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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박 Apr 21. 2020

퇴사 D-98 : 흡연장 피카레스크

3.

담배를 피우든 피우지 않든 회사일과 흡연장은 무관계하지 않다.

오고 가는 가십과 루머 속에 은근히 묵직한 정보가 숨겨져 있곤 하기 때문이다.


믿기 어렵지만 2000년대 초반까지 우리 회사 사무실에서는 담배연기가 종종 자욱했다고 한다.

특히 서울 본사가 아닌 지방 공장 사업장들의 사무실은 흡연장과 구분이 없는 곳이었다고 한다.


비흡연자인 나에게는 언제나 흡연자와의 친분은 고역이었다.

냄새에 민감하며 코가 약해 재채기를 자주 하기 때문에 자욱한 담배연기는 내게 쥐약이었다.

그럼에도 군 시절 고된 훈련이나 작업 사이에 담배 브레이크는 나조차도 "흡연자가 있어 다행이다"라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회사에서도 그 사실은 변함이 없다.


남초 회사에 다녔던 것도 있고, 신입사원으로서 자주 받는 질문은 "너 담배 피워?"였다.

물론 피우진 않았지만, 나는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연기는 싫지만 얘기에서 빠지는 것이 더 싫었다.

그도 그럴 것이, 흡연장은 하마평의 집결장소이기 때문이다.


회식 같은 술자리는 그것이 1대 1이거나 4인 이하의 작은 그룹이 아니면 사실 누군가의 '뒷담화'나 인물평을 섣불리 의제에 올려놓기가 쉽지 않다. 보통은 공공의 적에 대한 비판과 직장생활에 대한 넋두리로 서로를 달래주는 것이 정석이다.

공식 회식에서야 뭐, 상급자의 무용담이나 조언을 가장한 일장연설을 리액션 좋게 받아주면 그만이다.


흡연장은 오픈된 공간이면서도 폐쇄된 공간이라는 모순적이지만 유니크한 특성을 지닌다.

삼삼오오의 소그룹으로 나뉘고 그룹과 그룹 사이에는 철저한 배타성으로 벽을 세운다.

그리고 "여기에서만 하는 얘기인데" 라며 비밀 얘기가 제철 어장처럼 활기차게 약동한다.

사원이나 대리 정도 낮은 직급이 사람들이야 복덕방 분위기가 연출되지만,

최악은 따로 있다.


바로 담배를 피우는 팀장이나 임원들의 존재다.

평가권과 인사권을 가진 이들이 담배를 갓배운 중고생마냥 삼삼오오 모여내려 가서

거의 비슷한 토픽으로 대화를 나눈다. 물론 일상 대화나 연예계 얘기 정치 이슈 등 주제야 다양하겠지만,

행여나 부하들의 인물평이나 조직의 방향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가 재앙이다.


순기능보다는 역기능이 훨씬 많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결국 조직의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조직 내의 하마평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결국 주관적인 의견이나 편견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흡연자 A가 말한 "누가 일을 못한다더라" "그 사람은 인성이 별로더라"라는 이야기를 팀장이나 임원이 들으면

흡연장의 묘하게 은밀한 분위기가 마치 5공시절 대공분실 내 밀담과 같은 분위기를 풍기면서

임원이나 팀장에게 "정말 그런가 보다"라는 사고를 주입시키게 된다.


2020년대 현재 조직에서 흡연자는 그 비중을 점점 잃고 있다.

2018년 대한민국 사회 전체의 흡연자는 5명당 1명 꼴인데,

회사의 특성을 고려해보았을 때 그것보다 훨씬 적을 것으로 보인다.


단지 담배를 피운다는 이유만으로 흡연자인 인사권자에게 사적인 이야기를 더 효과적으로 나눌 수 있고,

그것이 실제로 시나브로 조직의 방향성과 인물평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할까?


그렇기 때문에 98일 뒤 나는 퇴사할 것이다.


애써 흡연장을 따라다녔던 신입사원 시절의 나를 떠올려보면,

까까머리에 군복을 입고 선임의 흡연장을 쫓아가서 (원치 않는) 조언을 듣고 (듣기 싫은) 뒷담화를 들었던 군 시절에 비해 어떠한 변화나 진보도 없던 것 같아 그저 마음이 아플 뿐이다.


나는 규칙만 지킨다면 흡연자에게도 자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니까.

자기 돈을 내고 자기가 담배를 사서 지정된 장소에 가서 흡연하겠다는 사람을 뭐라 할 생각은 없다.

내가 비판하고 싶은 것은 결국 문화다.

흡연장에서 나눌 수 있는 이야기는 회의실에서나 면담 중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주제가 99.9% 일 것이다.

흡연장에서는 친구들과 이야기 나누듯 가족, 세상, 연예인, 관심사 등 정말 나눌 이야기가 많다.


"종박 씨는 담배를 안 피워서 진솔한 이야기를 할 기회가 없네~"라고 능글맞은 뱀의 얼굴로 미소 짓던 그 임원의 얼굴이 아직도 뇌리에 화상처럼 박혀있다. 코를 찌르는 담배냄새는 덤.


종박의 퇴사까지 앞으로

D-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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