮겠다고 생각하지 전까지 나는 죽지 않는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