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만 16세가 되던 해인 2002년에 혼자 캐나다로 유학을 왔다. 유년기를 보낸 충청도 시골 마을을 떠나 바다 건너 처음 정착한 곳은 캐나다 동부 온타리오주에 있는 벨빌 (Belleville) 이라는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나의 타향살이 첫 시작을 이곳으로 정한 이유는 한국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인근 도시들을 다 합쳐도 한인 가정이 10가정이 넘지 않았고, 유학 붐이 한창이던 시기였지만 내가 다녔던 학교에도 한국인을 포함한 외국 유학생이 15명도 되지 않았다. 중학교를 졸업 하고 홀로 떠난 유학길이라 나보다 더 어릴 때 유학생들보다 영어를 빨리 배우기 위해 내린 결정이었다.
이곳에서 나는 백인 가정집에서 홈스테이하였다. 유학생들에게 홈스테이를 제공하는 가정은 대부분 비교적 소득이 낮아 수입을 늘리기 위해 홈스테이를 제공했다. 하지만 내가 지냈던 홈스테이 가정은 집에 수영장이 있을 만큼 부유한 가정이었다. 문득 외국인과 함께 살아보면 좋을 거 같다는 생각에 교육청에 홈스테이를 지원해 내가 오게 된 것이다. 그들은 나를 가족의 구성원으로 여기고 친자식처럼 대해주었다.
아무리 그들이 나를 가족으로 여겨주고 나 또한 그곳을 내 집처럼 편하게 사용했지만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바로 배고픔이었다. 외국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아 식사량이 적어서도 홈스테이에서 끼니를 잘 챙겨주지 않아서도 아니었다. 나는 중학교 때 조회 시간에 항상 앞에서 두세 번째에 설 정도로 키가 작았는데 유학을 오고 첫해에만 무려 12cm 이상 키가 자랐다. 그만큼 한창 성장해야 할 시기이다 보니 하루 세끼만으로는 부족했다.
나를 자식처럼 챙겨주는 홈스테이 주인아주머니도 그런 나를 위해 간식도 준비해주시고 음식도 많이 챙겨주셨지만 밤늦게까지 공부하다 보면 늦은 시간에 찾아오는 배고픔이 나를 힘들게 하였다. 그런 배고픈 유학 생활을 이겨 낼 수 있게 해준 것이 있었다. 바로 어머니께서 한국에서 보내주는 소포였다.
어머니는 타지에서 혼자 유학 생활을 하는 내게 정기적으로 한국에서 소포를 보내주셨다. 비행기를 타고 바다 건너온 소포 안에는 내가 좋아하는 한국 과자, 라면, 인스턴트 음식, 그리고 한국 책들이 들어 있었다. 가장 가까운 한인 마트가 차로 2시간 이상 떨어져 있는 시골에 살고 있었기에 어머니께서 보내주셨던 이 소포는 내게는 유학 생활을 이겨내기 위한 구호품이었다.
소포로 받은 라면은 냄새 때문에 끓여 먹기보다는 생라면을 부숴 먹었다. 소포로 온 식료품 중에 가장 좋았던 것은 인스턴트 죽이었다. 늦은 시간에 주방에서 야식을 먹는 모습이 혹시나 홈스테이에서 나를 잘 챙겨주지 않아서 그렇다는 오해를 받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방에서 몰래 간식을 먹었는데, 전자레인지에 돌려먹어야 하는 인스턴트 죽은 화장실 세면대에 뜨거운 물을 받아 적당히 데워서 먹었다. 따뜻한 죽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타지에서 느낄 수 있는 한국 음식 맛이었다.
어머니는 소포에 한국 책들도 넣어주셨다. 주로 신앙 서적들을 보내주셨는데 영어를 배우면서 지쳐있던 내게 한국어로 된 책을 읽는 시간은 잠시 휴식을 가질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일본인 소설가 미우라 아야코가 쓴 ‘빙점’과 ‘이 질그릇에도’라는 신앙 서적이 가장 인상 깊었다. 또 2002년 월드컵이 끝나고 관련된 책들도 여려 권 보내주셨는데 한일 월드컵을 한국에서 보지 못했던 나는 그 책들을 통해서 월드컵을 간접 경험할 수 있었다.
