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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꽁치킬러 Mar 29. 2022

털 이야기

-털은 털이로되...

한 달에 두 번, 바리깡을 켠다. 남편 등털을 밀어주기 위해.  
 
어린 시절, (지금은 추억의 미드가 된) ‘전격 Z작전’, ‘육백만불의 사나이’같은 해외 드라마를 가족들과 즐겨 봤더랬다. 서양 남자 배우들이 상반신을 벗고 북슬북슬한 가슴털을 드러낼 때마다 엄마는 ‘아이, 징그러워!’를 연발하셨는데, 나는 그런 엄마가 이해가 안됐다.  내 눈엔 괜찮기만 한데... 미래에 털많은 남자를 만날거라는 일종의 계시였던 걸까. 

 서양 사람들이 몸에 털이 많다는 건 상식으로 알고 있었지만, 그 실체(?)를 본격적으로 확인한 건 남편을 만나고부터였다. 남편은 이곳 기준으로 따지면 털이 매우 많은 편이 아님에도(특히 반드시 있어야할 곳에 없다는 것이 함정), 등털이 규칙적으로 수북해져서(!) 한 달에 두 번 정도는 내가 털을 밀어줘야 한다. 다른 부위는 본인이 밀 수 있지만 등은 손이 닿지 않아 내 도움이 필요하다. 등털을 한 달 넘게 밀지 않으면 길이가 3센티 정도로 길게 자라서 얇은 티셔츠를 입을 때 밖으로 튀어나오거나(-_-) 피부를 자극하기 때문에 밀어주는 게 좋다.  남편의 등털을 밀다보면 자연스레 한국서 키웠던 요크셔테리어 강아지가 떠오른다.(결혼 전이었던 그때는 바리깡을 개털이나 밀 때 썼지, 내 남편 등털을 밀 때 쓸거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
남편 같은 유럽 백인 남자들은 대부분 온몸 구석구석에 곱슬털이 난다. 털이 나는 부위도 한국 사람보다 넓은데다, 굵고 뻣뻣하고 성긴 모질을 가진 한국인들과는 달리 바비인형 머리카락처럼 매우 가늘고 가볍고 곱슬거리는 털이라 모량이 훨씬 더 많아 보인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에겐 간신배나 이방수염이 되기 십상인 턱수염이나 콧수염도 스타일링하기 좋게 멋지게 자라고, 수염 부심을 갖고 정성스레 수염을 기르는 남자들도 많다.

(2017년 '세계 멋진 수염대회' 챔피언님의 위엄: 출처-구글)

물론 백인 여자들도 털이 많다. 한국 사람 눈에 잘 안보여서 그렇지, 자세히 보면 팔다리는 물론이고 얼굴까지 부스스한 솜털로 촘촘하게 덮여있다(노란색, 금색, 갈색, 빨간색 등 색도 다양). 아무래도 미의 기준이 전 세계적으로 여성들한테 더 혹독하다보니 이곳 여성들도 팔다리 털을 규칙적으로 미는데, 이처럼 제모가 일상이라 우리나라보다 훨씬 많은 제모 관련 상품과 제모샵이 있다. 누구나  집에서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스트립을 이용한 왁싱, 데운 왁스를 이용한 왁싱. 스트립을 이용한 왁싱은 한 면에 왁스가 발린 스트립을 제모하고자 하는 부위에 넓게 붙이고 잠시 기다렸다 한 번에 쫙 떼어내어 털을 제거하는 방법이고, 데운 왁스를 이용한 왁싱은 말그대로 왁스를 데워서 제모 부위에 넓게 바르고 마르기를 기다렸다 떼어내는 방법인데, 샵에 가서 가끔 하는 은밀한 부위와는 달리 팔다리는 제모를 자주 해야 하니 성가시기 그지없다. 많은 한국인들이 그렇듯, 나도 팔다리에 털이 없어 왁싱의 고통을 평생 모르고 살았는데, 승마를 하다 다리를 다쳐 혼자 왁싱 못하겠다며 도움을 요청한 이탈리아인 친구를 대신하여 왁싱해 주다가 그 번거로움을 실감하게 됐다. 이곳에 거주하는 중동/서아시아 여성들 사이에서도 제모는 흔한 일이다. 백인들보다 털이 진하게 자라 규칙적 제모의 필요성이 더 크다는 이란인 친구는 평생 팔다리 제모 안하고 살았다는 내 이야기에 ‘세상에, 너무 불공평해! 내가 그동안 털 미느라 쏟아부은 시간과 돈이 얼만데!’ 라며 억울해했다.
 서양 남성들은 배와 가슴에 수북히 난 곱슬털 때문에 한국 사람 눈에는 매우 이상한 기현상이 발생하기도 한다. 영어로 ‘navel lint(배꼽 보풀)’이라 불리는 현상으로, 입고 있는 옷에서 나온 섬유먼지가 가슴 및 배털과 함께 뭉쳐서 배꼽에 들어앉아있는  것이다. 남편 배꼽에서 이 배꼽 보풀을 처음 발견했을 때의 당혹스러움이란...(털이 가늘고 모량이 많은 서양인들에게 나타날 확률이 높지만, 한국인들 중에도 간혹 있다니 털이 많으면 인종을 가리지 않고 나타나는 현상인 듯)  

(혐짤주의- 이것이 바로 '배꼽 보풀'_남편 배 아님)

덕 중의 덕은 양덕이라고, 이 배꼽 보풀을 모아서 전시하는 사람도, 예술하는 사람도 있다하니 역시 양덕들의 세계는 심오하다.

(연도별/깔별로 모은 누군가의 배꼽 보풀 컬렉션)

유럽에 살면서 털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해져서 그런지, 한국 남자 연예인들이 탈의한 사진을 보면 ‘어쩌면 이렇게 털 하나없이 피부가 매끈하지…’ 경외감이 든다. 유튜브에서 어떤 미국인 여성이 한국 남자들 몸에 털이 없어서 ‘포옹하면 돌고래 안는 느낌’이라고 표현했던데, 듣는 순간  너무 공감이 돼서 웃음이 빵 터졌더랬다. 


서양인들이 털이 많은 게 ‘진화가 덜돼서’라고 조소하는 사람도 있지만, 모든 민족은 먼 옛날부터 살아온 환경에 맞게 최적으로 진화한 신체를 갖고 있으니 털의 많고 적음으로 우월성을 논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털이 많은 사람도, 적은 사람도 그 자체로 다 멋지고 예쁘다. 다만, 양털처럼 돈이 되는 털도 아니고 아무 짝에 쓸데없는 남편 등털을 한 달에 두 번 규칙적으로 밀어야 하는 건 좀... 귀찮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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