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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이꽃 Apr 08. 2022

혼자여도 괜찮아, 2

반쯤 올려뒀던 통창의 블라인드의 여백으로 아침햇살이 조심스레 밀려들고 있었습니다. 언제 잠이 들었나 싶어 내가 잠든 시각이 궁금했으나 눈을 뜨자마자 신기하다 느꼈던 건 내가 노는 날임에도 눈이 개운하게 일찍 새벽 시간에 떠졌다는 것과 잠을 자기 전 서울에서는 버릇처럼 틀어놓은 넷플릭스의 소음이 없어도 잠을 푹 잤다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은 내가 내는 소음에 많이 투덜대고 힘들어했었습니다.


"정은아, 제발 잘 때는 넷플릭스 좀 끄고 자면 안 돼? "


그 후로는 남편의 클레임을 줄이려고 귀에 에어 팟을 꽂고 넷플릭스의 소음을 켜 놓고 눈을 감은 채 잠이 들기를 기다렸어야 했는데... 내가 어젯밤엔 티브이 소리도 넷플릭스의 소음도 없이 잠을 아주 푹 잘 잤다는 게 너무 신기하고 기분이 좋았습니다.

핸드폰을 끌어당겨 시계를 보니 새벽 6시가 조금 넘어 있었습니다. 아침 조식을 7시로 신청해두었기 때문에 잠시 빈 여백의 시간에 또 책을 집어 들었습니다. 간 밤에 읽기 시작한 책은 벌써 결말을 조금 남겨두고 있을 뿐이었거든요.

책의 내용은 여성들의 연대를 다룬 소설이었습니다. 백정의 딸로 태어난 삼천이의 일생과 그녀의 삶과 얽혀 친구 비와 서로를 의지하며 남성의 도움 없이 세상을 살아내는 이야기가  마음을 온통 점령해버렸습니다.


혼자 떠난 여행에서 아주 오랜만에 다시 읽기 시작한 책이 공교롭게도 여자의 홀로서기에 대한 이야기란 게 반갑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그랬던 거 같습니다. 책을 읽다 내려간 식당에서 마주한 조식의 식사를 마주하고는 아침부터 주책맞게 눈물이 나려는 걸 주인장 몰래 닦아냈습니다.

새삼스러웠거든요. 누가 내 음식을 차려놓고 기다리는 장면이 너무 생경스럽고 감사한 마음이 들더군요. 간단한 샐러드 한 접시와 빵 두 조각에 주스 한 잔이 전부였는데 나에겐 칠첩반상보다 더 고마운 내가 수고하지 않은 '누가 나를 위해 차려준' 나만을 위한 식사였으니까요.


여행의 둘째 날의 일정을 묻는 여사장님에게 여덟 살, 처음으로 소풍 가던 어린 내가 된 것처럼 신이 나서 대답을 해 줬습니다. 지인이 알려준 어느 식당을 찾아가 볼 계획이라고요. 하루 종일의 여정이 딱 한 가지 목표밖에 없었던 겁니다. 눈을 뜨자마자 누가 차려준 아침을 먹으며 겨우 점심을 먹을 곳을 찾아 길을 떠난다는 중년의 여인이 펜션 주인에게는 어떻게 느껴졌을지 이제야 궁금하기도 합니다.


제주의 시골 돌담길을 빠져나가며 시내버스 정류장으로 가면서도 마냥 신이 났습니다. 아침 먹고 나서자마자 불로초라도 찾아낼 중요한 목표라도 지닌 거처럼 내 끼니를 책임져 줄 식당을 찾아 나서는 여행길이라니... 목표가 너무 소박했지만 그날의 나에겐 너무 중요한 일정이었거든요. 제주의 푸른 바다를 통창으로 내다보며 나 혼자 밥을 먹을 수 있는 멋진 식당의 사진을 지인에게서 문자로 받아보고는 내내 설렜었습니다.

