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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종희 Jun 16. 2021

<우신 예찬> 바보 여신이 보는 바보 세상

해학과 재치 속의 날카로운 비판, 풍자의 진수를 보다


<우신예찬>은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책을 들었다간 낭패 보기 십상이다. 책에서 언급되는 수많은 신들과 인물들에 당황하고('걸어 다니는 백과사전', 그 지식에 혀를 내두를 정도), 15세기 유럽의 상황을 알지 못하면 내용이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 역시 완전 거꾸로 해석하며 읽다가 책과 저자에 대해 검색해 보고서야 의도에 맞춰 읽을 수 있었다. (진도는 잘 안 나감)

 

이 책이 고전으로 남아있는 이유는 뭘까? 내 생각엔 '르네상스 정신을 보여주는 책'이어서 그런 듯 싶다. 1,000여 년 동안의 신 중심 사고가 지배하던 중세가 저물고 '인간의 눈, 생각'으로 세상과 인간을 다시 보기 시작하던 르네상스. 이 작품은 바로 그러한 시대정신을 대표하는, 즉 인간의 자유로운 생각과 상상력으로 자신이 보는 세상을 과감히 풍자한 것이다. 게다가 그 방식은 진지하고 무겁기보다 우스꽝스럽고 가볍다. 재치와 유머, 해학 속에 들어있는 비판은 그래서 더 날카롭게 빛을 발한다.  

그는 당시 사회와 교회, 인간상에 대해 신랄하게 비꼰다. '바보 여신'의 입을 빌어 시장통에서 사람들에게 잠깐 들어보라고 하고, 끝낼 때는 또 기억하지 말라고 당부하는 설정이 창의적이다. 많은 풍자 소설이 있지만 600년 전 이런 풍자문을 썼다는 것이 대단하다. 요즘 말로 뼈 때리는 것인데 특정인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제 발이 저렸을 사람들이 많을 듯하다.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뮈스

에라스뮈스(1466~1536)는 네덜란드 출신의 사상가이자 신학자, 인문학자이다. 그는 사제 서품을 받았지만 신부가 되지 않고 독립적인 학자로서 고전을 연구하고 그리스어로 된 신약 성서를 번역하는 등 기독교 교리를 연구했다. 또한 유럽 각지를 돌아다니며 많은 인문학자들과 교류한 코즈모폴리턴이기도 하다. 600년 전 이미 글로벌 인이었던 셈이다.


 <우신예찬>은 1509년 경 <유토피아>로 유명한 영국의 사상가이자 법학자 토머스 모어(1478~1535)의 별장에 머물면서 일주일 동안 쓴 작품이다. 그리스, 로마 고전을 연구하며 얻은 학식과 이탈리아에서 경험한 것을 토대로 교회와 세상의 어리석음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는데, 1511년 출간되자마자 단숨에 팔리며 많은 화제를 일으켰고 이어 각국어로 번역되었다. 이후 종교개혁(1517~ )이 일어나는데 많은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교회와 성직자들의 악습과 부패를 비판했지만 정작 그는 종교개혁 운동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중립을 지켰다. 그가 바라던 교회의 모습은 적극적 개혁보다는 제도 안에서 예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회귀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성을 통해 진리를 탐구하려는 지식인들의 과욕이 점차 배타적이고 독단적으로 변질되자 이를 반성적으로 보고 자연적인 질서, 본성에 충실할 것을 강조했다.


1. <우신예찬> 내용 요약

바보 여신(Moria, 모리아)은 '어리석음'의 신으로 자기 자신을 예찬하며 자신이 얼마나 세상을 이롭게 하고 그 능력이 어디까지 미치는지 설명한다. 어리석음은 생명과 삶의 원천이자 즐거움과 행복의 근원이다. 즉 자신 덕분에(어리석기 때문에) 신들과 인간들이 즐겁고 행복한 것이다.(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이 태어난 곳은 '행복'의 섬(인간의 궁극적 목적)이고 자신의 아버지는 '부유(플루토스 신'), 어머니는' 젊음(유피테르 신)'이며, 자신을 길러준 유모 요정은 '취기', '무지'이고 자신을 도와주는 일행은 '자기 애착', '아첨', '망각', '태만', '환락', '경솔', '음란 호색', '광기', '인사불성'이다.(우리가 부정적으로 보고 멀리해야 할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사실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이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어리석음, 쾌락을 비난하고 무시해 세상을 권태롭고 따분하고 지루하게 만들었다.


