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함의 비범함 04
영감님의 영광의 시대는 언제였죠?
난…
난 지금입니다!
요즘 20대인 여러분들은 잘 모르겠지만, “슬램덩크(SlamDunk)”라는 만화가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비디오판과 TV판으로 애니메이션 방영도 해주었고, 박상민 님의 “너에게로 가는 길”이나 혹은 “너를 좋아한다고 외치고 싶어”라는 희대의 명곡들도 그 시대를 풍미하였다. 한국에서 최근에 만화판 기준 최종장인 산왕공고 전을 그린 영화가 개봉했고, 30대 40대의 엄청난 열광 속에 한국에서만 2월 기준 무려 248만 관객을 기록 중이다.
슬램덩크의 내용을 모르시는 분들도 요즘에는 많아서 간략히 한 문장으로 설명하자면,
“문제아 모쏠 양아치 고등학생 강백호가 처음에는 여자아이에게 잘 보이기 위해 시작한 농구에 점차 진지해지면서 북산고 농구부와 함께 성장하며 전국대회에 도전하는 이야기”
...이다.
농구라는 스포츠가 지금과 같은 인기를 얻기 훨씬 전에 우리나라와 일본에 농구 붐을 이끌어낼 정도로 센세이셔널한 불세출의 만화라고 할 수 있다. 슬램덩크라는 만화가 1990년에 연재가 시작되어 1996년에 연재가 종료된 작품이라, 종료 시점부터 따져도 27년째를 맞이하고 있는 아주 오래된 작품이다. 세상에 첫 포켓몬스터 게임이 출시되었을 즈음이고,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명탐정 코난의 연재가 시작되었을 즈음이다. 정말 꽤 오래된 만화라는 것. 그렇다면 하고많은 추억의 만화 중에서 슬램덩크가 세월을 넘어 다시금 우리 앞에 나타났을 때 우리들이 이토록 열광한 이유는 무엇일까?
슬램덩크가 연재되었던 일본의 만화주간지 소년점프(少年ジャンプ)의 슬로건은 “우정, 노력, 승리”이다. 슬램덩크에는 물론 우정, 노력, 승리도 있지만 이 만화가 특별한 이유는 그것들이 영원불멸한 가치가 아니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삶에는 질풍노도의 시기도 영광의 시대도 있기에 박수를 보내기 충분하다는 것을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아 강백호, 천재지만 독불장군인 서태웅, 방황의 길에 청춘을 낭비했던 정대만, 키가 작은 송태섭, 그리고 명문고가 아닌 ‘듣보잡’ 북산고를 이끌어야 하는 채치수 등등, 북산고 농구부의 캐릭터들이 가진 결핍, 재능, 장점, 단점 등은 우리 모두가 가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입체성을 보여준다. 캐릭터들 모두 주변에 있을법한 입체적 캐릭터이기에 우리가 더 몰입할 수 있고, “아 나도 한 때는 저런 고민도 했었지” 혹은 “나도 그때 그 순간에는 빛나고 있었어”라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만든다.
주인공 강백호는 오직 키 크고 싸움 잘하는 양아치 일진이며 심지어 모태솔로이다. 공부를 잘하지도 않았고, 농구를 시작한 이유도 같은 고등학교 ‘소연’의 외모에 한눈에 반해 그녀에게 잘 보이고자 “농구를 좋아한다”는 거짓말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어째 저째 정말 피나는 노력에 더해 타고난 신체능력으로 팀에 점점 도움이 되어가는 선수로 성장하고, 어느새 팀에 없어서는 안 될 선수가 됐을 때 백호는 진심으로 농구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러나 심각한 부상을 입고, 난적이자 최강의 적에게 승리를 거두고 나서, 팀은 다음 라운드에서 패배하여 탈락한다.
우리들에게는 모두 영광의 시대가 있다. 돈을 엄청 잘 벌던 시기를 기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원하던 대학이나 기업에 합격하던 순간이거나, 가족과의 행복한 한 때, 연인과의 달콤한 데이트 등을 즐기던 때일 수도 있다. 필자의 경우 고등학교 2학년 가을의 학급대항 축구대회가 생각난다. 당시까지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그리고 고등학교 1학년까지 모두 “1회전 탈락”에 그쳐오던 나였지만, 고교 2학년 시절에는 매 경기 득점을 하며 15팀 중 4강까지 오르는 신화를 썼다. 아니, 국가대표팀도 아니고 서울의 한 남학교에서 매년 열리는 체육대회에서 4강까지 간 것이 신화?라는 콧방귀를 뀌셔도 사실 괜찮다. 나에게 그때는 정말로 영광의 순간이었으니까.
평범한 우리들의 비범했던 순간들은 어디에나 있다. 남이라면 모를, 가족조차도 모를, 나 본인만이 기억하는 영광의 시대가 있다. 혹자는 “작은 성공”이라 할지도 아니면 “추억 보정”이 들어갔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슬램덩크의 재흥행은 만화자체에 대한 그리움도 있지만, 자신의 젊은 시절, 10대 시절을 떠올리게 하며, 내가 열중했던 것들이나 지금은 과거가 되어버린 빛났던 시기들을 다시 생각하게 해 주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축구를 좋아하던 어린 시절의 필자는, 슈팅이 강해졌으면 하는 마음에 계단이 있는 곳에서는 언제나 등하교를 할 때 쪼그려 뛰기를 했었다. 축구 잘한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도 없고, 딱히 슈팅이 강해진 것도 아니지만, 내가 그렇게 무언가에 열중하던 시절을 성과 유무에 관계없이 빛난다고 기억된다.
드리블을 잘하고 싶어서 축구공을 들고 집 근처를 열심히 뛰어다녔지만, 프로나 국가대표가 되지 못했다고 해서 시간낭비를 했다고 후회하는가? 인생이란 꼭 성과가 있는 순간만이 영광의 시대가 아니다
영광의 시대란 것은 꼭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부와 명예를 꽉 잡았던 시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북산고가 우승을 한 스토리였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슬램덩크를 좋아했을까? 꼭 그렇지는 않다. 처음으로 3점 슛을 넣은 순간, 짝사랑하던 아이의 손을 처음 잡던 순간, 처음으로 완주해 본 하프마라톤, 사생대회에서의 장려상, 컨디션이 무척 좋은 날 뛰었던 운동경기, 친구에게 “고맙다”는 말을 들은 날, 열심히 준비한 … 바다의 표면에 부서지는 햇빛처럼 무수히 빛나는 영광의 시대들이 당신이 살아온 자취에 따라 곳곳에서 반짝이고 있다.
북산고 5인방이나, 주요 등장인물들의 10일 정도 뒤의 후일담을 작가인 이노우에 타케히코가 칠판에 그린 적이 있다. 그러나 이들이 20대가 되어서 정말로 농구선수가 되었는지, 강백호는 재활에 성공했는지, 서태웅은 정말로 미국에 갔는지, 채치수는 대학에 갔는지, 다들 나중엔 평범한 직장인이 되어있는지에 대한 묘사는 없다. 오직 우리들의 상상에 맡길 뿐… 마치 우리 인생 같다. 살아오면서 겪었을 부침도 있었고 영광의 시대도 있었지만 결국 우리 삶은 지금이며,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기에 우리는 오늘을 열심히 살고 있다.
여러분만의 영광의 시대를 돌이켜보라. 그리고 앞으로도 반드시 찾아올 당신만의 영광의 시대를 위해서라도 우리의 삶은 끝까지 살아내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