네이버 지도로 검색을 해 보니 그곳까지 가는 시간이 1시간 반이 걸리는 길이었으나 그런 건 상관이 없었습니다. 어차피 나 혼자 다니는 길이었으니 내가 좋으면 그만인 거였습니다. 여행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제주시내의 오래된 버스를 잡아타고는 가는 길목 내내 버스 안의 풍경을 살피는 일도 얼마나 재밌는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버스정류장에 설 때마다 할머니들이 보퉁이 한가득이고 지고 올라왔는데 무거운 짐을 내려놓기도 전에 출발하는 버스 때문에 할머니 손에서 놓친 검은 봉지에서 감자가 우르르 쏟아져 나와 버스 바닥을 굴러다니며 한 바탕 소동이 일었고 어느 정류장에선 하차를 하기 위해 내리려던 할머니가 뒷문으로 가지 않고 자꾸 앞문으로 내리려고 하는 통에 버스기사의 퉁박을 들어야 했습니다.

"할머니, 자꾸 앞으로 오지 말고 뒤로갑써!"


퉁명스러운 기사의 외침에도 돌하르방처럼 우뚝 서서 앞문이 열리길 기다리는 할머니의 고집을 꺽지 못한 기사는 결국 버스를 세워 앞문을 열어주고야 말더군요. 창 밖으로 보이는 제주의 풍광도 계속 변해서 식당을 찾아가는 한 시간 반의 여정의 지루하지가 않았던 거 같아요. 그리고 그런 설렘도 있었습니다.

내가 뭔가를 아주 잘 해내고 있다는 자부심, 뿌듯함.


보무도 당당하게 식당을 드디어 찾아내곤 보물섬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손뼉을 치며 좋아했는데... 식당의 외양이 지인이 보내준 모습과 달라도 너무 다르더군요. 다시 인터넷 검색을 해 보고 너무 놀래기도 하고 어이가 없어서 혼자서 한참을 혼자서 멍하니 가게 간판을 보며 서 있다가 돌아서야 했습니다.

알고 보니 이름만 같은 다른 식당이었던 거였습니다.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버스정류장에 서서 이제는 제대로 맞게 검색한 식당으로 데려다 줄 버스를 기다리는데 남편의 목소리가 들리는 거 같았습니다.


'정은아, 아니 검색을 어떻게 한 거야. 그러니까 꼼꼼히 덤벙대지 말고 주소를 잘 확인했어야지!'


꼼꼼한 남편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일이었습니다. 다시 버스를 타고 한 시간여를 더 제주도의 외곽을 달린 후에야 내가 찾는 그 식당의 동네에 도착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제는 맞게 찾아왔다는 안도감에 그리고 바다가 펼쳐진 풍광과 대비되는 보리밭의 풍경이 세 시간의 버스여행의 피로를 단박에 씻어주었습니다. 식당으로 찾아가는 길이 어쩌면 그리 예쁘던지 너무 좋았는데 그 즐거움도 잠시, 가게문 앞에 그렇게 쓰여 있더군요.


<화요일은 임시 휴무일입니다>


시간은 이미 점심은 한참을 지나고 있었고 나의 방광은 꽉 찼으며 길을 알려줘야 할 램프요정 지니 같은 핸드폰의 배터리는 1프로밖에 남질 않았더군요. 결국엔 급한 데로 아무 식당에나 찾아 들어가 혼자서 2인분을 시켜야 하는 명태조림을 앞에 두고  그 많은 양에 놀라 식은땀을 잠시 흘리고는 밥과 반찬은 손도 대지 않고 명태살만 발라 먹는 신공을 발휘해야 했습니다.


겨우 점심 한 끼를 찾아 먹으려 떠났던 아침길이 늦은 점심을 해결하고 나오니 하루가 저물어 가는 시각이 되어 있었습니다. 세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에 숙소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검색한 커피숍에 내려 커피 한잔을 마시고 숲 멍을 잠시 하고 일어난 일이 둘째 날 여행의 전부였습니다.

숙소로 돌아와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나니 그제야 좀 정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종일의 소동이 재밌어서 혼자 키득거렸습니다. 침대에 누워 들어오는 길에 서점에 들러 사 가지고 온 책을 새로 펴며 귤밭으로 지는 석양을 배경으로 책을 실컷 읽고 있는데 문득 들었던 통쾌한 감정.

이 시간은 내가 늘 가족들을 위해 저녁을 준비하던 시간이었던 겁니다. 밥을 안치고 찌개를 끓이고 나물을 무치며 식구들을 기다리던 시간에 나는 귤밭을 바라보며 지는 석양을 벗 삼아 책을 읽으며 빈둥거리고 있다니! 얼마나 신나는 감정이었는지 야호라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시원함이 들었으니까요.