삶에 쾌락을 더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우신이 짜릿한 묘미를 첨가하지 않는다면 삶 전체가 슬프고 권태롭고 따분하고 지루해지리라는 것을. 여기서 소포클레스가 한 말을 인용해 보겠다. 지금까지 충분히 칭송받지 못한 그는 나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은 덜 똑똑할수록 행복한 법이다."

그러면서 인간의 어리석음이 왜 좋은지 조목조목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몇 가지를 살펴보자. 제우스 신은 원래 인간의 삶이 우울하고 따분하지만은 않도록 인간에게 이성보다 정념을 훨씬 더 많이 주었다. 1대 24쯤의 비율로. 게다가 이성은 머리 한쪽 구석에 처박아두고 이에 맞서는 두 가지를 세웠는데 '분노'와 '정욕'이다. 이 두 가지 힘이 합쳐질 때 이성이 맞서지만 사실 이 두 가지가 얼마나 힘을 발휘하는지 인간생활을 보면 분명해진다.  남녀 간의 사랑, 친구와의 우정, 부부 관계, 왕과 백성, 주인과 하인, 교사와 학생 등 모든 인간관계가 이러한 어리석음 때문에 유지되고 돈독해지며, 교류와 결합이 안정된다.(어리석음의 꿀을 발라주어야 한다)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또 '자기애'는 자기 자신에 만족하고 남들로부터 존중을 받기 위해 필요한 것이고, '아부'는 누구나 스스로에게 흡족하고 기뻐하도록 만들어주며 인간 삶 전체를 달콤하게 하는 꿀이며 살맛을 북돋는 양념이라고 한다. '광기' 역시 후회하면서도 다시 행동을 반복하고 인간관계를 이어주는 것이라 한다.


이처럼 어리석음은 실망에 빠진 영혼을 다시 세우고 슬퍼하는 사람을 달래주며, 지친 사람에게 힘을 주고, 멍청해진 사람에게 자극을 준다. 병자의 증세를 완화시켜주고 거친 마음을 부드럽게 해 준다. 사랑하는 사람을 결합시켜주고, 어린이를 공부하도록 이끌어주며 노인을 행복하게 해 준다. 속는 것은 불행한 일이 아니고 속지 않는 것이 불행한 일이다. 

어린 아이, 청소년, 젊은 시절  노년시절 과정에서도 어리석음 때문에 때로는 무지, 때로는 경박, 망각을 통해 희망을 갖고 살게 된다. 즉 어리석은 요소를 갖고 있을때 더 행복하지 않은가?  

그는 인간 가운데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행복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고, 본능적인 어리석음에 가장 충실한 사람들이 덜 불행하다고 한다.


이 책의 묘미는 바로 '모순'이다. 자신(어리석음)에 대한 칭찬, 자랑은 곧 우리에게는 조롱과 비판이다. 자신에 대한 칭찬은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현인들이 우신이 내려준 축복으로부터 멀어지려 함으로써 진정 어리석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작은 문제를 불필요하게 심각하게 다루어 여유와 유머가 없는 사람들을 풍자하는 것이다. 동시에 진정으로 어리석음에 빠져 사는 사람들도 비판한다. 


2. 비판의 구체적 대상

- 지식인(문법학자, 웅변가, 작가, 법률가, 소피스트, 철학자, 신학자) 비판 : 당시 소위 지식인들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쾌락을 무시하며 형식에 치우친 이론으로 논쟁하고, 하찮은 일도 심각하고 진지하게 바라본다. 하지만 겉으로는 쾌락을 비난하면서도 남이 보지 않는 데서는 마음껏 쾌락을 즐기는 위선을 보인다. 철학자는 일상 생활과 그가 추구하는 정신 사이에 간극이 있어 혐오의 대상이다. 마치 오늘날 현실과 동떨어진 공허한 이론과 주장으로 논쟁을 일삼고, 상대방에 대한 비판과 지적을 하느라 바쁜 사람들, 지식인들이 떠오른다.   


- 수도사 비판 : 성경을 읽고 전달하는 것을 대단한 일이라 느끼며 돈 버는 수단으로 생각하고, 형식적이고 세밀한 규범으로 우월감을 갖고 그렇지 못한 사람을 경멸한다. 격식에 얽매이고 인위적인 사소한 전통에 매달리지만 종교의 본질, 즉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데는 흥미가 없다. 고해성사를 통해 들은 이야기를 안주삼아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설교도 엉터리로 한다. 놀이에만 빠져 높은 신분에 수반되는 책임은 나 몰라라 하는 등... 종교인들이 개인적 이익만 꾀하는 모습을 꼬집는다.


