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종이꽃 Feb 03. 2024

06. 아빠

이른 초저녁에 남편과 막걸리를 오랜만에 마시고 들어왔습니다. 막걸리는 아빠가 좋아하는 술입니다. 다른 안주 별 거 없이 김치 한 보시기 하나 놓고도 참 맛있게 드셔서 나도 막걸리를 좋아합니다. 많이는 못 마십니다.


한 잔을 빈속에 맛있게 마셨습니다. 빈속에 넣어주는 막걸리 한 잔이 그렇게 맛있습니다. 찌르르하며 빈 위장에 막걸리가 당도했다는 신호가 잡히는 그 순간을 사랑합니다. 그걸 즐기려고 빈 속에 막걸리를 딱 한 잔만 마시는 걸 좋아합니다. 아빠도 아마 이 느낌을 좋아하셨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막걸리를 딱 한잔밖에 안 먹었는데도 초저녁부터 잠이 쏟아져서 책을 몇 페이지 읽다가 9시부터 잠이 들었습니다. 거실에서는 남편이 나와 같이 드라마를 보려고 애타게 불렀지만 혼곤한 잠에 취해 일어나질 못했습니다. 어제부터 내 손에 잡은 책의 제목은 <애쓰지 않아도>입니다.


작년에 사서 읽고 너무 좋아서 중고로 팔지 않고 남겨둔 책인데 또다시 읽는데 책 내용이 모두 새로워서 새 책을 읽는 기분이 듭니다. 단편집을 모아놓은 작가의 필력이 너무 멋진 책이랍니다. 이 책 중에 수록된 단편 중에 그런 내용이 있습니다. 단편의 제목은 ‘우리가 배울 수 없는 것들’이란 소제목인데 극 중의 유리는 송문과 두바이의 한 호텔에서 인턴쉽을 하며 만나게 됩니다. 유리는 송문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송문의 일상을 잠시 엿볼 기회가 생깁니다. 그런데 어느 날, 송문의 아버지가 중국에서 돌아가셨는데도 장례식에 가지 않고 그걸 지켜보는 유리는 송문에게 너무도 흔한 조언을 해버리고 맙니다.  그 말에 송문은 큰 상처를 받습니다.


장례식에 가지 않기로 했다는 송문의 말에 유리는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너희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너의 친부이고 친부에게 그럴 수는 없는 일이라고. 그 말을 하는 유리를 송문은 설득하지 않고 자리를 떠납니다. 그 후로 유리가 몇 번이나 송문을 찾지만 송문은 피곤하다는 이유로 유리의 방문을 거절합니다.  그렇게 소원하게 지내게 되던 어느 날에 송문에게 유리가 종이 한 장을 꺼냅니다. 그 종이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 우리가 알 수 없는 것들, 송문으로 살아온 송문의 마음-


유리는 그제야 송문을 이해한 듯 보였습니다. 아니 이해하려고 애쓴다기보다 아버지의 장례식에 가지 않은 송문을 자기 방식에 대입해 비난하기보다 송문으로 살아온 송문의 방식을 이해하고 미안하다는 말 대신 그런 쪽지를 보낸 유리의 편지에 송문은 그제야 다시 유리와 일상적인 이야기를 공유할 수 있는 친구사이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 어느 말보다 위로가 되었을 거 같습니다. 내가 너로 살아보지 않아서 너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말을 부지불식간에 해버려서 너무 미안하다는 표현을 너무 멋지게 표현한 문장이라 저는 많이 그 구절을 좋아합니다.


막걸리를 먹고 온 저녁에 이 에피소드를 다시 읽고 혼곤한 잠에 빠졌다가 새벽에 또 여지없이 눈이 뜨였습니다. 이번주 매일 되풀이되는 루틴입니다.  새벽 1시에 눈이 뜨이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어 매우 곤란합니다. 책을 읽거나 유튜브 영상을 보거나 영화를 찾거나 하면 될 일이지만 요즈음의 나는 그런 영상들에 마음을 두질 못한답니다.


지난주부터 내가 운영하는 개인유튜브의 영상조횟수가 줄었다고 어제는 쓸데없는 염려를 하다가 오늘은 그 염려가 눈덩이처럼 증폭이 되더니 유튜브를 그만해야 하나까지 생각이 이어졌습니다. 처음엔 조회 수가 떨어졌다고 걱정을 했는데 생각이 꼬리를 물고 가다가 깨달았습니다. 몇 주 전부터 영상 속의 나는 웃지 않고 있었거든요. 나를 보고 나의 에너지를 받는다는 구독자들의 댓글에 힘이 나고 행복했는데 더는 그 행복을 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겁이 실려버렸던 하루였습니다.


1월 12일, 아빠가 돌아가셨습니다. 나는 그 이후로 사실은 잘 웃지를 못하겠습니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일상에서 속울음이 울컥울컥 올라옵니다. 많이 괜찮아진 오른손으로 세수를 하다가 양치를 하다가 화장실에서 세면대를 닦을 때마다 거울이 보이는데 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을 보면 슬퍼지고 생각이 많아집니다.


거울 속에 아빠가 있습니다. 나는 아빠를 너무 많이 닮았거든요. 내가 있어야 하는데 거울에 아빠가 비칩니다.


손도 불편하고 마음도 정처 없고 연재하는 글도 못쓰겠어서 어제오늘은 깊은 강물 속에 끝도 없이 빠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영악하게도 내 마음은 내가 살 길을 정확히 알고 있는 듯합니다. 아빠가 좋아하는 술을 한 잔 마시고 내가 아빠의 장례식에 가지 못한... 아니 가지 않은 타당함을 책 속에서 찾아내고 내가 그들에게서 밀려나 형제들과 같이 아빠의 죽음을 슬퍼하지 못한 대신에 혼자 거울을 보며 거울 속에서 아빠를 만나고 혼자 애통해합니다.


나는 지금 애도의 시간을 지나고 있습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닌 거 같은 느낌이 듭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는 게 더 애통하고 슬플 줄 알았는데 막상 닥쳐보니 아빠가 돌아가신 일이 나를 더 슬프게 합니다. 나는 지금 애도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중입니다. 나로 살지 않아서 나를 이해하지 못할 사람들에게 같이 애도의 시간을 공유해달라 하기 싫어 혼자 감당하고 있습니다.


아빠가 돌아가신 일이... 이렇게 슬플 줄은 몰랐습니다. 세수를 하고 거울을 봅니다. 여지없이 또 아빠가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아빠... 하고 불러봅니다.


아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