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비슷한 시각에 눈을 떴습니다. 간밤에도 책을 읽다 잠이 들었던 이유로 침대 발치에 책이 굴러 떨어져 있었습니다. 일어나 간단하게 스트레칭을 하고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한 후에 침대를 정리해두었습니다.
내 몸만 간단하게 건사를 하는 일상이 오랜만이라 이게 참 편하고 좋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20년 동안의 매일 아침의 루틴을 거스르고 내 한 몸만 건사하는 일이 가뿐하고 상쾌했습니다.
하지만 좀 있으면 가족이 다시 합체를 해야 할 시간이었습니다. 좋은지 나쁜지 잘 모를 기분이었으나 한편으론 혼자의 두서없는 여행이 2박 3일로 마무리가 되는 게 좀 서운하기도 하였고 다른 한 편의 마음으로는 늘 익숙한 가족과의 조우가 나쁘지도 않았습니다.
남편의 얼굴과 표정이 궁금한 마음이 들었던 거 같기도 합니다. 어제저녁에 딸이 전화로 호들갑을 떨며 그러더군요.
"엄마! 아빠가 설거지를 했다니까? 난 바빠서 학교 갔다가 아르바이트하느라 먹은 그릇 개수대에 그냥 놔뒀었거든. 첫날은 그대로 쌓이더니만 둘째 날 저녁엔 아빠가 한참을 서서 설거지를 하더라고. "
흔하지 않은, 매우 흔하지 않은 남편의 설거지 소식에 남편이 설거지를 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지가 궁금했던 거 같아요. 서울을 떠나오며 마지막으로 수전을 수세미로 문지르며 속으로 그런 마음이 들었거든요.
남편은 남의 집 수전도 늘 이렇게 반짝이는 줄 아는 사람일 거라고 말입니다. 개수대도 늘 반짝거리고 침대에 이불도 널브러져 있지 않고 베란다엔 봄이고 여름이고 겨울이고 꽃이 사시사철 피어있고 저녁이면 따뜻한 밥이 기다리고 있는 집을 20년 동안 무상으로 제공해 온 나의 노력을 조금은 알았을까 싶었어요.
조식을 야무지게 먹고 배낭을 꾸려 펜션 앞으로 나가니 한 시간 전에 제주공항에서 출발해서 펜션으로 오는 버스를 탄 부녀가 펜션 앞에 딱 맞춤으로 당도해 있었습니다. 딸은 배꽃 같은 흰 원피스를 차려입고 신이 난 봄처녀의 모습인데 남편은 딸의 뒤에 한 발자국 쳐져서 걸어오다 저를 보고는 얼굴은 함박웃음이 지어지는데 입가에 미안함이 어정쩡하게 걸려있더군요.
저 표정을 난 압니다. 20년 투닥거리고 살다 보면 숨소리만 듣고도 그 사람의 표정을 보지 않아도 기분이 짐작이 되는 내공이 쌓이는 법입니다. 굉장히 미안하고 쑥스러운데 말을 못 건네겠는 표정으로 아침햇살을 등지고 서 있는 남편의 얼굴을 살피다 귀밑머리의 새치가 유난히 하얗게 도드라져 보였습니다.
20년 전의 내가 사랑했던 청년은 배도 홀쭉하고 얼굴은 더 갸름하고 홍안의 얼굴에 빛이 났었는데 아내가 겨우 이틀 집을 비웠다고 옷차림이 벌써 육십을 바라보는 노인네처럼 남색의 등산복을 아무렇게나 걸치고 있더라고요.
얼른 가서 쑥스러운 남편의 손을 잡아줬습니다. 그랬더니 그제야 얼음땡으로 걸려있던 남편의 입술이 풀리며 함박웃음을 웃습니다.
"내가 집 나간 토끼 잡으려고 새벽부터 집을 나섰다고. 잘 놀았냐? 또 집 나가면 그때는 안 데리러 온다?"
아무 말 없이 남편의 등을 토닥여주며 오늘은 가족이 같이 다녀볼 섭지코지로 향할 버스정류장으로 걸었습니다.
제가 여덟 살의 일이었던지 아홉 살이었던지 아마 그즈음의 일로 기억이 됩니다. 용달차 운전수였던 고모부는 술을 아주 좋아하셨는데 젊은 부부였던 고모와 고모부는 없는 살림에 자꾸 술값으로 돈을 축내는 일로 자주 부부싸움을 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친정으로 내달려와 입을 쭉 내민 채로 할머니에게 하소연을 하면 할머니는 그런 고모를 더 나무라곤 했었습니다.
"누가 술 좋아하는 사람 얻으라더냐! 지가 좋아 가 놓고는 뻑하면 와서 저 지랄이네!"
고모 편을 들어주지 않는 친정이었지만 친정이랍시고 내달려와서 조카들과 한 방에서 잠을 자다가는 자고 있는 어린 저를 고모가 조용히 불러 깨웠습니다. 졸음이 가득 실린 얼굴에 옷을 간신히 꿰어 입고 초여름의 시골길을 나서 고모와 함께 읍내로 향했는데 읍내 초입에 큰 고깃집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는 저한테 고모가 그러는 겁니다.
