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은 분주한 날입니다. 딸아이의 개강이 시작된 후로는 더 그랬습니다. 일주일의 유일한 대면 수업인 강의를 들으러 학교로 바삐 가야 하는 딸이 먼저 대문을 열고 집을 나섰고 그다음은 남편이 출근을 하며 대문을 나섰습니다.
저는 식구들이 빠져나간 걸 확인 후 바로 집안 청소를 시작했습니다. 다른 날보다 마음이 급했습니다. 모든 걸 정리를 해 놓은 후에 내가 매일 세 번씩은 닦아놓는 화장실의 수전도 반짝거리게 닦아놓은 후에 식탁에 앉아 유서를 쓰듯 마지막 편지를 쓰듯 비장한 마음으로 남편에게 글을 남겼습니다.
'20년 만에 퇴근이란 걸 해 봐. 서울에 있으면 자꾸 울어. 내가 요즘 매일 울어. 그래서 다녀오려고. 여행 갔다 올게.'
포스트잇을 냉장고에 붙여놓고 집을 나섰습니다. 준비랄 것도 없었습니다. 열아홉 고3 시절에 서울로 취업해서 상경할 때의 그때의 괴나리봇짐과 비슷했던 거 같습니다. 정말 그랬습니다. 속옷 세 장, 양말 세 켤레, 잠옷 한 벌, 치약 칫솔, 로션 한 개. 그게 전부였어요.
그리고 20년 만에 처음으로 난생처음으로 남편도 없이 딸도 없이 혼자서 여행길을 나섰습니다. 남편에게 늘 주눅이 들어 살았던 것은 아니었는데 2월 어느 날의 그 싸움 이후론 줄곧 굴욕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왜 그렇게 남편에게 오랫동안 쉽게 미안하다고 하며 비굴했던지를 원인을 알아내려 애를 썼습니다. 오랜 생각의 추적 끝에 다다른 생각.
'남편에게는 버림받고 싶지 않다.'
너무 오랫동안 버려지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며 살았습니다. 아홉 살의 정은이로부터 시작하는 두려움입니다. 어느 날, 전주에서 장사를 하고 있어야 할 엄마가 없어진 후로 그 후로는 다시 찾게 된 엄마에게서 들었던 "이젠 엄마라 부르지 말라"는 잔인한 통고를 들은 이후, 또 그 후로는 내 전부라 믿었던 할머니와 동생들을 그까짓 보험료로 잃어버린 이후로.
나에게 남은 건 남편 하나, 딸 하나인데 그 들에게서조차 버림받지 않겠다는 맹목적인 의지가 작용했던 듯도 싶습니다.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파란 수염을 가진 남자의 부인이 된 거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내가 너에게 어떤 부귀영화도 다 줄 테지만 내가 열어보지 말라고 당부한 방의 문은 절대 열지 말아야 한다는 그 금기처럼 남편에게 시어머니와 여동생들은 절대 건드리지 말아야 할 그 남자의 대단한 비밀의 방문 같기도 했던 거 같습니다.
억울해도 서운해도 절대로 넘지 말아야 할 금기, 그 걸 넘는다면 나는 너와 살지 않겠다는 엄포를 받은 가엾은 부인처럼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절대 건드릴 엄두를 내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20년 동안 말입니다.
처음으로 김포공항을 가는 지하철을 타 봤습니다. 팔십이 다 된 노인도 아닌데 혼자 찾아가는 김포공항의 길이 낯설었습니다. 한 번도 혼자서는 가보지 않았던 길이니까요. 남편이 늘 편하게 차로 이동시켜줬으니 혼자서 지하철을 타고 갈 일이 없었습니다.
집을 나서면서 수전을 반짝거리게 닦아놓아야 했던 나의 지독한 청결 벽에 대해 비웃음이 나왔습니다. 내가 지켜야 할 건 수전을 반짝거리게 하는 일이 아니라 어쩌면 내 마음이었을 겁니다.
마음을 안전하게 지키는 일 말입니다. 저는 자존감을 어떻게 높여야 하는지 잘 모릅니다. 물론 책이야 많이 읽었습니다. 그런 걸 열심히 읽으면 공부 열심히 하듯 자존감이 쌓이는 줄 알았거든요. 하지만 현실의 성적표는 너무 초라해서 나는 남편의 '욱질'이 무서워서 나의 딸이 부당하게 대우받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남편에게 어필하지 못하고 미안하지도 않았는데 연신 미안하다고 하고 있었습니다.
20년 만에 남편에게 생활비를 달라고 했습니다. 열심히 성실히 애쓰고 사는 남편에게 도움이 되려고 소처럼 열심히 일하면서 가정을 같이 살폈거든요. 다른 집 여자들처럼 남편에게 생활비를 타서 써 보고 싶었습니다. 그 일로 또 며칠을 말다툼을 해야 했던 것도 숨이 막혔습니다.
그동안은 너의 돈이 내 돈인 듯 내 돈이 너의 돈인 듯 그리 경계를 두지 않고 서로 도우며 살았다 생각했지만 지나고 보니 내 수중으로 비상금 1원이 없더라고요. 적금을 넣어 모으면 목돈을 만들어 남편의 마이너스 통장을 메꿔줬습니다.
