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까지 앞으로 100일
1.
박 대리라고 불리는 것은 생각보다 시시하고 따분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군 시절 이등병에서 일병이 됐을 때의 기쁨만도 못했다.
내가 다니는 회사는 보통 4년을 채우면 대리로 진급하게 된다.
가뭄에 콩 나듯 조기 진급도 있고
콩밥을 싫어하는 초등학생들 만큼 누락자들이 많이 있다.
더 열 받는 부분은 여름에 입사한 사람은, 그다음 해 1월부터 근속연수를 카운트한다는 점이다.
즉 2015년 7월에 입사한 나는 2016년 1월부터 "1년 차" 취급을 받기 때문에
사실상 대리를 달려면 4년 6개월을 다녀야 했다는 뜻이다.
2016년 1월에 입사한 친구들은 나를 선배님이라 불렀지만, 실은 같은 시기에 진급 평가를 받는 동기나 다름없었다.
컵라면이 딱딱해도 씹어먹을 정도로 성격이 급한 나로서는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해낸 방법이 빠르게 인정받아 "조기진급"하는 것이었다.
사례가 없는 것도 아니고 조기진급을 하는 데에 한국형 스티브 잡스급의 업무능력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시험 성적으로 따지면 올백이 아니라 평균 85점 이상 정도만 꾸준히 기록해도
비벼볼 만한 목표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진급하는 것은 유능함의 증명은 아니다.
다만 말할 수 있는 것은 사내에서 불운하지 않음에 대한 확실한 증명은 된다는 것이다.
시험이야 내가 열심히 공부하는 것에 어느 정도 비례한 성적표가 나오며 그에 준한 석차가 도출된다.
회사에서의 진급은 전혀 다르다. 변수가 월등히 많다. 그것도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외생변수들로 가득하다.
그래서 3년 6개월 만의 진급은 실패했다. 정말 100점까지 딱 2점 모자란 수준이었다.
당시 '뱀'이라 불렸던 임원은 우리 부서에 있던 내 선배가 수차례 진급 낙방한 것을 가엾게 여겼는지
최고 평점의 인사고과를 주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회사는 휴머니즘으로 운영되는 곳이 아니다. 경쟁이 도사리고 있고 생존을 위해 개인도 조직도 모두 인간성을 어느 정도는 상실하고 있는 곳임을 내가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저렇게는 되지 말아야지'했을 정도로 무능하고 게으른 선배가
단지 불쌍하다는 이유로 보너스 10점이 아닌 보너스 100점을 받는 광경을 목도하였다.
나는 이것을 뒤틀린 휴머니즘(Distorted Humanism)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평소에는 발휘도 안 되다가 갑자기 필요하게 됐을 때 나타나는 끔찍한 녀석이다.
2020년 1월, 나는 조기진급도 진급 누락도 하지 않은 채로 평범하게 제 때 "박 대리"가 되었다.
그나마도 2019년부터 5개였던 직급을 2개로 통합해버리는 바람에 호칭도 바뀌지 않게 되어 더욱
진급의 기쁨은 비가시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이런 것을 위하여 나는 지금까지 노력해왔는가? 불안해하며 눈치를 살피고 스스로를 억눌러왔던가?
1원도 더 주지 않는 조기출근과 야근을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해왔는가?
그리고 한층 더 무서운 것은, 그럼 이제 "과장님"소리를 듣기 위해 앞으로 또 4년... 혹은 그 이상을
이것보다 더한 중압감과 기대감을 받으면서 일해야 하냐는 막막함이었다.
그래, 난 어릴 적부터 RPG 게임을 잘 못했다.
애초에 게임을 못하는 것도 있지만 실은 레벨 20을 찍었을 때의 기쁨보다, 다음 레벨 21을 찍기 위해 열심히 사냥터를 돌며 반복적으로 퀘스트를 수행하고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막막함을 버티질 못했다.
진급은 기쁘다. 솔직히 월급도 늘어난다.
주변의 축하는 물론, 무엇보다도 부모님들이 꽤 자랑스러워해 주신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욕심이 컸던 만큼 기대가 컸으며 그 기대를 충족시켜줄 만한 기쁨이 동반되지는 않는다.
기대감은 마치 웅덩이와도 같아서 그만큼 기쁨이나 성취감이라는 물을 채워주지 못하면
휑한 느낌, 공허함, 허전함은 피할 수 없다.
목표가 있는 인간은 성공에 가까워지기 쉬우며 목표가 구체적일수록 그 속도도 빨라진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경영학 전문가들이 쉽게 놓치는 것은
그렇게 성공한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이다. 무언가를 달성한 순간 얼마나 기뻤는가 얼마나 보람찼는가를 물었어야 한다.
목표가 어렵고 거창할수록 의미와 성취감도 클 것이다. 남들도 다 하는 것 내가 해내 봤자 엄청 기쁘지는 않을 테니까. 그러나 그만큼 노력도 시간도 재능도 더 많이 요구된다. 결국 자기 선택이다.
그렇기 때문에 100일 뒤 나는 퇴사할 것이다.
그 출발점은 결국 직장생활의 대표적인 보람 중 하나인 '진급'의 신기루에 이끌려 사무실이란 사막을 헥헥대며 걸었던 내가, 결국 오아시스라는 파라다이스가 아닌, 작은 생수병 한 통 정도가 놓여있는 것에 실망했기 때문이다.
인간성을 간직하라. 대리가 되든 과장이 되든, 상무가 되든 전무가 되든, 계급이 당신의 도덕적 우위나 유능함의 증명을 해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매일 하루하루 성장하거나 동료들을 돕는 것에서 나는 나의 인격적 성장과 업무능력의 발전을 느꼈다.
2019년 12월 31일까지 사원이었던 내가 2020년 1월 1일에 대리가 되었다고 해서 갑자기 가치가 월 60만 원 더 높은 인간이 되어버린 것이 아니지 않은가. 직장생활은 캐릭터가 번쩍 하면서 레벨업 알림이 머리 위에 떠오르는 RPG 게임이 아니다.
만족과 감사함을 모르는 건방진 대리라고 불러도 좋다.
나는 내가 이미 충분한 만족과 감사를 느꼈다고 생각한다.
차라리 겁쟁이라 불러주길 바란다. 다음 4년, 그다음 5년, 또 그다음 n 년을 이렇게 보내고 싶지 않아 퇴사를 결심한 겁쟁이니까 말이다.
종박의 퇴사까지 앞으로
D-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