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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이꽃 Mar 26. 2020

김밥

그 날의 기억.


그날 새벽, 할머니의 표정은 엄숙하고도 진지했습니다. 그리고 새색시같이 수줍기도 했던 거 같습니다
 
손주들 넷의 눈길을 혼자 받으며 무대 위의 프리마돈나처럼 진지하고도 열띠면서도 간혹 새색시 같은 미소를 띠며 나붓나붓한 손 끝으로, 처음 만져보는 김발 위에 김을 얹고 조심스럽게 밥을 깔고  광희 엄마가 가르쳐준 순서를 되짚어가며 분홍 소시지와 노란 단무지와 시금치 무침과 맛살을 차례로 올려놓은 후, 김발 위의 재료들을 굴리기 시작했습니다.
 
동글동글 눈사람 굴리듯 굴리고 손으로 꾹꾹 만져진 김밥이 김발에서 도마 위에 맨몸으로 굴러 떨어진 순간. 어린 녀석들 넷이 동시에 손뼉을 치며 좋아했던 그 새벽의 시간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도마 위에 수줍게 올려진 김밥은 마른김 위에 올려진 밥이 너무 뜨거웠던 탓으로 좀 쭈글쭈글했습니다. 처음 말아본 김밥인 탓에 압력을 어느 정도로 해야 할지 몰랐던 할머니의 손아귀에서 탄생한 느슨한 김밥은 할머니의 쭈글 하고 힘없이 늘어진 젖가슴을 닮았다고 생각을 했던 거 같습니다. 그래도 9살 계집아이는 마냥 좋았습니다
 
난생처음, 할머니가 싸줬던 김밥이 이 녀석에게는 인생 최초의 소풍 김밥이었거든요. 좀 쪼글 하고 힘없는 김밥이지만 구색은 완벽했습니다. 분홍 소세 시와 초록의 시금치와 노란 단무지와 빨강의 맛살의 색의 조합은 갑자기 궁색해지고 빈한해진 가엾은 손주들을 지키고 싶어 했던 할머니의 가슴에서 나온 천연의 보호색 마냥 알록달록했습니다.
 
쭈글 한 김밥 도시락과 돈 백 원을 챙겨주는 게 할머니가 가진 것의 전부였던 봄 소풍이었다 걸
어린 여자애는 알고 있어서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는데 연년생 터울의 남동생은 무척이나 기뻐서 신나 했습니다. 학교에 가려고 골목을 나섰는데 수진이 언니네 오빠가 물었습니다.
“ 창우야, 소풍 가냐? 할머니가 얼마 주시던?” 하고 물었더니 “ 저 백 원이나 받았어요!!” 하며 우렁차게 자랑을 했거든요.


할머니의 김밥은 점점 횟수가 늘어나도 젊은 엄마들이 싸는 김밥처럼 탱탱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 비스름하게는 레벨업이 되었던 거로 기억이 납니다.
 
음식 솜씨가 좋으셨지만, 신식의 메뉴 앞에서는 좀체 기가 살질 않으셔서 광희 언니네 엄마에게 한참이나 물어보고 설명을 몇 번을 반복해 들으시고도 그 손끝에 망설임이 한가득이었거든요.  그 어려운 쌀강정도 음전하게 잘 만드시는 분이 김밥쯤이야 싶었는데 그게 쉽지는 않았던 거 같습니다.
 
결혼하고 처음 할머니에게 만들어드렸던 음식도 우연히도 김밥이었습니다. 그때는 할머니가 칠십 대 중반의 노인이 되었을 시기였는데 작은아버지가 운영하던 목욕탕 일을 같이 돕고 계실 때였거든요. 욕탕에 수건을 널고 돌아오신 할머니랑 갓 시집간 큰손녀랑 목욕탕 좁은 휴게실에서 김밥 도시락을 나눠 먹었는데 그때 그렇게 저를 기특해하셨습니다.
 
 
“ 아이고, 우리 손 지는 안 갈켜도 이리 김밥을 딴딴 하이 맛나게 싸는구나, 시금치도 잘 데치고 간이 딱 맞는다”
 
그 소리를 쉴 새 없이 하며 좋아하셨어요. 할머니가 자랑스러워해 주는 내 음식 1호가 되었던 젊은 색시의 젖가슴처럼 단단했던 그 김밥을 지금도 너무 잘 만들어 먹습니다.
 
그 자신감이었는진 몰라도 지금의 음식 일을 하게 된 봇물을 열어준 음식도 바로 김밥입니다. 식혜 열병을 만들어 팔아 저축한 자본금으로 김밥 재료를 사 와서 난생처음 대중에게 제가 만든 김밥 서른 줄을 팔아서 지금의 장사 밑천으로 삼았습니다.
 
김밥 한 줄에 삼천 원을 받았더니 주머니에 9만 원이 생기더라고요 그 돈으로 또 다른 음식 재료를 사서 만들어 팔아 수익을 남기고... 그렇게 조그만 눈 뭉치 뭉쳐서 굴리고 굴려서 눈 사람 만들 듯했더니만, 어느덧 음식 장사 십 년이 되었네요.
 
할머니의 늙어 쭈글 해진 빈 젖에서 젖은 말라버렸지만 사랑은 마르지 않았던 이유로 어린 네 녀석들이 대문은 없었지만, 지붕은 있는 집에서 무사히 성장이 가능했습니다.
 
지금도 가끔씩 김밥을 만들 때면 할머니가 난생처음 김밥을 말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수줍기도 하고 비장하기도 한 그 표정으로 도마 위에서 조심스럽게 김밥 재료들을 한 개씩 줄 세워놓던 그 풍경 말입니다. 그날의 김밥과의 첫 조우가 잊히지 않을 명화처럼, 오래 간직된 소중한 한 컷으로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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