내가 해주는 밥을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남편은 저녁밥을 먹기 위해 일찍 퇴근하는 걸 좋아했거든요. 저녁을 배부르게 먹고는 곧장 소파로 가서 누워 뉴스를 보다가 이내 코를 드르렁 골며 초저녁 잠에 빠지는 걸 최고의 행복으로 아는 남편은 아내의 홀로 여행에 꽤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많이 놀랬지만 이내 괜찮다며 잘 놀다 오라고 저에게 용돈을 입금해주더라고요. 저녁을 어떻게 했을지 궁금해서 딸에게 연락을 해 보니 남편과 같이 순두부 찌개를 사 먹는다고 했습니다.


쌀 한 푸대를 사는 것도 남편에게 묻던 아내였으니 정말 많이 놀래기도 했을 겁니다. 왜 그렇게 답답하게 매번 허락을 구하는 삶을 살았나 싶기도 할 테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원해서 그리 살았던 거였습니다. 내가 선택하고 원했던 삶.  보호를 받고 싶고 절룸발이로 서서 남편의 지지와 사랑만을 원했던 나는 늘 남편의 동의와 허락을 바랐거든요.

내 기억에 남아있는 보살핌의 기억, 그런 게 별로 없던 이유이기도 할 겁니다. 아홉 살 이후로 깨진 항아리처럼 풍비박산이 나버린 가정의 형태는 할머니의 찢어진 우산 같은 보호 아래 간신히 유지를 해야 했으니까요.


겨우 아홉 살 먹은 계집아이가 엄마가 집을 나가버리고 빚쟁이들이 집을 찾아오고 아비는 집 나간 아내를 찾아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는 형국에도 눈물 한 방울을 흘리지 않고 살아낸 인생이었거든요. 남편을 만나고 제일 바랐던 건 그에게서 제일 고마웠던 건 나를 보호해줄 그늘이 생겼다는 거였을 겁니다.

그래서 그 오랜 세월을 남편의 비위를 거스르는걸 제일 무서워했던 거였습니다. 나에게 남은 유일한 보호자라 여겼으니까요. 어느 날 그런 세월을 억울해하는 나의 작은 하소연을 듣고는 딸이 물었습니다.


"엄마, 그런 얘길 아빠한테 해 봤어? 할머니한테는? 할머니한테 그렇게 얘기하면 되잖아. 어떤 게 서운한 건지를 말하면 되잖아."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멍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 그렇지. 말을 하면 되는 거였는데 왜 말을 하지 않았던 거였는지 너무 간단한 이치였는데 딸에게 돌려줄 말을 찾지 못한 채로 오래 궁금해하던 대답을 이제야 알 거 같았습니다.

혼자 인걸 무서워하지 않으면 될 일이었는데. 의견이 다름이 있어도 남편의 욱질이 있어도 내가 버려질 거라는 말도 안 되는 착각을 하지 않았다면 어떠했을까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재밌게 잘 지낼 수 있다는 걸 벙어리처럼 표현하지 않고 혼자 참아내기만 했던 나를 20년 만에 그 답답한 구덩이에서 끄집어내었던 하루였습니다.


아주 간단하고 사소한 목적을 이루어내려 종일을 돌아다니던 그날의 제주의 길에서는 서럽다 생각하지도 않고 혼자라 슬프지도 않아서 울 일이 없었습니다. 왜 울었나 싶게 다 말라버린 눈두덩이를  책을 읽다 말고 마른 손으로 문질렀습니다. 눈이 짓무르게 울고 다닌일이 믿기지가 않더라고요.

특별히 한 일이 없었습니다. 나는 그날, 겨우 끼니를 해결하려고 음식점을 찾아 헤맸던 거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길의 잘못된 여정이 나의 마음의 틀어진 지각을 아주 조금 바꿔놓았던 모양입니다.


더는 혼자인 게 두렵지가 않았습니다. 혼자여도 충분히 행복한 하루였습니다.

그 감정을 자각한 거만으로도 가슴이 터질 듯 뿌듯한 감정에 휩싸여 있던 중이었는데 딸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엄마, 아빠기 지루해서 못 견디겠나 봐. 내일 휴가 냈대. 새벽 비행기 끊었어! 집 나간 토끼 잡으러 가야 한다고 아빠랑 같이 내일 새벽에 내려간다. 내일 봐~ 안녕!"


- 다음화에 계속, 마지막화는 아주 짧게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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