3년간 백인 가정에서 생활을 마치고 고등학교를 졸업 후 대학에 진학하면서 토론토라는 큰 도시로 나오게 되었다. 내가 다니던 대학교에서 지하철로 두 정거장만 지나면 코리아타운이 있었기에 고등학교 시절보다는 한국 음식을 더 쉽게 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학에 진학해서도 어머니께서는 종종 소포를 보내주셨다. 특히 이 기간에는 공부하면서 먹을 수 있는 간식류들을 보내주셨다. 그중 홍삼 초콜릿과 사탕은 늦은 시간 도서관에서 출출한 내 배를 채워주고 잠을 깨워주었다.
대학 졸업 후 이곳에서 취직하고 영주권을 받아 정착하게 되었다. 캐나다 서부의 밴쿠버라는 도시에 살고 있는데 이곳에도 한인 마트들이 많아 한국 음식을 쉽게 구할 수 있게 되었다. 처음 유학을 왔던 2002년과는 달리 지금은 일반 마트에서도 손쉽게 한국 식료품을 구할 수 있는 시대이지만 지금도 어머니는 내게 해마다 한두 차례 소포를 보내주고 계신다.
소포의 내용에는 변화가 생겼다. 과자와 라면 등 간식거리가 아닌 멸치, 집된장, 고추장, 고춧가루, 청국장 등 한국에서 직접 담근 식재료들을 보내주셨다. 내게 소포를 보내기 위해서 며칠 동안 멸치의 똥을 떼어내는 일을 하시는데 아버지도 함께 동참하신다. 결혼하고 소포의 내용물이 이제 아내의 물건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화장품이나 아내가 좋아하는 한국산 마른 해산물 등을 주셨고, 아내가 임신을 했을 땐 미역국을 끓이기 위한 재료들과 태어날 아이가 입을 옷가지들로 가득했다.
해를 거듭 할수록 어머니의 배송 기술도 발전하였다. 진공 포장을 해서 주시기 시작하셨고, 비행기가 아닌 배로 보내실 때는 박스를 테이프로 코팅하듯 감아 습이차지 않게 포장하셨다. 혹 유리병 같은 것을 보내실 때는 수건으로 칭칭 감아서 보내주셨는데 그러다 보니 우리 집에는 나는 한 번도적 가본 적이 없고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의 결혼식과 회갑연 기념 수건들이 많이 있다.
얼마 전 장인어른께서 한국에 다녀오시면서 여행 가방을 하나 가져오셨다. 어머니께서 나와 아내를 위해 이번에는 박스가 아닌 여행 가방으로 소포를 싸주셨다. 가방 안에는 아내가 좋아하는 미역과 쥐포 등 마른 해산물들과 멸치가 진공포장 되어 있었고 아내의 화장품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10년전 내가 첫 직장 생활하다가 한국에 방문했을 때 사드린 캐나다 유명 명품 패딩이 들어있었다. 어머니의 소포 구성물로는 어울리지 않는 이 패딩을 들어보니 그 안에는 내가 즐겨 먹는 홍삼진액과 도리지청이 유리병에 담겨 있었다. 백만원이 넘는 명품 패딩보다도 아들이 좋아하는 건강식품이 더 중요했던 어머니의 명품 포장법이었다. 가방 안에는 신앙 서적도 두 권이 함께 들어있었다.
어머니께서 보내주신 물건들을 하나하나 정리하면서 미역이 들어있는 비닐봉지를 집었는데 비닐봉지에서 나만 알 수 있는 냄새가 났다. 시장에서 한약방을 하시는 어머니의 가게 냄새였다. 아내에게는 그저 한약 냄새였지만 내게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지난 3년 동안 찾아가지 못한 그리운 집 냄새였다. 어머니의 소포가 내게 고향의 냄새를 함께 배달 해 주었다.
가방 안에 있던 신앙 서적 두 권을 책장에 넣으면서 문득 학창 시절 어머니께서 보내주셨던 소포들이 생각이 났다. 20년 동안 어머니의 소포는 바다를 건너왔다. 내가 성장하는 과정과 함께 소포의 내용들은 변화했지만, 돌이켜 보니 변하지 않고 꾸준히 보내오신 것이 있었다. 바로 20년이 지나도록 변하지 않는 어머니의 사랑이었다.
어머니의 소포는 배고팠던 유학 시절을 이겨내게 해준 구호품이었고, 타국 생활을 견디게 하는 집밥 밥상이다. 비록 바다 건너 수만 리 떨어져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가 한 가족이라는 것을 기억하게 해주는 집냄새이고, 20년 동안 계속 된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그리움이다. 내게 어머니의 소포는 특별하다. 그리고 지금도 그 소포에 힘을 얻으며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