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장단이 바뀌고 지침이 변하고 지시가 오락가락하는 것보다 화나는 일은 없다.
오피스 내에서 나의 업무시간과 노력이 단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거나
혹은 믿고 있던 가치관에 큰 혼란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이는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첫 번째는 유명한 용어인 내로남불형(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두 번째는 내가언제형 이다.
두 유형 모두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분노와 수명 단축을 유발한다.
법인카드로 사탕 하나 잘못 사 먹어도 욕을 한 트럭 먹는 것은 사원에게 비일비재 하지만,
법인카드로 화장품도 사고 위스키도 사는 임원은 '업무상'이라는 큰 가림막에 가려 눈에 띄지도 않는다.
어쩔 수 없다. 임원이 하면 로맨스고 사원이 하면 불륜이니까.
내로남불형은 사실 직급에 비례하여 나타난다. 때로는 상대적일 때도 있다.
내로남불을 하는 부장은 어딘가에 가서 임원에게 내로남불을 당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이는 직장의 일하는 방식이나 고유의 문화가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슬프다. 직장 내에서 한 개인의 행동은 결국 스스로의 타고난 성격도 있지만 큰 부분이 조직의 행동양식과 문화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군대문화가 있는 한국이어서 그런가?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계급사회는 수천수만 년 전에도 있었고,
때문에 공동체 내에서 누군가는 권력을 더 갖고 누군가는 어느 정도 불합리를 당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부산물이라고 여길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절대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내로남불은 일단 기분 나쁘다.
직장 내 계급의 차이는 결국 임금과 권한의 차이로 설명할 수 있다.
계급이 높으면 높은 임금을 받고 많은 권한을 갖는다.
계급이 낮으면 낮음 임금을 받고 적은 권한을 갖는다.
그러나 자주 간과되는 요소가 있는데, 바로 "책임"이다.
어머니께서 현직자일 시절 자주 하시던 말씀이 "임원 월급은 욕 값이다"였다.
임원이 되어 위험한 일도 책임을 지고, 아랫사람 윗사람의 욕을 잔뜩 먹으면서 권한을 집행하는 것이 높은 계급을 가진 자로서의 책무라는 것이다. 내로남불의 출발점은 바로 이 책임감에 대한 무지이다.
두 번째 유형인 내가언제형은 사실 조금 더 악질이고 저질인 유형에 속한다.
사람의 가치관은 변한다. 신념도 변하고 꿈도 변한다. 나이에 따라서 성격도 변하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언제형은 그런 변화와는 달리 상황과 시점에 따라 손바닥 뒤집듯이 변하는 저질 변화라서 뭇 직장인들을 분노케 하는 것이다.
눈 뜬 채로 코베이고 나만 바보 된 채로 피해볼 수 있는 것이 내가언제형이다.
분명히 A4 용지를 세로로 두고 보고서를 작성하라고 해놓고,
뽑아서 가져가니 가로 양식으로 써야 빔프로젝터를 써서 화면에 띄워놓기가 편하단다.
여기서 너스레를 떨며 사과하는 상사는 그나마 사람이고,
갑자기 안면 몰수하고 세로 양식에 대한 단점과 가로 양식에 대한 장점, 그리고 직장생활의 마음가짐과 자신의 개똥철학을 늘어놓기 시작한다면 정말 쓰레기 중의 쓰레기다.
요즘 말로 "뇌절"이라고 한다고 들었다.
그야말로 과거 자신의 언행이나 가치관은 뜨거운 물을 부은 눈송이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갑자기 태세를 전환하여 현재의 자신의 입장을 방어하고 듣는 이를 멍청이로 만드는 식으로 처세한다.
더 큰 문제는 지금 이 시점의 입장이 언제 또 과거로 회귀할지, 아니면 제3, 제4의 지침으로 변화할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나이브하다, 순진하다, 맹하다는 식으로 피해자를 호도하는 경우도 보았다.
직장생활 하루 이틀 해보았냐, 사회생활 스킬이 부족하다는 식으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부류도 있다.
이런 주변인들이 더 거대한 악이다. 칼에 찔린 사람에게 "왜 피하지 못했냐"라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내가언제형은 '신뢰'를 상처주기 때문에 단기/중기/장기적으로 조직의 건전성을 파괴하고 문화를 병들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97일 뒤 나는 퇴사할 것이다.
아쉽게도 내로남불형과 내가언제형은 공존한다.
한쪽이 없다면 다른 한쪽도 없는 비교적 건강한 조직문화를 가진 곳이란 뜻이며,
한쪽이 있다면 다른 한쪽도 자연히 있는 기업일 수밖에 없다.
의사표현도 하고 싶었다. 눈 앞에서 상사를 민망하게 만들고 싶었다.
본인의 모순과 불합리를 깊게 느끼고 일말의 수치심이라도 느끼길 바랐다.
"내가 그랬나? 사내자식이 쪼잔하다"라는 한 마디에 직장에 대한 얼마 남지 않은 애착은 물론 인간의 성선설에 대한 믿음까지 흔적도 없이 무너져 내렸다.
종박의 퇴사까지 앞으로
D-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