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식혜를 삭힐 때를 제일 조심해서 살폈습니다. 아랫목에 들통을 놓아두고 이불을 덮어두어 반나절을 따뜻하게 해 줬던 기억이 납니다. 귀한 전기밥통이 집에 들어온 이후로는 아랫목을 엿기름물이 담긴 들통에 뺏길 일이 없어져서 편했습니다.
결혼하고 나서 온갖 음식에 관심이 생겼던 제가 할머니에게 식혜 만드는 과정을 물어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재가 안 넘게 조심 혀야 헌다, 잉? 재 넘으믄 못쓴다. 색깔도 거무튀튀해지고 맛이 변혀서 끓여도 못 먹는다”
재 넘는다는 게 무슨 말이냐고 되물으면 그걸 못 알아듣냐며 엄청 답답해하셨습니다.
“하이고, 재 넘는다고! 식혜가 재 넘으믄 안 되아”
어렴풋이 삭히는 시간이 지나치면 안 된다는 말로는 이해가 됐는데 그걸 어떻게 알아채는지가 문제였습니다.
“ 저녁에 앉혀놓고 새벽에 뚜껑 열어보믄 밥알이 서너 개 뜰 거 아녀, 그러믄 그걸 끓이믄 된다. 밥 알이 다 떠버리면 그것이 재넘는거여”
네이버에서 다른 사람들의 과정을 한참이나 살펴 찾아본 후에야 할머니의 말뜻이 다 알아졌네요. 이번 설은 육신은 편했습니다. 수몰된 친정은 흔적도 없고 코로나 덕분으로 음식만 해 보낸 시댁엔 예의만 갖추면 되는 그런 연휴였습니다.
그런데 식혜가 먹고 싶더라고요. 저에겐 식혜가 설날이면 맛볼 수 있는 친정 음식이기도 했거든요.
먹고는 싶은데 의무만 치르면 되었던 명절의 후유증으로 육신이 한없이 게을러져서 엊그제 냉장고에 불린다고 넣어둔 엿기름 통을 오늘에야 꺼냈습니다.
엿기름을 면포에 넣고 찬물에 치대어 물을 만들고 앙금을 가라앉히고 고두밥을 해서 밥솥에 앉혀놨습니다. 이렇게 다섯 시간 정도를 보온 상태로 삭힌 후에 생강을 저며 넣고 설탕 넣고 끓이면 식혜가 완성이 됩니다. 밥알이 물의 표면으로 동동 떠오르기 시작하면 잘 삭았다는 증거입니다.
엿기름물이 더 말갛게 나오길 기다려야 하는데 이걸 또 못 기다리고 이 정도면 되겠지 싶어서 밥솥에 냉큼 붓고는 또 허리에 핫팩 붙이고 냉큼 누워버렸습니다.
물 붓고 치대고 가라앉히고 붓기면 하면 될 일인데 이렇게 간단한데 며칠 동안 너무 하기가 싫었네요. 해먹일 식구가 없으니 더 그랬나 봅니다.
누가 좀 만들어주면 좋을 텐데... 그게 딱 내 성미에 맞게 만들어진 게 있을 리가 만무합니다.
정확한 레시피도 없습니다. 어렸을 때 먹던 그 맛을 혀에 저장된 기억에 지탱해서 손대중으로 만들거든요. 친정에서 만들어먹던...할머니가 끓여주던 식혜는 생강이 들어가서 유난히 더 맛이 좋았습니다. 그 식혜가 먹고 싶더라고요. 친정을 갔다 오느라 막히는 고속도로에서 고생할 일도 없고 마뜩지 않은 시어머니의 표정을 살피며 전전긍긍할 일도 없었는데 몸은 편했는데 그렇게 식혜가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뒷맛 개운하고 가슴골 곳곳에 시원한 청량감을 전달해줄 그 맛이 잘 되살아나 주길 바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