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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옥 Aug 21. 2021

문이 닫힐 때 또 다른 문이 열려요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


문이 닫힐 때면 나머지 세상이 열린다는 역설이다. 우리는 닫힌 문을 두드리는 걸 그만두고 돌아서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뒤쪽에 있는 다른 문에 다다른다. 그러면 넓은 인생이 우리 영혼 앞에 활짝 열려 있다. 문이 닫히면 방안에 들어갈 수 없지만, 그것은 곧 그 공간을 제외한 다른 현실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는 뜻이다.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




"삶이 왜 이리 힘들죠?"

누군가에게 따지고 싶은 심정이다.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산더미다. 방법이 보이지 않아 답답함이 목구멍까지 차 올랐다. 풀어야 할 문제들을 보면 턱턱 숨이 막힌다. 이러다 금방이라도 무너지는 건 아니지 싶을 정도로 두렵다.

"아, 떠나고 싶다."

뱉어낸 말은 기어이 떠나야겠다는 의지였다. 결국, 떠났다.





성주 무흘구곡과 합천 해인사 여행을 위해 일행과 함께 차에 오른다. 첫 번째 여행지인 무흘구곡으로 가는 도중 차창 밖으로 낯선 석탑이 눈에 들어온다. 문화재에 대한 지식이 빈약해 허허들판에 덩그러니 서있는 석탑이 생뚱맞다 생각했다. 석탑에 대한 감흥보다는 석탑 뒤에 펼쳐진 천하명산인 가야산 전경에 마음을 흠뻑 빼앗긴 상황이. 두어 번 올라본 가야산의 황홀한 풍경을 잊을 수 없었기에.



01. 무흘구곡


20여 분을 달려 무흘구곡에 도착했다. 영하의 날씨답게 차에서 내리자 바람이 칼날 같다. 장갑 끼고 옷깃을 여민 후 무흘구곡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차가운 날씨로 계곡이 얼어 있어 걸어 입암까지 간다. 계곡 옆으로 가파르게 서있는 선바위(입암)가 범상치 않다. 서 있는 폼이 선비의 기개 같다 생각했다. 무흘구곡의 아홉 굽이는 제1곡 봉비암, 제2곡 한강대, 제3곡 무학정, 제4곡 입암, 제5곡 사인암, 제6곡 옥류동 제7곡 만원달, 제8곡 와룡암, 제9곡 용추다. 그중 우리가 처음으로 맞은 여행지가 제4곡이 입암이다. 꽝꽝 언 계곡에서 우린 잠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 모든 걸 잊고 얼음을 탔다. 잠깐의 동심이 앞으로 전개될 여행의 흥미를 증폭시켰다. 추위에 코끝이 빨개질 즈음 두 번째 여행지인 회연서원으로 향한다.

  




02. 회연서원


조선 선조 때 학자이며 문신이었던 한강 정구를 모신 회연서원에 들러 서원의 문화적 위치와 한강 정구의 생애를 살폈다. 서원 입구에 400년이 넘는 느티나무의 모습에 걸음을 멈춘다. 잎이 파릇하게 핀 봄에 다시 와 회원서원 앞 백매화와 함께 봤다면 지금처럼 쓸쓸하지 않겠지 싶다. 회연서원에 들어가 한강 정구의 삶과 제자들의 이야기를 들은 후 구흘구곡 제1곡 봉비암을 오른다. 계단을 오르는 동안 매서운 바람이 거세게 불어왔다. 봉비암의 표지석을 살펴보고 얼어있는 대가천을 뒤로하고 해인사로 차를 돌린다.




회연서원





03. 해인사


해인사 창건의 참뜻은 '해인'에 응집되어 있다. 해인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 진실된 지혜의 눈으로 바라본 세계, 객관적인 사상의 세계'다. 그동안 두어 번 해인사에 들렀지만 등산을 위한 여행이었던 터라 해인사 의미에 관심 두지 않았다. 해인의 뜻을 알고 가장 중요한 가치를 여행에서 놓쳤구나 싶었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게 여행이다.



해인사 전경



'마음의 번뇌 망상이 비로소 멈출 때 우주의 갖가지 참된 모습이 그대로 물속에 비치는 경지가 해인삼매'다. 의미를 알고 해인사의 일주문을 오르자 전과 다른 경건함이 생긴다. 마음을 비우며 계단을 오르는데 집중하자 탁 트인 절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마치 영화의 클라이맥스처럼 극적인 효과를 보여주기 위함과 경건함을 보여주기 위한 건축양식이다.



