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에게 빅엿을 주는 그들만의 언어
내가 스위스에서 살게 되었다는 소식에, 한국의 친구들은 하나같이 물었다.
"그럼 이제 스위스어 해야해?"
꽤나 많은 한국사람들이 스위스엔 스위스어가 있을 거라 기대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스위스인 대부분은 스위스어가 아닌, '독일어'를 모국어로 한다. 위키피디아에서 퍼온 스위스 언어 지도를 보자.
붉은색은 독일어권(63%), 연보라색은 프랑스어권(22.7%), 연녹색은 이탈리아어권(8.4%), 띄엄띄엄 보이는 노란색이 지금은 사라져가는 스위스 고유어이자, 칸톤 그라우뷘덴에서만 쓰이는 로망슈어(0.6%)다.
지도에서 보이다시피, 반 이상의 스위스인이 독일어를 쓴다. 그래, 독일어를 쓴다....그럼 독일어를 배우면 되는거 아니냐고? 그런데 여기서 심각한 괴리가 발생한다. 이곳 말로 '슈빗처뒷치'라 불리는 지독한 독일어 사투리, '스위스 독어' 때문이다. '안녕히 가세요'라는 뜻을 지닌 아래 두 문장을 보자.
예시) 표준 독일어 : Auf wiedersehen! (아우프 뷔더제엔!)
스위스 독어 : Uf widerluägä (우프 뷔더루어개!)
표준 독일어를 배운 사람이라도, 아니, 독일어 원어민이라도 가게에 가서 저렇게나 기대와 어긋난 답을 듣게되면 당황할 수밖에 없다. 개가 짖는 것도 아니고 우프....가 어쨌다고? 이건 그냥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마치 지난 내 심정을 대변하는 듯한 '죄송하지만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라는 다음 문장은 어떨까.
예시) 표준 독일어 : Entschuldigung, ich verstehe Sie nicht. (엔슐디궁, 이히 페아슈테헤 지 니히트)
스위스 독어 : Sorry, ich verschtaa Sii nöd. (쏘리, 이히 페아슈타 지 뇟)
자꾸 위에 점찍힌 글자가 등장하는 게 신경쓰이는 와중에, 난데없이 익숙한 영단어, '쏘리'가 나온다...
볼수록 난해한 스위스 독어의 세계! 자, 이제 여기서 표준 독어와 스위스 독어의 차이를 간단히 정리해본다.
1. 외국어 단어를 자주 쓴다
-스위스 독어는 프랑스어, 영어 단어에 관대해서, 외국 단어를 빌려 자기네만의 표현으로 승화시킨다. 친구들이랑 헤어질 때나 전화를 끊을 때, 이탈리아어 인사인 'Ciao(차오)'를 자주 듣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프랑스어와 독어를 섞어 쓰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프랑스어로 '고맙습니다'는 'Merci(메르시)'인데, 여기에 '매우'라는 뜻을 지닌 독어 'viel mal(필 말)'을 붙여 'Merci viel mal(메르시 필 말)'이라는 전형적 짬뽕 스위스 독어 감사 인사가 등장하기도 한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중국어와 합쳐진 '많이 셰셰합니다'정도가 되지 않을까? ('진짜 이런 말을 쓴단 말이야?'싶겠지만 '메르시 필 말'은 실제로 스위스에 살다보면 하루에도 몇 번씩 듣는 아주 흔한 표현이다)
2. 정해진 철자가 없다
-우리나라 8도 사투리는 비록 그 표현은 다를지언정, 세종대왕님 업적 덕에 모두 일정한 철자로 적을 수 있지만 스위스 독어는 구어체에 기반한 까닭에 정해진 철자가 없어 '쓰는 사람 마음'이다.
3. 표준 독어에 비해 문법이 단순하다
-표준 독어는 주격, 직접목적격, 간접목적격, 소유격 이렇게 네 가지 격이 존재하지만, 스위스 독어는 간접목적격과 소유격을 잘 쓰지 않는다. 시제도 표준 독어에 비해 단순하다.