남편을 위해 연금을 넣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남편에게서 생활비 50만 원의 요구조차 쉽지가 않아서 그게 마음을 참 힘들게 하고 배신감이 느껴졌던 거 같습니다.
제주도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혼자서 비행기를 타 보는 것도 처음이었습니다. 여태 왜 그러고 살았냐고 내가 나를 나무랐습니다. 남편의 숨 막히는 성실에 같이 부합하려고 도우려 했던 자발적인 희생이었지만 그걸 알아주지 않는 거 같아 자꾸 눈물이 나왔습니다.
그러니 우울증도 아니고 갱년기의 감정 변화도 아닌 게 맞습니다.
사정을 말하고 나의 외로움을 알아달라 설명하는 것도 싫고 귀찮아서 그날도 혼자 울러 밤에 랜턴을 들고 산길을 걷고 있었던 중이었습니다. 딸이 저를 찾는 카톡을 보내더군요. 어디냐고 묻길래 산이라고 그랬더니 어디든 여행을 다녀오는 게 어떠냐고 물었습니다.
그러겠다고 했더니 바로 비행기 티켓과 내가 묵을 제주도의 펜션을 계약을 해준 딸 덕분으로 혼자 여행이 성사된 거였습니다.
제주공항에 내려서 네이버로 검색을 해 봤습니다. 내가 묵을 펜션까지 가는 버스를 검색하고 버스를 탈 곳을 찾는 일까지 더듬더듬하였으나 의외로 잘 찾더라고요. 내가 이걸 할 수 있구나! 하는 안도감과 함께 버스에 올라타고 내릴 때까지도 긴장을 놓지 않았습니다. 도착지에 내려서도 네이버 지도를 켜고 펜션까지 더듬더듬 봉사가 길을 찾듯 그리 천천히 찾아내며 길을 걸었습니다.
마침내 내가 사흘을 묵을 펜션을 찾고선... 뭐라 표현 할길 없는 해방감을 느꼈습니다. 남편이 운전해준 렌터카로 편히 제주도를 다녔던 일과는 너무도 다르게 하루 종일이 걸리는 고행 같은 뚜벅이 여행이었으나 아침에 출발해서 저녁이 다 되어서야 숙소에 들어갈 수 있었으나 이게 뭐라고... 그게 그렇게도 좋았습니다.
가방을 열어 편한 바지로 갈아입고는 숙소 근처의 밥집을 검색해서 산책을 나갔습니다. 식당에 앉아서는 나 혼자 먹을 양치 고는 꽤 많은 양이었는데 가게에서 제일 좋은 메뉴를 두 개나 시켜놓고 실컷 먹고 막걸리도 한 병 마셨습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의 노을이 아직도 잊히지가 않습니다.
골목길의 돌담의 틈새기로 수줍게 손을 내밀고 있던 귤나무의 가지와 악수를 하며 누가 보면 미친 여자처럼 마구 웃었습니다.
'안녕! 나 오늘 여기 놀러 왔어. 혼자서 말이야!'
그렇게 귤나무 가지와 악수를 하고 느릿느릿 숙소로 걸어 올라왔습니다. 서울에선 늘 귀에 에어 팟이 꽂혀 있었습니다. 범죄사건, 살인사건을 주로 다루는 팟캐스트를 주로 들으며 일을 했었습니다. 사람 죽이는 일이 뭐 그렇게 좋을 일이라고 밤이고 낮이고 그런 얘기만 찾아들었던 거 같습니다.
그런데 제주도에 내리자마자 귀에서 에어 팟을 빼놓고 있더라고요. 그리고 귤밭으로 지는 노을을 친구 삼아 책을 읽을 수가 있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도대체 몇 년 만에 읽는 책인지 그 햇수를 헤아려보게 되었는데 무려 3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혼자인 게 무섭지가 않아서 행복했던 저녁이었습니다. 밖에 내려앉은 어둠이 조용한 사위가 두렵지가 않아서 행복했습니다. 침대에 누워 책을 읽다가 문득 깨달아졌습니다.
'나 더는 혼자인 게 무섭지가 않는구나...'라고요.
혼자 여행으로 얻어진 작은 자유 감이 나에게 그렇게 속삭이고 있었습니다.
'정은아, 너 이제는 미안하다고 하지 않아도 될 거야.'
남편에게 그 일이 왜 서운했는지를 무서워서 말 못 하는 내가 왜 그랬는지, 제대로 보였던 여행길이었습니다. 나 혼자서도 할 수 있었구나 싶어서 사소한 길 찾기 마저도 너무 감사하고 행복해서 함박웃음이 터지던 여행의 첫날의 감격 덕분에 제주도 땅을 혼자 밟자마자 서울에서 등에 짊어지고 온 눈물병이 싹 녹아 없어진 기분이 들었습니다.
왜 그렇게 무서워했는지, 안쓰러웠던 거 같습니다. 왜 그렇게 미안하다며 전전긍긍했는지 나의 그 모습이 안타깝고 안쓰럽다고 느꼈습니다.
처음 가져보는 혼자 여행의 만족감으로 밤새도록 밤이 늦도록 소설책 한 권에 혼자 쏙 빠져 폭식한 침대에 누워 책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다음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