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종이꽃 Mar 26. 2020

보리밥 열무 물김치를 그녀에게 주고 싶었다.

그녀와 그녀의 사정.

<그녀와 그녀의 사정>

보리밥을 쪄서 넣은 열무물김치는 6월 초의 막 시작한 여름에 먹기에는 딱 좋은 김치였다. 어제 담아놓은 물김치에 보리밥이 잘 삭아 새콤한 향기를 베란다에서 뿜어내고 있었다. 가볍지는 않은 발걸음으로 잘 익은 열무 물김치를 새지 않는 밀폐 용기에 담고 김밥 두어줄 말아 그녀가 입원해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아이고, 말도 말아라. 큰집 식구들이 얼마나 독한지 아냐? 우리 집 다 망해버리고 너희 아버지 퇴직금도 다 날려버리고 둘째 고모네 옆집 세 들어 살 때 그때 예정이가 나왔는데 그 집도 곧 애가 나온다고 한집에서 애가 둘 태어나면 안 된다고 나보고 큰고모네 집에 가서 애 낳고 오라고 그러잖냐. 내가 그 계단 5층을 올라가서 큰 고모가 애 받아주고는 예정 이를 낳았는데, 아... 글쎄 나보고 피 냄새난다고 태반 빠지자마자 얼른 치우고 집에 가라잖냐! 지그 자식들 오면 냄새난다고. 시상에., 허벅지에 피를 줄줄 흘러가면서 그 5층 계단을 내려오는데 내가 어찌나 기가 막 히던지.


그리고는 집에 가서 누가 미역국 끓여 줄 사람이나 있가니 맹물 끓여서 밥 한술 말아서 먹고 말았는데 훗배 앓이를 허는 것이다.  훗배 앓이가 얼매나 아픈지 너도 알지?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데 내가 비를 맞고 산비탈을 내려오는디 부산 살던 동네 그 산비탈이 좀 경사가 안 지냐.  내려오다가 때 구르르 굴렀는데 어찌 안 죽고 번쩍 일어나 지드란 말이다. 아니고 내가 그 시절을 살았잖냐. 나는 그래서 너네 큰집이 징그러라. 싫어서 내가 상종도 안 한다!
그 시절 살면서 서방은 내 사정을 알아주야는 디 내가 이 눈치 저 눈치 봐가며 내가 한창때는 힘든 줄 모르고 일요일까지 일을 했는데 일을 해가며 27만 원을 몰래 커튼 밑에 숨겨놨는데, 아니! 그 돈이 없어져가지고 내가 얼매나 울었는지 그 일은 석현이도 안다.

근디 그 돈이 어디 간 줄 아냐? 니 아버지가 동네 복덕방 할아버지들 개 잡아 줘 버렸잖냐..! 하이고! 말도 말아라. 내가 그 시절을 살고도 지금꺼정 넘들이 내 형제보다

더 도와줘 살았다. 그니까 너도 너무 돈 벌려고 애쓰고 살지 말어라. 내가 살아본께 세끼 안 굶고 석현이랑 사이좋게 살믄 그러믄 된다.
내가 이것저것 다 해봤는디 가게는 안 힘들 가니 요즘 다 들 직장 그만두고 가게 연다고 안 허냐. 가게도 예전만큼 안되니라. 예림이 하나믄 되니까 아들 낳을 생각도 말어라 아들이믄 좋가니?"

과로로 일주일 입원하신 어머님께 김밥 두어 줄에 열무 물김치 가져다 드리고, 사십여 분 만에 들어드린 이야기이다. 내 추임새는 들어갈 틈도 없이 김밥을 입안에 몰아넣으며 국물 틈틈이 마셔가며 쉼표 안 찍고 쉴 새 없이 이야기보따리가 터져 나왔다.

처음 시집올 때만 해도 어머님께 서러운 기억도 많고 아휴... 그 일은 못 잊지 싶은 기억이 나라고 없었을까만, 시집살이 20년 차가 되어 보니, 가끔은 어머님이 시어머님으로 인식되는 것보다 한 일생을 살아낸 여자로 보이기도 한다.
어머님의 여자로서의 일생의 넋두리가 듣기 싫지 않았다. 한참 들어드리고 택배 보내야 해서 일어나는데 사탕을 몇 개 집어 주신다
이렇게 아주 가끔 살갑게 구시다 가도 돌아서자마자,  득의양양한 시어머니로 돌변하시지만 오늘은 어머니에게서 <시어머니>의 타이틀보다는 같이 세월을 견뎌 내는 여자로 느껴지던 잠깐의 시간을 뒤로하고 또 들린다는 약속을 하며 돌아서며 나오는데 여름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어머님이 훗배앓이 하며 약 사러 나가실 때 맞으시던 비가 이랬을까? 심장에 모래라도 박힌 거마냥 콕콕거린다. 잘 삭은 보리밥이 어머님의 위에 내려앉아 깊숙이 쌓인 한 좀 빼주었으면 하고 바라봤다. 오늘 하루만은 그 여자의 사정을 여자는 알겠다.

작가의 이전글 김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