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종옥 Aug 31. 2022

호캉스 대신 집캉스



올해 여름휴가 계획을 딱히 세우지 않았다. 아니 세울 수 없었다는 게 맞다.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인 부분 때문이었다. 남편 회사가 일이 없어 휴가 기간이 2주나 되었고 7월 한 달 내내 4시에 퇴근하면서 그동안 받았던 월급의 3분의 1이 삭감되었다. 경제적인 타격이 커 이번 휴가는 집에서 보내자 우린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경제적인 여건이 충족된다고 해도 7개월 동안 괴롭혔던 발목 부상으로 떠날 수 없는 상황이긴 했다. 남편에게 집에만 있는 것도 괜찮다고 했지만 아쉬움은 남았다.



남편은 휴가를 떠나지 못함이 미안했던지 최고의 여름휴가를 만들어주겠다 큰소리다. 휴가 동안 손 하나 까딱하지 않게 해 주겠단다. 기대하겠다며 소파에 앉아 신문을 펼치는데 휴가 첫날 아침부터 그가 분주하다. 콩과 감자를 좋아하는 나를 위해 콩밥을 짓고 감자된장찌개를 끓일 준비에 여념이 없다. 이내 부엌에서 허기를 자극한 구수한 밥내와 된장국 냄새가 퍼졌다. 아침밥을 먹지 않아도 된다며 큰소리치던 나는 어디로 가고 금세 배가 고파졌다. 잠시 후 그가 조촐하지만 정성 가득한 아침상을 차려 불렀다. 식사를 마치고 상 치우는 걸 도와주려는 나에게 그는 손사래를 쳤다. 못 이긴 척 소파에 앉아 책을 펼쳤다.



책을 읽다 잠깐 졸았다고 생각했는데 운동 다녀온 그가 저녁 준비로 분주하다. 저녁상을 세팅한 후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힘이 가득이다. 저녁상에는 미역국, 고등어조림, 삼겹살로 한상 가득하다. 그가 끓인 미역국을 뜨면서 '미쳤다'라며 탄성을 질렀다. 뚝딱 미역국 두 그릇을 해치우고 나서는 비법을 물었다. 그가 뿌듯한 표정으로 '정성'이라 말했다. 그 말에 반박할 수 없는 건 음식을 대하는 그의 태도 때문이다. 그는 재료 준비부터 정성을 다한다. 정석대로 빈틈없이 재료를 준비하고 타이밍을 맞춘다. 그는 음식 만들기 전 먼저 공부부터 했다. 기본을 배운 다음 자신만의 비법을 취하자 음식 맛이 날로 좋아졌다. 뒤늦게 배운 음식 솜씨가 이제는 27년 동안 주부였던 나보다 월등하다. 



그와 반대로 나는 기존 방식대로 음식을 만들었고, 맛이 없어도 딱히 배우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음식 솜씨는 타고난 거라며 타박하지 말 것을 바탕에 두고 큰 소릴 쳤다. 똑같은 재료로 같은 음식을 만들었지만 차이가 난 것은 배움을 취해 실천한 자와 실천하지 않는 차이였다. 세상의 지식과 정보는 방대하지만 취하지 않고 실천하지 않으면 내 것이 될 수 없다. 남편이 차려준 밥상을 받으면서 음식을 제대로 공부하는 그의 태도에 경의를 표현했다. 그에 비해 나는 지식을 공부한다고 소리만 요란하지 않았나 움찔했다.



기분 좋은 배부름을 안고 우린 걷기 위해 산책길로 향했다. 발목 부상으로 열망하던 걷기를 7개월 동안 하지 못했다며 속상함을 털어놓았다. 잠깐 생각을 바꿔보니 이렇게라도 걸을 수 있음에 감사함이 일었다. 30분 넘게 벚나무 터널 산책길을 걸으며 몇 년 전 경주에서 휴가를 보냈던 시간이 떠올랐다. 그 순간 휴가에 대한 미련이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었다. 생각을 멈추기 위해 남편 손을 잡고 "지금 걷고 있는 이곳이 경주라 생각해. 우린 지금 경주에 와서 보문단지를 걷고 있는 거야." 내 말을 들은 남편은 "이런 신랑이 어딨노? 아내 위해 일주일 내내 음식 해주고, 그것도 모자라 순식간에 경주도 데려오고 말이지."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말도 안 된다며 깔깔거렸지만 부정할 순 없었다.



30분만 걷자 계획했던 시간이 훌쩍 배가 되어 한 시간 넘게 걸었다. 마음 같아서는 더 걷고 싶었으나 발목 통증이 심해져 걷기를 멈췄다. 집에 돌아와 시원한 물로 샤워 후 우린 식탁에 마주 앉았다. 그는 안주로 토마토를 씻고 황태를 전자레인지에 돌리더니 냉장고에서 차가운 맥주를 꺼내 왔다. 내가 애정하는 컵을 골라 맥주를 따라주고 건배를 제의했다. 시원한 맥주가 식도를 따라 위장까지 내려가자 "캬!" 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오늘따라 맥주가 달다. 몇 잔을 기울였을까? 술기운에 기분이 알딸딸해졌다. 호캉스도 해외여행도 부럽지 않으며 우리끼리 보낸 집캉스가 백 배 좋다며 중얼거렸다. '설마 이렇게 행복한 게 술기운 탓만은 아니겠지?'




매거진의 이전글 라면을 끓이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