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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박 Apr 21. 2020

퇴사 D-99 : 회사 돈은 내 돈이 아니다

2. 

회사 돈은 내 돈이 아니기 때문에 감히 낭비해서는 안 되지만

사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애써 아낄 필요도 전혀 없다. 


기획실에 있다 보면 많이 접하는 것이 회사과 관련된 다양한 숫자들이다.

공장 수 직원 수 이번 달 매출액 손익 등등 다양한 수치들이 컴퓨터 화면을 횡단 종단한다.

특히 돈에 관련된 것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수십억 쯤은 굉장히 작은 지출로 느껴질 정도로

기업이 벌고 쓰는 돈의 액수란 것은 개인의 현실감각을 마비시킬 정도로 단위가 큰 것이다.


종종 경영 위기시에 직원을 해고하지 않고 다 같이 일하는 시간과 월급을 줄여서 생존에도 성공하고 조직의 결속력과 상호존중의 문화를 돈독히 했다는 비즈니스 케이스들을 읽는다.

나도 그것에는 크게 찬성하며 기업이란 것은 결국 고객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임직원들을 위해 존재한다는 나의 믿음에도 부합하는 사례이다.


그러나 과하게 회사 돈과 자신의 돈을 직결시켜 인지하고 있는 태도에 대해서는 비판을 아끼고 싶지 않다.

회사 돈은 내 돈이 아니다. 회사 돈은 회사의 것이다.


나는 2018년 즈음부터 2년 넘게 회사 예산의 일부 계정을 관리한 경험이 있다.

주로 전문 연구기관이나 언론매체의 유료기사나 보고서, 때로는 통계수치를 열람할 수 있는 서비스에 대한 모든 구독 예산(Subscription Budget)을 관리하는 역할이었다.

즉 내가 1년에 받아가는 연봉보다 10배, 20배가 넘는 돈을 관리했다는 뜻이다.


공공기관이 아니고서야 S경제연구소 건 P경영연구소 건 임직원이 있을 것이고, 

그들도 식구들 월급을 챙겨줘야 한다. 

그러니 구독료라는 주 수입원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며 어떻게 해야 구독자를 유지하고 구독료를 인상할 지보다 중요한 미션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한 그들의 자연스러운 의도는 나에게 있어서는 재앙과도 같은 협상 과제이자 임무로 다가왔다.


위에서 말했듯 내 돈이 아니기에 실은 그냥 쿨하게 인상분만큼 구독료를 펑펑 퍼주어도 된다. 내 돈도 아닌데?

그러나 우리 회사의 어떤 고용인이건 이 글을 읽는 어떤 독자이건 간에 그렇게 쉽게 퍼줄 수 없다는 것은 직관적으로 느끼고 인지할 수 있을 것이다. 

빵집이나 편의점 알바도 그 가게에서 파는 물건이 전혀 자기 것이 아니란 것을 알면서도 누가 돈도 안 내고 집어가려고 들거나 돈을 적게 냈을 경우 그것을 제지할 수밖에 없는 처지이지 않은가? 나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나는 2019년 즈음, 구독료 인상 요구에 3달간 싱가포르 쪽과 실랑이를 벌인 결과

요구 액의 73%가량을 감면하고 우리나라 돈으로 약 5억 원을 아낀 성과를 냈다.

그러나 이 5억 원이 내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결국 27%는 인상분으로서 지출이 되었으니

딱히 칭찬받을 일도 아니었다. 실제로 수고했다 정도를 한두 명 선배가 얘기해줬을 뿐 크게 칭찬받거나 표창받거나 하지도 않았다. 

비슷한 일들이 전사에서 일어날 것이다. 공장 설비가 고장 나서 수억 원을 날릴 뻔한 것을 제때에 해결해서 미연에 방지한 사원, 제품에 대한 클레임을 뛰어난 말솜씨로 무마하여 수억 원을 세이브한 대리, 이런 사연들은 전사를 뒤지면 매달 수십 건씩은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흔하다. 나는 그들을 숨은 영웅들이라 생각하며 진짜 경영의 최전선에서 노력하는 전사들이라고 생각하며 존경한다.


그러나 나도 물론이고, 그들이 한 달에 집어가는 돈은 많아야 300만 원 안팎이다. 

물론 문제를 해결했을 때의 성취감과 난처한 협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짓는 과정에서 얻는 경험과 역량 성장의 기회는 돈으로는 감히 환산할 수 없는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고도 말할 수 있다.

결국 받아들이는 사람의 생각하기 나름이다. 경험을 소중히 하고 만족하며 분수에 맞는 월급을 챙겨가는 것에 안도하는 삶은 충분히 훌륭하며 그런 일꾼들이 있기에 회사와 나라 경제가 지탱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아니다. 

나는 여전히 이 주종관계가 싫다. 

'회사를 위해 당연한 일'이라고 치부되는 것도 싫다.

10만 원 낼 뻔한 세금을 깎아서 만원을 내는 것이 훨씬 좋다. 회사가 낼 뻔한 50억 원의 비용을 1억 원으로 줄여냈을 때의 성취감보다 훨씬 "나의 일"일뿐더러, 그 49억 원의 0.00001%라도 내게 보너스로 줄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99일 뒤 나는 퇴사할 것이다.

나는 법카를 들고 개인적 낭비와 사치에 쓰는 사람도 싫지만,

회사의 나팔수가 되어서 비용절감에 목숨 거는 몇몇 직원들도 이해할 수 없다.

자꾸 돈돈, 회사를 돈 때문에 다니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그럼 당신은요?"라고 되물어줄 뿐이다.

100% 돈 때문에 다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모두가 100% 돈으로부터 자유롭게 회사원으로서 살아간다고는 입이 찢어져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종박의 퇴사까지 앞으로

D-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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