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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박 Apr 22. 2020

퇴사 D-95 : 회의실 블루스

6.

회의실을 굳이 음악 장르로 표현하자면 블루스다. 

특정 나이대의 사람들은 그 분위기를 즐기지만, 정말 이해하지 못하고 기피하는 이들도 많기 때문이다.


내가 다니던 회사는 정말로 회의가 많았다.

공식적으로 임원이나 CEO급이 참가하는 회의만 20~30개가 넘었으며

일전에 공문을 통해 파악한 비공식적으로 개최되는 회의나 팀단위의 회의까지 합치면 100개가 족히 넘었다.

회의 중에는 문서작성 같은 업무는 고사하고, 참고자료를 몰래 읽는 것도 어렵다.


회의가 아예 없는 회사는 있을 수 없다. 회의가 본질적으로 가진 브레인스토밍 기능과 아이디어의 시너지 효과 그리고 참가자 간의 케미스트리는 혼자라면 절대로 기대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회의는 엄청나게 중요한 만큼, 제대로 하려면 참가자들의 노력은 물론 문화와 시스템이 필요하다. 

하기 쉬운데 중요한 일이 세상에 밥 먹고 숨 쉬는 것 이외에 무엇이 있는가? 

중요한 일은 대개 하기 어려운 일인 경우가 대부분이며 회의도 마찬가지다.


회의는 발표회랑 혼동되곤 한다. 그런데 회사에서는 발표회가 거의 대부분인 경우가 있다.

이는 꽤 흥미로운데, 가장 높은 사람이 극단적으로 화자가 되는 경우와 극단적으로 청자가 되는 경우로 나뉜다.

즉 여러 사람이 한 사람 들으라고 돌아가면서 정해진 발표를 하는 것과

한 사람이 여러 사람 들으라고 혼자만 일장연설을 늘어놓는 경우로 나뉜다.


물론 가장 이상적인 것은 누군가는 주도하고, 참가한 사람들은 서로 비중은 다르지만 말하고 싶은 이야기와 아이디어를 교환할 수 있으며 결론이 도출되어 다음 업무나 방향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회의이다.


유토피아라는 라틴어는 쉽게 말해 '그런 곳 없다'라는 뜻이라 했던가.

그런 이상적인 회의는 유토피아와도 같다. 


발표회는 회의가 아니다. PPT를 만드느라 스크립트를 쓰느라 엄청난 공수가 투입된다.

게다가 발표자가 작성자와 다른 경우가 대부분이니, 집중력은 분산되고 의미 전달이 잘못될까 노심초사한다.

사실상 의견교환이 있던 것도 아니고 정보전달 정도이니, 재미없는 유튜브 하나 본 느낌으로 끝난다.

아예 필요 없는 시간도 아니고, 때로는 CEO에게 그리고 참가자들에게 공유해야 할 중요한 정보는 회사일을 하다 보면 끊임없이 생기므로 하기는 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을 "회의 잘했다"라는 착각으로 승화시켜서는 안 된다.


더욱 문제 되는 것은 오직 한 사람만 말하는 회의다.

이것은 회의도 아니고 발표회도 아니며 아주 잘해봐야 강의 정도인데,

강의란 것은 오랜 시간 특정 분야에 관심을 갖고 학문을 갈고닦은 이가 할 수 있는 특별한 활동이다.

물론 직장생활을 오랫동안 하면서 쌓인 짬밥은 절대로 무시할 수 없다. 단 하루여도 '경력'을 자격증이나 공모전보다 더 쳐주는 것은 그만큼 실제 일해본 경험이 갖는 가치가 높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의가 원맨쇼로 변질되는 것은 사실 생산성과는 거리가 멀다.

하고 싶은 말이 많다고 다 해야 하는 것이 회의인가? 중요한 것부터 먼저, 명확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전달해야 하는 것이 회의이며 그것에 대한 실시간 피드백과 아이디어의 발전이 수반되어야 우리는 생산성이 높은 회의라고 말한다.


아쉽게도 나는 입사한 후 5년 동안 그런 회의를 거의 경험해보지 못했다.

대학생 시절 팀플이 그리워질 정도니, 말 다 했다.


그렇기 때문에 95일 뒤 나는 퇴사할 것이다.

블루스에서 Blue는 푸르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우울하다는 의미의 형용사 역할도 갖고 있다.

회의실이 지루하고 힘겨운 장소로 변모하면 결국에는 우울해지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쉬는 시간 없이 이어지는 3시간 4시간 회의는 인간의 집중력을 바닥으로 몰고 간다. 수능도 중간중간에 쉬는 시간을 주는데, 회의에는 그런 쉬는 시간이 보장되지 않는다.


회의 시간도 근로 시간이고 결국 월급이 나오는 것은 마찬가지 아닌가?

물론 그렇다. 그러나 회의 시간도 근로 시간이고 결국 당신의 유한한 인생의 수십 분~몇 시간이다.

그렇게 떠나보내는 시간이 아깝다고 느낀다면, 당신은 아직 정상이다. 


종박의 퇴사까지 앞으로

D-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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