"정은아, 저그 고모부 있으니까 고모부 한티 가서는 얼른 고모가 찾는다고 술 고만 잡수고 나오시라 혀라"
졸음도 덜 깬 채로 여름밤의 시골길을 20여분 걸어온 것도 억울한데 쑥스럼 많은 나를 술 먹는 아저씨들 틈에서 고모부를 빼내오라는 지령을 받고는 참 난감해했던 기억이 납니다. 고모의 자식들은 아직 고물거리는 강아지들처럼 어려서 이런 똑똑한 심부름은 그 집에서 제일 큰 내가 맡아야 했던가 봅니다.
쭈뼛거리며 술 집으로 들어가 인사를 꾸벅하고는 고모의 말을 건네고 멀뚱하니 서서 고모부가 술자리에서 일어나길 기다려야 하는 일도 참 고역이었습니다. 그렇게 고모부의 손을 잡고 술집 밖으로 나오면 고모가 얼마나 환한 얼굴로 좋아했나 모릅니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남편이 그 제주의 이른 아침에 펜션 앞에 당도해 저를 마주하며 집 나간 마누라를 찾으러 온 궁색한 남편처럼 그리 어색하게 서 있을 때 어렸을 때의 그 광경이 선명하게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좀 뿌듯한 기쁨으로 차 올랐습니다. 나를 찾으러 와 주었구나 하는 작은 감격, 고모는 친정으로 내달려서 어린 조카를 대동하고 고모부와의 작은 다툼을 마무리하곤 했었지만 나는 찾아가서 화풀이를 할 친정처럼 제주도로 왔던 거였나 봅니다.
겨우 2박 3일을 혼자 버스로 다녔던 경험이지만 차를 렌트하지 말고 버스로 다니자고 제안했습니다. 버스로 느리게 다녀보니 그리고 걸어 다니다 보니 제주가 여태 다니던 제주도와 너무 달랐었거든요.
종일 세 식구가 의지해서 제주를 걷고 또 걸었던 하루였습니다. 그리고 어느 해변가의 카페 안에서 잠시 쉬며 책을 읽고 있는데 남편이 맥주를 시키더군요. 시원하게 맥주를 마시며 그러더라고요.
"와! 나 여행 다니면서 낮에 이렇게 맥주 마셔본 거 처음이야!"
생각해보니 여행을 다닐 때 그런 소소한 즐거움은 내 몫이었고 남편은 렌터카를 운전해야 하였으므로 술을 한 잔도 마셔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처.... 음으로 깨달았던 순간이었습니다. 남편의 희생도 새삼스레 알아진 뚜벅이 여행을 평소보다 두어 배는 더 재밌게 다니고 저녁은 남편은 펜션 근처의 게스트하우스에서 하룻밤을 자고 저와 딸은 펜션에서 하룻밤을 묵었습니다.
억지로 같은 펜션에서 지내려고 노력은 하지 않았어요. 남편도 저랑 결혼하고 처음으로 혼자 떨어져 숙소에서 지내본 첫날밤이 지나고 각자의 숙소에서 간단한 조식을 마치고 공항 가는 버스에 나란히 올랐습니다.
침대 정리를 간단히 해 놓고 숙소를 나서면서 그곳에서의 아침이 너무 그리울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귤밭에 어스름이 노을이 지던 풍경을 배경으로 책을 읽던 그 마음의 평안을 가지고 서울로 갈 수 있어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단칸방의 흙담집의 가난한 친정집에 찾아와 잠이 든 조카를 깨우던 고모가 왜 생각이 났던 걸까요? 결혼 나고 나서 늘 참기만 해야 했고 후퇴할 수 없었던 나의 결혼생활엔 찾아가 기대어 누울 친정이 없었습니다. 고령의 할머니를 걱정시킬 수도 없었고 여동생이나 남동생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순간순간의 삶의 초라한 모습을 혼자 감당해야 했던 세월이 너무 서러워서 눈물만 났었는데 제주도로의 피신이 나에겐 싸움 후 기대어 도망갈 수 있는 친정 같은 역할을 해준 거 같습니다.
여행 이후, 한쪽으로만 불공평하게 기울던 시소가 비로서 평행선으로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시소 반대편으로 올라올 기회조차 주지 않았던 이전의 나는 없고 이젠 혼자여도 괜찮다는 든든한 마음이 있어서인지 남편을 바로 보고 예전보다 더 사랑해줄 마음의 여유가 생겼습니다. 비겁한 사과를 건네지 않고 당당한 사랑으로 안아주고 싶다는 마음이 비로소 들었습니다.
숙소를 떠나면서 아침산책을 나가서 못만나고 온 펜션의 여사장님에게서 여행 다음날 문자가 왔습니다. 마지막 날 뵙지 못해 아쉽다는 인사와 함께 이런 인사글이 적혀 있었어요. 내 사연을 모를텐데 오래도록 여행객들을 상대해봐서 표정만 봐도 사연을 알 수 있었던건지 모르겠으나 너무도 적확한 저를 위한 인사에 감동이 뭉클 맺혔습니다.
"이제 김.정.은으로 당당히 살아가시길 기도합니다"
아무렴요. 이제는 당당하게 김.정.은으로 살아갈 힘이 생겼거든요. 제주도의 길바닥에 돌담길에 유채꽃 더미에 시리게 푸르러 보이던 바닷물에 저의 억눌린 서러움을 다 뿌려놓고 올 수 있었던 이후로 저는 더이상 혼자라며 울지 않게 되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