- 왕과 귀족(제후) 비판 : 왕들은 나라의 걱정거리를 신에게 맡겨버리고 불쾌감이 들지 않도록 듣기 좋은 말만을 하는 자들에게 귀를 기울인다. 느긋하게 사는 데만 관심이 있고 시민의 재산을 축내서 자신의 배를 채우려는 방법에만 골몰한다. 공평무사의 탈을 쓰고 민중에게 아첨하며 법에 무지하고 민중의 이익을 침해하는 적을 외면한다. 쾌락을 즐기고 학문과 자유, 진리는 미워한다.   

또 궁정 귀족들은 아첨을 잘하고 노예처럼 굽신거리며, 모든 일에 1인자가 되고 싶어 한다. 게으르기 짝이 없어 중천까지 자고, 놀고 즐기며, 술을 마시고 외모에 신경 쓴다. 겉모습의 화려함과 재물, 쾌락을 탐한다.


- 성직자 (교황, 추기경, 주교) 비판 : 군주의 흉내를 잘 낸다. 잘 먹고 잘 살며, 양떼를 보살필 책임을 그리스도나 신부 대리인에게 미룬다. 이익을 따지고 또 그런 일을 도모하는데 급급하며 화려하고 쾌락을 즐긴다. 적으로 간주되는 사람을 공격하고 내쫓고 가르침을 억지 해석해 가르친다. 피로 세워지고 피로 강해지고 커지며 교회 문제를 칼로 처리한다. 만사 제쳐두고 전쟁에 몰입한다. 십일조를 거두기 위해 군인처럼 전투를 벌인다. 서로 책임을 떠 넘긴다. 


이처럼 로마 가톨릭 교회의 부패와 악습, 반대자에 대한 무자비한 박해, 신도들의 미신적 행위를 비판한다. 특히 그는 사제로서 교회와 성직자에 대한 깊은 염려를 하고 있는데, 그리스도와 성서에 다가가기보다 돈과 권력을 좇고 현학적인 종교 지도자들을 비판하며 제도 내에서 교회가 다시 정화되기를 진심으로 바랐음을 느낄 수 있다. 중용을 지키고 진실에 입각해 살아가려는 자세, 진실한 믿음, 진실한 자애심, 의무 수행을 하기를 강조한다.

 요즘 교황은 가장 어려운 일들을 베드로와 바올로에게 맡기도 호화로운 의식과 즐거운 일만 찾는다. 교황은 바로 나, 우신 덕분에 우아한 생활을 하고 있다. 왜냐하면 연극이나 다름없는 화려한 교회 의식을 통해 축복이나 저주의 말을 하고 감사의 눈만 번쩍이면, 충분히 그리스도에게 충성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일반 사람들 :  사람들의 행동을 지켜보니 미신, 미모, 돈, 거짓, 자기기만, 무위도식, 파산, 위선, 사기, 모험, 전쟁, 아부 등 다양한 어리석음을 보인다. 조금이라도 즐겁게 살아보려는 과정이다. 그런 인간상을 내려다 보니 너무 재미있을 정도라 한다. 이 부분은 어리석음을 찬양한다기보다 인간의 지나친 어리석은 행동을 비판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참된 행복은 주어진 가족, 이웃과 함께 진실하게 살아가는 것임을 강조한다.



그럼 에라스뮈스는 어떤 사회를 꿈꾸고 있었던 것일까? 진정 지혜로운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라는 것 아닐까? 더도 덜도 아닌 '중용'의 이상적 사회를 바란 것 아닐까? 인간의 이성에 기초하되 종교의 본질을 잃지 않는 균형 있는 삶 말이다.

인간사... 6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치 않는 것 같다. 우신의 말대로 어리석음이 없다면 좌절을 딛고 일어설 희망도 없을 것이며, 용서와 관용, 사랑, 지속적인 인간 관계도 힘들 것이다. 작은 일 때문에 행복을 놓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지나치면 세상은 또 어리석은 인간들로 가득 찬 미치광이 사회가 될 것이다. 자꾸 엄근진 하려고 하는 나를 반성해 본다. (2021.06.15)


<네덜란드 로테르담에 있는 에라스무스 다리>


< 사진 출처  : 네이버 블로그, 가톨릭일꾼, 예스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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