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르륵차르륵 아침 일찍 일어난 남편이 베란다 블라인드 올리는 소리가 들린다. 동시에 조금 더 누워있을까 싶었던 마음을 접었다. 거실로 나와 뜨거운 물과 찬물을 섞어 마시고 소파에 앉아 어제 읽다 둔 책장을 열었다. 남편도 책상에 앉아 어제 읽던 김훈의 『라면을 끓이며』을 펼친다. 휴가 중 시간 날 때마다 읽던 책이 끝이 보인다. 그에게 "재미있어?"라고 묻자
"책은 재미로 읽는 게 아니라 마음의 양식을 쌓기 위해서 읽는 거야."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힘이 잔뜩 들어간 채다. 내가 잔소리처럼 그에게 했던 말이기도 했다.
함께 책 읽는 부부가 되고 싶은 로망이 있었다. '부부가 같은 공간에서 독서하며 책에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는 게 꿈이다'라고 지나가는 소리로 몇 번 이야길 했다. 그때마다 남편은 별 반응이 없었다. 남편은 퇴근하거나 휴일이면 핸드폰에 깔린 당구나 게임, 때론 <한국기행>이나 먹방, 낚시 프로그램을 보면서 시간을 때웠다. 처음에는 그가 게임에 쓴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했다. 아까운 시간을 게임으로 낭비하기엔 비효율적이라고 그에게 잔소리도 했지만 어느 순간 중단했다. 그의 여가 시간을 내 방식대로 채우려고 하는 건 독단과 아집임을 알고 나서다. 회사일로 지친 그가 퇴근 후 편안한 시간을 즐길 권리가 있으니 말이다. 함께 책 읽는 꿈을 중도에 포기한 건 남편은 시켜서 하는 것보다 마음이 움직여야 실천하는 사람임을 알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기다려줘야 할 사람이지 재촉하면 달아나는 사람이었다.
어찌 된 일인지 책을 읽지 않을 것 같던 그가 어느 날부터 책을 들고 책상에 앉았다. 몇 페이지 읽다 던져둔 책이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완독 한 후 재독도 마다하지 않는다. 세 번이나 다시 읽은 책도 생겼다. 반백의 남편이 책상에 앉아 책장을 넘기는 모습이 낯설지만 근사했다. 조용한 집안에 그가 넘긴 책장 소리가 낮게 들리는데 그 소리가 좋다. 집중하며 독서하는 그를 향해 멋있다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신랑 멋있지?" 맞장구쳤다.
"난 책 읽는 남자 좋아해." "부부가 함께 책 읽는 풍경이 소원이었어. 꿈이 이뤄졌네."
이때다 싶게 맘속의 말들을 맘껏 쏟아냈다.
2시간이 훌쩍 넘어 그가 마지막 책장을 덮었다. 들뜬 마음으로 "어떤 점이 가장 기억에 남아?" 대답을 기대하며 침을 꼴깍 삼켰다.
"머릿속에 살아있는 뭔가 있어. 기억을 지워버리는 벌레인가 봐. 글을 읽고 나면 따라다니면서 지워 버린다니까. 한 줄 읽고 있으면 한 줄을, 두 줄 읽고 있으면 두 줄이 지워져. 마지막 책장을 덮었는데 남는 게 없어."
빵 터진 웃음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숨을 돌리고 위로의 말을 전했다.
"그동안 뇌를 쓰지 않아 녹이 슬어서 그럴 거야. 녹이 벗겨지고 기름칠이 칠해지면 그 벌레라는 놈도 도망갈 거야. 나도 그랬거든."
편안해진 얼굴로 책장을 덮는 그에게 다가가 나지막하게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도 당신만큼은 아니었어."
『라면을 끓이며』을 다시 책장에 꽂아 놓은 후 그가 향한 곳이 부엌이다. 부엌에서 물소리가 나고 뒤이어 들리는 경쾌한 도마 소리가 들린다. 그는 북어와 무를 참기름에 달달 볶은 후 다시마를 넣고 다시 한소끔 끓인 후 물이 끓고 나자 면을 넣었다. 그런데 말이다. 음식을 만들 때 그의 표정은 무척 진지하다. 그 표정을 보고 있으면 심각해서 웃음이 터지곤 했다. 라면이 끓기 시작하자 라면 냄새가 거실 가득이다. 갑자기 식욕이 돋았다. 그럼에도 오늘도 라면이냐며 살짝 투정을 섞었다.
"『라면을 끓이며』를 읽었으니 라면을 끓이는 게 당연한 순서지. 독서 후 실천이 중요하니까."
밥상이 차려지고 라면 맛이 어떠냐고 묻는 그에게 이 세상 맛이 아니라며 감탄했다. 배가 부르자 기분 좋음이 나른하게 내려앉았다. 소파에 눕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지려 하자 그를 불렀다.
"마음의 양식도 배부름도 양껏 채웠으니 우리 걸으러 갈까?"
걸으며 그와 함께 책 이야기를 나눌 생각을 하자 신이 났다. 지워진 내용으로 가능할지 모르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