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세석평전으로 떠나요
지는 해나, 산의 아름다움 앞에 잠시 멈춰서 "아!"하고 탄성을 지르는 것은 신성(神聖)에 참여하는 것이다.
『문학이 태어나는 자리』
새벽 5시 침묵의 세상을 달려요. 어둠에 싸인 도로를 달리는 기분은 색다르죠. 태초의 세상을 깨우는 것 같거든요. 세상 사람들이 깨기 전 새벽을 두드리는 거라 흥분도 돼요. 도로를 달리는데 순식간에 새벽안개가 세상을 가둬버렸어요. 비상 깜빡이로 존재를 알리며 천천히 속도를 줄였어요. 안개 가득한 도로를 달리는데 이 세상이 아닌 것 마냥 신비로웠어요.
지리산 백무동에 도착하자 8시 40분이더군요. 장비를 점검하고 세석평전을 올라요. 편도가 5시간 거리이고, 난도가 상까지 가는 등산이라 쉽지 않은 길이죠. 한신계곡을 지나는데 한겨울처럼 쌀쌀한 기운이 순식간에 훅 끼쳐왔어요. 한신계곡은 한 여름에도 한기를 느끼게 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에요. 이름값 제대로 하는구나 싶게 추웠어요.
세석평전까지는 여러 개의 폭포가 10km에 걸쳐 흐르는데요. 처음으로 만나는 폭포가 첫나들이 폭포(바람폭포)예요. 이름이 범상치 않아 생각했지요. '처음 맞는 폭포라는 뜻인가? 아님 첫나들이처럼 설레는 기쁨을 준다는 뜻인가?' 싶었거든요. 첫나들이 폭포는 처음 맞는 첫나들이처럼 설레게 아름다워요. 가을 찬탄을 순식간에 사라지게 할 정도로 폭포 소리가 굉장하네요. 잠시 숨을 고르는데 중학생쯤 돼 보이는 아들과 함께 온 사십 대 중반의 아빠가 사진 촬영을 부탁했어요. 핸드폰을 돌려주자 아이는 "아빠, 내려가기 전에 100장은 찍겠어요." 라며 투덜 되더군요. 아이 아빠는 빙그레 웃기만 하고 뿌루퉁한 아들을 열심히 사진으로 남기더군요. 하긴 추억을 남기기엔 사진만큼 좋은 게 없지요. 퉁명스러운 아들도 세월이 흐르면 아빠와 함께한 좋은 시간으로 기억하겠지요.
다시 걸음을 옮겨요. 1km쯤 더 가니 넓은 반석과 아름다운 수목에 쌓인 가내소 폭포가 눈에 들어오네요. 이곳은 사철 변함없는 물 덕분에 기우제를 지내는 장소이기도 해요. 폭포를 내려다보자 물빛이 시리도록 푸른색이네요. 푸른 물빛에 절정인 붉은 단풍의 대비가 경이로움을 더해요. 형형색색 단풍이 물들기 시작한 지리산이 가을 절정을 향해 달려가네요. 깊은 산은 계절을 조금씩 앞서가니까요.
산길을 오르면서 느낀 건데요. 등산길 정비를 참 잘해놓았다는 거예요. 폭포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만들어 다양한 동선을 만들었고, 돌이 많아 걷기 불편했을 등산길은 평평하게 만들어 놓았더군요. 길을 다듬어준 이의 수고로움에 고마움을 전했어요. 힘든 오르막길도 잘 정비해둔 분들의 노고로 편하게 올라갈 수 있었으니까요. 편안한 발걸음으로 산길을 오르는데 귀여운 다람쥐들이 자주 출몰하네요. 잣나무가 많아서인가 봐요. 다람쥐들은 사람을 크게 두려워하지 않아요. 눈 맞춰 한참 서로 쳐다보기도 했고 손에 올라 빵을 받아먹기도 했어요.
한신 폭포를 지나면 오르막길로 접어들어요. 1.4km만 더 가면 세석대피소인데 산은 쉽게 길을 내주지 않더군요. 가볍게 걷던 발걸음에 무게가 더해졌어요. 숨이 가빠 오고 다리에 힘이 풀려 더는 올라가지 못할 때쯤 화려한 단풍이 펼쳐지더군요. 나무가 생을 다할 때 저토록 아름답게 불타버리다니 여한이 없겠다 싶네요. 지칠 때마다 찬탄할 수 있는 단풍나무 등장으로 다시 힘을 내요.
10년 이상 산을 오른 우리도 정상 오르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네요. 숨이 턱턱 차올라요. 삶이나 산에서나 정상은 쉽게 오를 수 없나 봐요. 하긴 정상이 쉬우면 누구나 오를 수 있으니 매력 없겠지요. 힘들고 어려우니 정상을 정복한 쾌감이 더 크게 다가올 거라 생각해요. 난도가 극한 구간에서는 서너 번 발길을 멈춰 체력 보충하며 천천히 올라요. 무리하면 안 되니까요. 힘들고 어려운 길일수록 자신의 속도를 감안하며 올라야 해요. 그래야 쉽게 지치지 않거든요. 앞서가는 이의 속도만 보고 걷다 보면 방전되기 십상이니까요. 삶도 그렇잖아요. 위만 바라보고 가다 보면 쉽게 지치고 좌절하기 십상이잖아요. 본인의 속도를 안다는 게 산에서도 삶에서도 중요해요. 산을 오르면서 늘 생각해요. 산과 인생이 많이 닮았다는 것을요.
왁자지껄 등산객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정상이 가까워진 모앙이에요. 5시간 걸어 세석평전 대피소에 도착했어요. 먼저 온 등산객들이 지리산 정상 풍경을 뒤로하고 점심을 먹고 있네요. 그들이 앉아있는 배경으로 지리산 정상이 펼쳐지는데 구름 낀 하늘이 작품이네요. 우리도 그들 틈에 끼어 점심 먹고 잠깐 휴식을 취했지요. 날씨가 흐렸지만 전혀 문제 되지 않아요. 흐린 풍경도 언제나 볼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오늘이니까 볼 수 있는 근사한 풍경이라 생각해요. 행복해요. 100대 명산 오르기 목표였던 지리산을 정복했다는 뿌듯함과 지리산 아름다운 풍경에 빠져 다른 무언가가 낄 틈이 없어요. 이거면 충분해요.
지리산은 산이 깊어 아름다운 계곡이 많은 산이예요. 계곡이 맑고 아름다워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사진을 찍으려 자주 멈췄어요. 단풍이 진하고 아름다워 등반하면서 몇 번이나 탄성을 질렀는지 몰라요. 지리산 매력에 중독되어 덕분에 가을을 지리산에서 보냈어요. 지리산은 치명적인 매력으로 사람을 홀리는 산이거든요. 한번 빠지면 쉽게 빠져나올 수 없는 지리산 덕분에 신성(神聖)에 참여한 가을이었어요.
"당신도 떠나볼래요. 가을이 당신 곁을 떠나기 전에 말이에요."
(2019. 10.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