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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이꽃 May 10. 2022

新. 이산가족의 어버이날

저는 新. 이산가족의 일원입니다. 6.25를 겪지 않았으나 쓰나미 같은 큰 불가피한 자연재해를 겪지 않았으나 나를 태어나게 한 원가족과 헤어져 사는 이산가족으로 사는 고아입니다.


어버이날을 딱 한 번만 울고 지냈습니다. 다행이라 생각했습니다. 생각보다는 많이 그들이 그립진 않았던 거 같습니다. 돈이 원흉이 되어 흩어졌는데 돈의 위악은 그 파편은 어떤 미사일보다 포탄보다 강력하였다고 실감합니다. 분명히 있었던 원가족의 흔적이 산산조각 흩어져 예전의 추억만을 잔여물로 남겨놓았을 뿐입니다.


예전의 추억에 기대어 어버이날을 지냈습니다. 할머니와 언젠가 지냈던 어버이날엔 우리 집의 거실에서 쑥개떡을 빚었었고 5월의 어느 날의 아빠의 생일엔 러닝셔츠만 입고 양복바지를 입은 채로 양말을 걷어내린 아빠와 할머니가 우리  거실에서 깔깔 웃으며 모자간의 대화를 나눴던 시간도 있습니다.

내가 보고 싶은, 그리워하는 원가족의 모습은 배려는 부족한 채였지만 그래도 가족의 붉은 실로 묶여 어쩔 수 없이 모여있긴 하였으나 그 어쩔 수 없는 시간을 비집고 꽃을 피워낸 '가족의 정'이었습니다.


추억의 그 시간 속에 있는 나의 할머니는 지혜롭게 백발을 빛내며 늙어가고 있었고 나의 평생 철없던 아빠는 여전히 철이 없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며 그들에게 흐르는 정이 있었고 사랑이 있었던 시간이었던 거 같습니다.


시댁의 부모님을 위해 이번엔 나만 아는 특별한 카네이션을 선물하고 싶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화원에 2시간이 넘게 달려가서 제일 예쁘다 여겨지는 카네이션을 두 그루 골라 분갈이를 해서 집에 돌아올 때 마음이 조금은 뿌듯했습니다.

어머님은 여전히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듯하지만 나의 선물을 칭찬을 해준 적이 없지만 내가 그분들에게 주는 정을 이번해엔 제대로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맛집을 검색해서 음식을 주문해가서 점심을 먹고 왔습니다.

어머님의 나름의 곡절이 있으셨던지 표정이 밝진 않았지만 그게 나를 미워해서 그런 거라는 피해의식의 슬픈 감정은 이번의 어버이날엔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내가 드린 정만 내려놓고 올 수 있어서 감사했던 하루이기도 했습니다.


요사이 여전도회의 단톡방엔 교우들의 부모님들의 부고가 자주 올라왔습니다. 나는 그 부고를 보며 아무에게도 얘기한 적이 없지만 혼자서는 속으로 이런 감정을 가졌습니다.


'저들은 그래도 부모의 죽음을 알 수가 있구나, 저들은 그래도 부모의 죽음 앞에서 형제들과 같이 껴안고 꺼이꺼이 울며 통곡하며 슬픔을 공유하겠구나'


내가 만든 나의 가족이 있으니   아니냐 싶기도 하지만 나의 뿌리가 단절된 채로 기념일을  보내는 것이 아직은 조금은 아주 조금은 어렵습니다. 조정을 하던 마지막 재판장안에서 ' ' 보낸 변호사들은 나의 청을 끝내 거절했습니다.


먼발치에서 아빠의 마지막 모습을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했었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잘 모르지만 그 부분은 끝내 조정이 결렬되었고 보여주겠다고 추후에 연락이 오긴 하였으나 꼭 그들이 지정한 변호사 사무실 안에서만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아빠의 교통사고로 시작된 이 사건의 결말은 내가 태어나 자란 시골집이  그들에 의해 팔렸고 내가 이맘때 할머니와 같이 고추 모종을 심으러 갔던 작은 땅도 팔렸으며 보험사의 보험료를 편취하였고 그 모든 돈을 다 모아 경기도 어느 자락에 땅을 사고 건물을 지었다는 얘기만 들었습니다.

삼촌과 고모가 끼어들었고 막냇동생이 그 판을 잡아 흔들어 키워서 큰 언니를 몰아내고 저는 졸지에 고아가 되어버린 겁니다. 그 일련의 사태에 울화가 생기지 않고 억울함이 생기지 않고 큰 증오가 자리잡지 않아서.... 저는 그 점이 크게 하나님께 고마울 뿐입니다.


아빠의 마지막 모습을 보았더라면 그랬다면 참 좋았을 텐데라는 생각을 어제 했습니다. 그리고 밤 사이 꿈을 꾸었는데 아빠가 나왔습니다. 내 기억 속에 철없던 아빠 모습 그대로 하얀 러닝셔츠를 입고 큰 등을 보이며 너털웃음을 웃으며 내 꿈에 나왔습니다.

반갑더라고요. 그거면 됐습니다. 동생들의 얼굴은 일부러 떠올리지 않으려 애를 쓰는 편입니다. 아직은 동생들의 얼굴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에 금세 눈물이  올라서  많이 슬퍼지거든요.


어버이날을 딱 한 번만 울고 잘 지나갈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나는 돈이 만들어낸 흉측한 전쟁으로 고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잘 살고 있습니다. 괜찮으니 이 글을 쓸 수가 있는 겁니다.

5월이 오면 흉터의 자리가 욱신거리지만 내년의 어버이날은 더 괜찮을 거라 장담합니다. 나는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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