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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이꽃 Dec 02. 2020

엎어버리든 잘 보이려 애쓰든..

아무래도 오늘은 잠을 반납해야 할 거 같습니다. 멜라토닌 한 알을 먹으면 금세 잠이 왔는데 오늘은 끄덕하질 않네요. 대신 머릿속엔 낮에 수업이 끝난 후 끈덕지게 달라붙은 생각이 떠나질 않습니다.


두 시간이 넘는 합평은 처음 받아봤습니다. 교육원 공모전에 제출했던 (제출에 큰 의의를 두고 행복해했던) 대본을 전문반의 첫 번째 숙제로 제출한 후 오늘 첫 수업에 제 대본이 합평의 대상이 되었거든요. 연수반 시절의 첫 숙제까지만 해도 그런 기대가 있었습니다. ‘아! 칭찬받았으면 좋겠다’, 내지는 ‘ 어느 한구석은 잘 쓰였단 소리를 들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오늘은 매우 담담했습니다. 선생님이 어떻게 가르쳐주실지 그 수업의 내용에 대한 기대로 고3 엄마의 수능 이틀전의 만렙으로 차 오르던 긴장감도 사그라질 정도였거든요. 와... 정말 이렇게 오랜 합평은 처음 들어봤습니다. 온전히 저의 대본으로만 두 시간이 꼬박 걸렸습니다. 그만큼 얼마나 고치고 고쳐야 할지 짐작이 되시지요?

연수반 첫 숙제의 합평 후엔 너무 낙담해서 남편이 맥주를 사주며 위로를 해줘야 했는데 다행히도 이제 그런 걸로 낙담은 안 합니다.


오히려 많이 통쾌하고 나를 옥죄던 나만의 고집과 아집에서 탈출하고 싶은 열망에 잠이 안 올 지경입니다. 그런데 오늘, 잠이 안 오는 이유는 제가 저에게 계속 질문을 하고 있더라고요. 선생님의 수업 방식은 왜?라는 질문을 많이 하십니다.

정은 씨, 주인공 윤자는 왜 이런 행동을 하죠? 이 드라마에서 정은 씨가 생각하는 중요한 사건을 한번 얘기를 해봐 줄래요? 왜 윤자는 자기에게 그런 상처를 준 사람에게 응징을 하지 못할까요?

전 국민이 알게 바람을 피우고 나를 버린 남편이 준 상처에 왜 한 번도 마주하고 싸우질 못하나요?


선생님의 질문에 열심히 대답하면서 알았습니다. 내가 쓴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청승의 틀을 벗지 못하는 이유 말입니다.

저는 저에게 상처를 준 사람과 맞대응하며 싸우는걸... 못 합니다. 예를 들면 시장에서 모르는 사람과 시비가 붙었다면 그건 눈에 쌍심지를 켜고 싸워서 내 권리를 찾아냅니다. 그리고 꼭 정당한 대가를 찾아내곤 합니다. 모르는 사람과는 내 이익을 해하는 일엔 정말 칼같이 시시비비를 가리는데 내 주위의 나와 관계된 사람들과는 얼굴을 맞대고 혹은 카톡으로라도 싸우는 걸 회피합니다. 그리곤 혼자 오래오래 분해합니다.


설령 상대방이 내 앞에서 나를 대놓고 비웃고 또는 망신을 주거나 또는 싸움을 걸어와도 그 무안함을 애써 감추고 태연함을 가장한 채로 그 자리를 얼른 뜨는 거죠. 그리곤 뒤에서 아주 오래 삭히고 아무렇지 않은 척 다음에 또 만나곤 했습니다. 지인들과의 관계에서 저의 대처방안은 딱 두 가지밖에 없었던 듯합니다.

안 볼걸 각오하고 엎어버리든, 잘 보이려 애쓰든... 늘 둘 중의 하나로만 귀결이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질문에 저도 모르게 이렇게 대답을 하고 있었습니다.


“왜 윤자는 자신에게 상처를 준 남편에게 제대로 된 응징을 못하죠?”


“제가 잘 그래요, 선생님. 상처를 준 사람에게서 잘 도망갑니다. 제가 쓰는 드라마에 제가 자주 출몰합니다. 저도 왜 그러는지 잘 모르겠어요.”


현실에서는 그럴지라도 내가 쓰는 가상의 이야기에서라도 속시원히 터트려줘야 하는 건 아니냐고 물으셨습니다. 그 질문엔 이렇게 대답을 하고 있더군요.


“남에게 보이고 싶은 저는 착한 모습만 보이고 싶어 하더라고요.”


아주 오랫동안 자책한 관계의 실패 사례가 있습니다. 십여 년 몸담고 있던 교회였는데 그곳에서도 역시나 그랬습니다. 착하고 헌신적이고 성실하고 바른 모습만 보여주려고 어떤 무리한 요구도 거절을 하질 않았습니다. 김밥 백여 줄의 주문도 원가에 가까운 판매가도 그 바쁜 와중에도 교회에 대한 청소 헌신과 집사님들이 갖은 요구와 모든 부탁을 거의 수용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헌신할 테니 나에게 사랑을 주세요. 돌이켜보면 저의 그 모든 일방적인 헤벌레한 헌신은 그 한 줄로 설명이 됩니다. 나를 제발 예뻐해 주세요. 나랑 놀아줄래요? 내가 심심할 때 나와 커피를 마셔줄래요?

