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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박 Feb 27. 2023

의로움에 대한 집착

평범함의 비범함 05

여러분은 혹시 “이수현”씨를 아는가?


2001년 일본 도쿄 신오쿠보역에서 술에 취해 열차 선로로 떨어진 사람을 구하러 뛰어들었던 한국인 유학생 이수현 씨와 세키네 시로 씨가 안타깝게도 열차에 치어 목숨을 잃은 사건이다. 20년이 지난 2021년에도 추도식을 거행할 만큼 개인주의 성향이 강했던 일본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킨 사건이다. 이수현씨야말로 “의인(義人)”에 굉장히 부합하는 전형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누군가가 당신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상상해 보자. 썩 기분이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좋을지도 모른다. 아니, 대부분은 좋아할 것이다. 사람이 참 착하다는 칭찬의 상위호환 버전으로 들릴 수 있으니까. 자신의 목숨보다 타인을 위기로부터 구출하는 것을 우선시하고, 그러는 과정에서 명을 달리하기라도 하면, 사람들은 안타까워하고 “의인”이라며 치켜세워준다. 일본의 한 소설가는 의인을 “신인류”라고까지 표현한다. 자신보다 타인을 위해 목숨을 거는 행위는 인류의 본성과는 전혀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신오쿠보역에 있는 이수현씨와 세키네씨의 추모비)


의로운 사람은 그만큼 드물다. 당신이 만약 이수현 씨의 상황이었다면 선로에 뛰어들 수 있겠는가? 적어도 나는 못한다. 사후 조사에 따르면 살 수 있는 시간이 7초였다고 한다. 7초 내로 만취한 승객을 끌어내어 안전한 공간까지 끌고 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7초면 충분히 그 승객을 다시 내버려 두고 반대 선로로 뛰어드는 것은 가능했기에, 더욱 이 두 사람을 의인으로 부를 수밖에 없다. 공리주의나 트롤리 딜레마의 철학적 논의보다 더 생생한 현실에서의 사건이 우리를 더욱 깊이 몰입하고 생각하게 만든다.


문제는 어느새인가부터 사람들은 의롭지 않으면 안 된다는 집착에 물들어버렸다는 것이다. 최근에야 염증을 느끼는 사람들도 점차 나오고 있지만,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에 대한 집착이 대표적이다. 그 밖에도 정의구현, 참 교육, 우리만이 옳다는 믿음 등을 같은 선상에 두고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정치가들이나 영화/예술판에서만 벌어지는 일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우리들도 의로움에 대한 집착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는 말할 수 없다. 개개인의 개성을 존중하는 시대라면서, 사실 우리는 여전히 남의눈을 신경 쓰고 평판에 집착한다. 게다가 은연중에는 의롭지 못한 사람이 되기도 싫은 것이다. 


(사회운동, 시위, 정치적 스탠스, 우리들 모두 무의식중에 ‘의로운 편’에 서고 싶어한다)

“아닌데? 난 집착 안 하는데?”라고 하신다면 참으로 다행이지만, 여러분과 다른 뜻을 가진 누군가의 “당신은 어찌 그렇게 불의(不義)의 편에 서려하시오?”라는 말을 완전히 흘려들을 수 있겠는가? 지렁이처럼은 아니라도 ‘꿈틀’은 할 것이다. 아니 평범한 내가 뭘 어쨌다고? 이렇듯 세상을 너무나 의(義)와 불의(不義)로만 받아들이는 사람이 꽤 늘어났다는 것이 심히 유감이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그 양극 사이의 어딘가에서 이리저리 떠다니는 입자처럼 사는데 말이다. 누군가가 의로움에 집착하는 모습을 공공연히 보이고 다닌다면, 그것을 보는 우리들도 “나는 어느 쪽일까?”라는 생각이 스며 나올 수 있는 것이다.


평범한 우리는 스펙트럼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플라스마처럼 고체도 액체도 기체도 아닌 정도의 의로움을 잠재적으로 갖고 있다. 꼭 목숨 던져 타인을 구하다 장렬히 죽어야만 의인이 되는 것은 아니며, 사실 그러지 않아주셨으면 한다. 나는 아직도 이수현 씨가, 세키네 씨가 죽지 않았더라면 하는 안타까움이 그들에 대한 존경과 찬사보다 더 앞서 마음속에 차오른다. 사실 남을 위해 목숨을 걸만한 위기나 도전과제는 그렇게 자주 발생하지도 않는다. 평범한 우리가 살아서 추구하고 행할 수 있는 거의 대부분의 의로움은 그것이 아무리 작더라도 그 자체로 아주 비범한 것이다. 일상에서의 의로움은 누군가 알아주지 않아도 나 스스로가 나 자신에게 놀라는 순간들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하기 싫어하는 팀플의 조장을 맡는 것, 군대에서 잘못한 동기를 커버 치기 위해 “제가 했습니다”라고 말하고 대신 혼나는 것, 백화점에서 혼자 울고 있는 아이의 손을 잡고 미아보호소로 데려가는 것, 신발끈이 풀렸다고 말해주는 것, 가방이 열렸다고 알려주는 것, 나보다 더 급해 보이는 사람에게 줄에서 내 앞자리를 양보해 주는 것… 이렇게 아주 작은 친절과 희생정신 정도면 비범한 의로움을 행했다고 볼 수 있다. 


(목이 탈 때, 나보다 목마른 친구에게 나눠 마실래? 하는 것또한 작지만 확실한 의로움이다)


의로움을 꼭 “불의에 맞서는 것”같이 어려운 것으로 생각하지 말자. 의로움은 맞고 틀리고의 문제도 아니고 옳고 그른 것을 가르는 기준도 아니다. 의로운 것은 그 자체로 의로운 것이다. 당신이 혹시라도 지금 집착하는 의로움은, 누군가에겐 불의로 비출 수 있는 점에서 평범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비범함이 아니다. 우리의 비범함, 이 경우 의로움이란, 한 꼬집의 친절과, 티스푼 하나의 이타심, 그리고 한 움큼의 결심과 실천만 있다면 발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항상 의롭고자 하는 것도 고통과 번뇌 혹은 자신에 대한 과도한 실망감을 안겨줄 위험이 있다. 의로울 수 있는 순간은 아주 가끔 오는 것이 보통이다. 


LG그룹에선 2015년부터 매년 “LG 의인상”이란 것을 수여하는 모양이다. 2022년까지 수상한 188명의 모든 분들이 훌륭하고 존경스러운 사람들이라는 것에는 한치의 이견도 없다. 다만 188명은 전 국민의 0.0003% 정도밖에 안 된다. 모두가 찬양하는 의인이 되기란 참 어렵니다. 그러나 혹시 내가 “종박 의인상”이란 것을 여러분들에게 수상할 수 있다면, 나는 작은 의로움에도 매년 매월 그리고 중복해서도 심심한 감사의 상을 수여해드리고 싶다. 부상으로는 여러분 마음속의 자아존중감의 씨앗과 나의 진심 어린 격려와 박수가 기다리고 있으니, 혹시 지원하실 분은 마음속으로 신청서를 보내주시길 바란다. 여러분의 그런 비범한 평범함을, 평범한 내가 전력을 다해 응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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