4. 스위스 독어에만 있는 단어를 쓴다
-표준 독어로 '버터'는 'Butter(부터)'다. 그런데 스위스 독어, 특히 취리히 독어에서는 버터를 'Anker(앙커)'라고 한다. '파이'를 뜻하는 표준 독어는 'Wähe(붸헤)'지만, 스위스 독어로는 '뒤네(Dünnä)'라 부른다.
이 외에도 표준 독어와 전혀 다른, 스위스에서만 쓰이는 단어가 무궁무진하다.
5. 사운드가 강렬하다
-스위스 독어는 오장육부를 쥐어짜듯, 혹은 가래를 잔뜩 모아 내뱉듯 걸걸한 발음이 많다. 특히 'ch'나 'k'가 들어가는 단어에서 이 현상을 더욱 확고히 경험할 수 있다. 스위스 사람들이 외국인에게 장난삼아(?) 스위스 독어를 시켜볼 때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 'Chuchichäschtli(후히해쉬틀리-부엌 찬장이란 뜻)'를 발음할 땐 그야말로 입을 양 옆으로 잔뜩 당기고, 배에서부터 힘을 잔뜩 끌어모은 뒤 목젖을 가래로 진동시킨다 생각하고 힘차게 ch발음을 해줘야 한다.
독일어와 스위스 독어는 우리나라와 굳이 비교하자면 서울말과 제주 방언의 차이 정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방송과 언론 매체, 서적 등이 표준어로 쓰이고, 제주 사람들도 표준어 구사가 가능하지만 지역민끼리는 제주 방언으로 말하듯 스위스 독어도 자기네끼리의 언어다. 고유 지역색과 국민 화합을 다진다는 면에서 바람직하고, (비록 독일어에서 근거한 언어일지언정)자신들만의 말을 쓴다는 자긍심을 심어주지만, 문제는 나같은 외국인의 경우다. 취리히에서 제일 레벨업이 어려운 엄격한 독어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다닌 나로서도 스위스 독어를 알아듣고 구사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이때문에 가족 모임에서도 항상 대화에 활발히 끼지 못하고 주눅들어 있기 마련이고(다들 나를 위해 표준 독어를 써주지만, 제주 사람들끼리 표준어 쓰는 상황이니 자기네끼리도 얼마나 어색하겠는가?), 스위스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가지 못하며, 종종 내 뜻을 펼치기 어려운 때가 있다. 특히 난 표준 독어로 물어봤는데 상대방이 스위스 독어로 대답하는 상황은 정말 좌절감이 든다. (여기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부산 사람들이 표준어 쓰는걸 어색해 하듯 이곳 사람들도 자기 입에서 표준 독어가 나오면 '오글거려서' 스위스 독어로 답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스스로가 '언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면 그때부터 자신감도 떨어지기 마련이라, 안그래도 소심했던 나는 스위스에 와서 스위스 독어 때문에 더더욱 소심해졌다.
이렇듯 그들만의 리그에서 사는 스위스 사람들 때문에, 아예 독일어를 쓰지 않고 영어로만 사는 외국인들도 많다. 표준 독어보다 영어로 물어볼 때 가게에서 더 나은 서비스를 받았던 나의 셀프 실험 결과를 비춰 보더라도, 스위스에서 영어만 쓰는 건 오히려 맘 편하게 사는 방법일지 모른다. 스위스 독어, 너란 악의 축 때문에 지난 7년간 마음고생한 걸 생각하면, 이게 끝이 아니라 앞으로도 수많은 고난이 펼쳐질 걸 생각하면, 억울하고 분해서 잠도 안온다.
그래도 이 나라에 평생 둥지를 틀고 살 터인데, 영어만 쓰면서 모른척 할 수는 없다. 내게 독일어와 스위스 독어는 평생 넘어야 할 산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