하다못해 커피를 마시고 싶어도 저는 이런 문자를 보내고 양해를 구했습니다.


<집사님, 죄송하지만 잠깐 전화를 드려도 될까요?>


이러저러한 질곡 끝에 교회 안에서 가까스로 그토록 바라던 부구 역장으로 임명(?) 받았을 때였습니다. 오랜 시간 기다려온 목사님이 진행하는 구역장들의 교육을 받으러 오라는 교회의 안내 전화를 받았습니다. 마치 인도의 카스트제도의 제일 밑 계급층에 있다가 한 계단 올라와도 된다는 허락이라도 받은 거처럼 기뻐하던 모습이라니... 제가 그때 그렇게 좋아했던 거 같습니다.


그리곤 새벽에 있는 구역장 모임에 교육을 받으러 갔을 때였는데 기도를 하고 눈을 떠보니 그 넓은 교회 안에서 나만 혼자 앉아있었습니다. 둘러보니 다들 둘이나 셋씩 짝이 있는데 나만 혼자 앉아있더군요. 첫 주는 뭐 그러려니 했는데 3주째 연속으로 그러고 나니 이제는 정말 이 교회를 그만 다녀야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십 년이나 다녔는데 나와 같이 앉아줄 친구 하나가 없는 조직에 더 이상 몸담고 헌신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제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니 참 정말 오래도 미련스럽게도 견뎠더라고요.


너무 오랫동안 잘못된 방식으로 관계를 맺으려 애를 쓰던 제 모습이 깊이 각인된 이 집단에서는 더 이상의 희망을 찾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2년 가까운 상담에서도 교회 안에서의 인간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그 십여 년의 단련 속에서 거절당하기 싫어하는 제가 더 단련이 되어버리기도 한 거 같습니다.


만약 친구와의 대화에서 이런 얘기가 오고 갔다고 합시다. 친구 a와의 오랜 수다 끝에 저의 고민을 들어주던 친구가 이렇게 빈정대듯이 말을 합니다.

“정은아, 나는 제발 이번엔 네가 정신을 차릴 수 있을까란 생각을 했어. 내가 너한테 몇 번이나 얘기했잖아. 너에겐 남편과 딸이 있다고. 제발 네가 가진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도록 해”


내가 아빠에게 고소장을 받은 걸로 넋이 나가 있을 때 들어야 하는 말인지 이게 상황에 맞는 위로인지 되묻고 싶었는데 그때도 그냥 웃으면 그렇게 대답을 했네요.


“그래, 네 말이 맞아. 나한테 남편도 있고 딸도 있지. 충고 고맙다”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는데 말입니다. ‘ 아니, 지금 그 말이 내가 아빠에게 막냇동생에게 고소장을 받은 거랑 무슨 상관이라는 거니? 그게 맥락에 맞는 위로라고 생각해서 건네는 소리야? 너는 그럼 딸이랑 남편이 있으면 너는 친족에게 고소를 당하는 사건에서도 심장이 바들거리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게 금세 평정심이 찾아질 거란 생각이 든다는 거니! 너 그리고 말투가 왜 그래? 나한테 뭐가 그렇게 빈정거리고 싶은 건데?”


이렇게 한바탕 쏘아붙였어야 하는 건데 말입니다. 저는 절대로 그러질 못했습니다. 그냥 다만 그 친구와의 전화를 쉬고 있습니다. 나의 서운한 감정이 사그라들길 기다리면서 말이죠.


다시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가 봅니다. 상처가 되는 감정에서 얼른 회피하고 도망가려는 버릇을 제발 고쳐야 할 때가 온 거 같습니다. 이 문제는 좀 오래 깊이 들여다봐야겠단 생각이 듭니다. 제가 쓰는 드라마의 주인공들마저도 드라마 안에서 감정이 성숙하질 않고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는 걸 오늘 처음 깨달았거든요.

드라마에서 사건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건이 생겨야 그다음 이야기로 넘어갈 수 있는 원동력이 생기거든요. 그런데 제가 쓰고 있는 캐릭터들이 다들 제자리 맴맴으로  사건을 마주 대하질 못하고 빙빙 돌기만 한 채로 울고만 있으니 재미가 있을 리가 없습니다.


인생에 대해서는 꽤 진취적이고 성취력도 높은 내가 관계에서는 아직도 너무 많이 미성숙한 채로 남아 있어서 드라마의 구성이 뻐걱거린다는 걸 오늘에서야 제대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잠이 안 옵니다.


잠이 안 오는 이 새벽에 선생님이 제 앞에 앉아 있는 듯 느껴집니다.


‘정은 씨, 드라마 왜 써요? ‘


‘상처 많은 주인공이 정서적으로 성장하는 모습으로 그걸 보는 시청자로 하여금 감동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드라마 안에서라도 멈칫대는 거 말고 주춤하지도 말고 움츠러들더라도 다시 일어나서 도약하는 주인공을 그려보고 싶습니다.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그들의 상처에 대한 진심 어린 공감과 나의 모순을 이겨내는 글을 쓴다는 건 정말 매력적인 일입니다. 너무 까마득해 보이는 길이지만 너무 가보고 싶은 길입니다.

그걸 지치지 않고 잘 해내려면 오늘 나에게 던져진 수많은 질문들에 대해 깊이 진심으로 고민을 오래 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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