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무 씨의 냉장고

by 박정아

1.

무무 씨는 예정에 없던 야근을 마치고 사무실 문을 잠근 후 엘리베이터를 탔다. 건물 현관에 이르러서야 비가 오고 있다는 걸 알았다. 추적추적 빗소리에 피로가 갑자기 몰려오는 것 같아 평소에 잘 타지 않는 택시를 잡았다. 두 대를 보내고, 세 번째 택시를 타고 도시의 변두리 작은 원룸에 도착했다. 씻고 눕자 바로 잠이 들었다.

무무 씨는 불면증까지 아니지만, 평소 잠들기 전 시간이 걸리고 깊이 잠들지 못했다. 깨고 나면 기억나지 않는 꿈도 자주 꾸었는데, 그날은 깊이 잠들었다. 아마도 몸살이었나 보다. 무무 씨는 알람 소리에 겨우 깼지만, 일어날 수 없어 회사에 월차를 냈다. 늦잠을 자고 일어나 보니 곧 저녁 시간이었다. 화장실을 다녀와 생수와 캔 맥주만 있는 냉장고를 습관처럼 열었다.

노란 호박죽.

‘아프고 외롭고 서러운 나머지 헛것이 보이는구나.’ 무무 씨는 냉장고 문을 닫으려다가 다시 열었다. 아니다. 아무리 보아도 호박죽, 노란 호박죽이다. 왔다 갈만한 사람도 없는데…. 사다 놓은 적도 없는데…. 게다가 플라스틱 포장용기가 아니라 도자기 그릇에 담겨있는 노란 호박죽이라니.

어찌 된 일인지 알 수 없지만, 몸살 뒤 허기진 무무 씨는 호박죽을 먹는다. 냉장고에서 막 꺼낸 호박죽은 먹기 좋게 따뜻하다.

‘대체 누가 호박죽을 냉장고에 둔 것일까?’ 호박죽을 다 먹어갈 때쯤, 무무 씨는 궁금해졌다.


따로 약을 먹지 않아도 되었다. 무무 씨는 다음날 기운을 차리고 출근을 했다. 부장이 뭐라 뭐라 했지만 들리지 않았다. 무무 씨는 그저 호박죽이 궁금할 뿐이었다. 매번 비슷한 일의 연속, 지침 속에 다시 지치는 일상의 반복이었던 회사 생활이 살짝 여유로워졌다고 해야 할까? 이유는 모르겠다. 달라진 건 죽 한 그릇 먹었을 뿐이다.


아침마다 서둘러 출근하기 바빴는데, 어느 날부턴가 원룸 건물 경비원과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두어 달 전부터 출근을 시작한 여자 경비원이다. 전에는 누구와도 인사한 적이 없었다. 원룸 출입구는 그저 빠르게 지나다니기 바빴을 뿐이다.

며칠 지나지 않아 퇴근할 때도 인사를 하게 되었는데, 경비실 안에 죽전문집 포장용기가 있는 것이 보였다. 호박죽 생각이 났다. 혹시 경비원이? 그럴 리가 없는데도 무무 씨는 자꾸 호박죽을 챙겨준 사람이 이 경비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층에 여덟 개의 원룸, 총 50개가 넘는 원룸의 비밀번호를 이분이 다 알 수가 없을 텐데 자꾸만 비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물어보고 싶어도 뭐라고 물어보겠는가? 마땅한 말이 없음에도 퇴근길마다 머뭇거렸다. 경비실 앞에서 주춤거리는 무무 씨에게 경비원이 물었다.

“뭐, 더 하실 말씀 있으세요?”

“아, 음… 저기 죽이요….”

“네? 주기요?”

“저기… 경비실 안에 죽 그릇…”

“아, 호박죽!”

“오, 네! 호박죽! 혹시…”

“아, 저거! 우리 아들이 나 야간 근무할 때마다 야참으로 먹으라고 챙겨준 거예요! 오늘 야간 근무잖아요.”

“아, 네네…. 아드님께서 어머님을 잘 챙겨주시네요!”

“걔가 좀 세심해요!”

“네에… 그럼, 호박죽 잘 챙겨서 드시고 근무도 잘 하세요.”

“그래요, 일하시느라 피곤하실 텐데. 어서 들어가 쉬세요.”

무무 씨는 허리를 살짝 굽혀 인사한 후, 빠른 걸음으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아, 호박죽까지는 맞았는데…’ 역시 비밀번호를 알 수가 없었다. 오히려 알면 안 되는 것이었다. 게다가 냉장고안 호박죽이라니… 무무 씨는 야근했던 밤의 비와 몸살과 호박죽이 모두 꿈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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