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낙하산은 21세기인 지금에도 당연히 존재하며
단 한 명의 낙하산이라도 있는 회사는 결코 좋은 회사가 아니다.
취업하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시대이며, 이러한 경쟁률 상승을 두고 애사심을 유발하려는 정책도 흔해졌을 정도로 문턱이 높아져만 가는 것이 우리들의 세대이다.
SKY학벌은 소소한 가점이 될 뿐, 과거와 같은 탄탄대로의 보증수표나 마스터키가 되어주지 못한다.
대외활동, 인턴십, 공모전은 물론이고 석사학위는 이제 우리 시대의 학사학위만큼 널린 존재가 되었다.
낙하산이 나쁜 이유는 그 모든 노력을 비웃어버리는 가장 효과적이고 치명적인 채용형태이기 때문이다.
경악스럽게도 낙하산은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를 가리지 않으며,
비밀스럽게 지인 네트워크를 통해 들어오는 것도 아니라 이제는 시스템적으로 '음서제'를 정착시키기도 하며,
또한 얼마나 그 낙하산 인력이 많은지 이제는 '낙하산 Pool'을 따로 관리까지 한다.
낙하산으로 들어가려면 대기표를 뽑던지 해야 할 정도다.
낙하산끼리도 경쟁을 해야 하는 경우는 그나마 나을 수도 있다.
이 경우에야 뭐 조부모, 부모의 빽싸움 줄대결이 펼쳐지는 진흙탕 개싸움판이니
나와는 상관도 없고, 일반 채용 루트에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야 신경 쓸 필요도 없다.
정원외 채용이면 양반이지, 정원 내에서 일반 채용 루트로 들어올 수도 있었던 청년의 자리 하나를 차지해서 들어온 것이니 악질도 이런 악질이 없다.
일단 그 정도의 든든한 빽이 있는 빵빵한 집안이라면, 뭐하러 굳이 애써 Job Market에 들어오는가?
군대에서 복무하는 영국 왕실의 왕자들 같은 느낌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도 실천하는 것인가?
솔직히 말해서 민폐다.
낙하산은 그 존재 자체가 위화감 조성의 원자로와도 같다.
낙하산의 진짜 문제는 입사 이후에 펼쳐진다.
업무능력과 역량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이 95% 확실하기 때문이다.
더러는 정말 소수는 굳이 낙하산이 아니어도 괜찮을 정도의 학력과 경험을 가진 신입사원도 있다.
요새는 채용이 정말 어려우니, 집안의 도움이라도 받고 싶었겠다는 이해는 해줄 수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니다. 정말 일을 못한다. 눈치도 없다.
본인이 낙하산으로 들어왔다고 겸손해하거나 눈치를 볼까?
전혀!
전혀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경우 자기가 낙하산으로 들어온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고, 그게 아니더라도 어째서인지 참으로 뻔뻔한 데다가 본인은 잘하는 줄 아는 프로 착각러들도 많다.
함께 일하던 선배 대리가 말했다.
C급 직원의 존재는 팀의 전체 업무성과를 낮추는 수준이 아니라,
주변 A급 직원들마저 B급 혹은 C급으로 끌어내려버리는 근묵자흑 효과가 있기 때문에 정말 최악이라고...
모두가 각자의 격리된 독방에서 각자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면, 회사 일이란 것은 필수적으로 상호작용을 동반하며 직원 간의 인간관계에서 시너지가 창출되기도 하고 혹은 역시너지가 발생하기도 한다.
회사 일이란 것은 결국 1+1=2 법칙과 거리가 멀다.
백로들이 노는 곳에 까마귀 한 마리 슬쩍 껴놓으면서 "그래 봤자 회색 정도로 물들겠지?" 하는 안일함은
결국 더욱 시커먼 조직으로 전락시키는 최악의 결과를 초래한다.
그렇기 때문에 96일 뒤 나는 퇴사할 것이다.
일하면서 인맥, 인연, 더 좋게 얘기해서 인적 네트워크의 중요성은 항상 느끼고는 있다.
그러나 낙하산은 인적 네트워크의 최악의 활용법이다. 우리가 도박을 '투자'라 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듯, 그리고 칼이란 것이 음식을 할 때도 쓰이지만 사람을 죽일 때도 쓰이듯이 말이다.
내가 다녔던 회사는 공수부대라 부를 수 있을 정도의 낙하산 회사였다.
특히 현장에서 설비를 돌리는 기술분야 근로자들은 노조 규약에 현대판 음서제도를 명기해놓을 정도로 전사적인 불공정 채용 관행과 제도가 깊게 뿌리내려 있었다.
이미 너무나 많은 이들이 불공정 경쟁에 피해자가 되었고, 동시에 수혜자도 잔뜩 퍼져있다.
즉, 이러한 공수부대의 행렬은 불경기에도 호황기에도 절대로 끊기지 않을 것이다. 끊길 이유가 없다.
의욕을 송두리째 앗아간다. 미래에 대한 기대감도, 내가 열심히 일할 이유와 의미도.
신입사원인가? 아니면 취준생인가? 행여나 입사 이후에 동기 중에 누가 낙하산이라는 이야기가 들리고 그게 루머가 아니라 꽤 확실한 이야기라 한다면, 당장 그만두어라.
공수부대가 있는 회사에 미래는 없다.
적어도 그런 곳이라면 뛰어나고 잠재력이 있더라도 줄도 빽도 없는 당신의 미래는 어둡다.
종박의 퇴사까지 앞으로
D-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