절 안으로 들어서자 법당인 대적광전이 보인다. 칼날 같은 날씨에 덜덜 몸이 떨린다. 해인사 관련 이야기를 듣는데 집중되지 않을 만큼 혹독한 날씨다. 그때였다. 살짝 올라간 지붕돌 추녀 끝에 매달린 풍경이 바람 따라 움직인다. 바람소리와 함께 조용했던 절 마당에 풍경 소리가 울려 퍼진다. 따뜻한 대적광전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일순간 사라질 만큼 황홀한 소리다. 풍경 소리에 푹 빠져 복잡했던 마음이 일순간 조용해진다. 해인의 뜻처럼 일체의 번뇌 망상이 종소리와 함께 사라진다. '또 살아지겠지.' 종소리를 들으면서 생각했다.



해인사 삼층석탑




일행과 함께 대적광전 안으로 들어간다. 일행은 약속이나 한 듯 각자 자리를 정하고 절을 올리기 시작한다. 일행의 모습이 비로자나불 모습과 겹쳐진다. 그들이 차가운 바닥에 무릎 꿇으면서 간절하게 비는 마음이 무엇일까? 생각한다. 누구나 말하지 못한 문제를 마음속에 품고 산다. 여행을 떠나오기 전 답답한 마음에 어쩌지 못하고 울었다. 이럴 수 없다며 닫힌 문 앞에서 원망 가득한 주먹을 휘둘렀다. 아무리 두드려도 한 번 닫힌 문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후회해도 원망해도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럼에도 닫힌 문 앞에서 원망과 자책으로 울부짖으며 보낸 시간이다. 열리지 않는 문 앞에 서있는 건 고통이다.






04. 성수사지 삼층석탑


여행의 마지막 종착지는 성주 법수사지 삼층석탑이다. 여행이 끝자락을 향해 달려가며 일몰이 시작되는 시간이다. 해가 저물어 서쪽으로 넘어가면서 뚜렷했던 세상이 어둠 속으로 서서히 묻히기 시작한다. 어둠이 내려앉은 순간 차에서 내려 법수사지 삼층석탑으로 향한다. 법수사지 삼층석탑은 성주군 수륜면 법수사 절터에 남아있는 통일신라 석탑으로 보물 제1656호다. 사찰 법수사는 폐사되고 터만 남았고 절이 사라진 빈터에 덩그러니 남아있는 법수사지 삼층석탑이다. 법수사가 신라 애장왕(800~809)때 세워졌다고 하니 홀로 1200년이 넘게 시간을 견뎌낸 셈이다.




성주 법수사지 삼층석탑




해가 저물기 시작한 하늘이 푸르스름 빛을 잃어가면서 붉어지기 시작한다. 세상이 어두워지자 눈썹 같은 초승달이 법수사지 삼층석탑을 비춘다. 세상이 어두워질수록 선명해지는 달이다. 달빛은 깨진 추녀를 비추고 탑의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로 내려앉는다. 달빛이 선명해질수록 탑 모양만 남고 나머지는 어둠에 지워지기 시작한다. 마치 1200년에 지어진 법수사가 사라진 것처럼 조금씩 주위가 어둠에 묻힌다. 초승달이 내려앉은 석탑이 사랑하는 이들을 다 떠나보낸 후 홀로 노년을 견뎌야 하는 고독한 노인의 삶 같다.




어둠에 묻힌 법수사지 삼층석탑



석탑이 완전히 어둠 속에 묻히면 이번 여행도 끝이 나고 우리는 헤어져 번뇌 가득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살다 보면 힘든 날이 시시때때로 찾아올 것이다. 눈물 흘릴 날도 만나고, 이별의 아픔을 겪여야 하고, 원망 가득한 일도 만난다. 가슴에 덴 아픔으로 눈앞이 캄캄해지는 분노도 맞닥뜨려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삶을 이어가야 한다. 힘들더라도 닫힌 문 너머에는 과거와 다른 새로운 세상이 열려 있으니 절망하지 않도록 당부한다. 밝음이 언제나 존재하지 않듯 어둠도 사라진. 어둠 속 달이 선명해지듯 힘들 때일수록 지혜를 발휘해 어둠을 밝히면 된다.



"길이 닫힐 때면 불가능을 인정하고 그것이 주는 가르침을 발견해야 한다(p.99)"








열리지 않음에 대한 내 걱정, 그 걱정 때문에 나는 계속 닫힌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그 걱정에 가려 숨겨진 비밀을 보지 못했다. 나는 이미 내 새로운 인생의 땅을 딛고 서 있었고 내 여행의 다음 행보를 내딛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저 몸을 돌려 내 앞에 놓인 풍경을 보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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