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자가 잘못했네
한 달 전부터 남편의 왼쪽 귀에 문제가 생겼다. 샤워할 때 귓속에 물이 들어갔는데 그게 빠지지 않았는지 먹먹한 느낌이 계속되고, 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는단다. 청력에 전혀 이상이 없던 사람이 갑자기 귀가 안들린다니, 나는 덜컥 겁부터 났다. ‘지난 겨울 걸린 감기때문에 계속 좀 콜록대는데 그게 귀를 자극해서 그런가?’, ‘물이 너무 깊이 들어가서 눈에 보이지 않는 염증이 진행되고 있는 건 아닌가?’ 별 생각이 다 들었다. 내 걱정도 걱정이지만, 본인도 일상 생활이 불편하니 병원에 가보겠다고 예약을 잡았다.
드디어 의사 선생님 만나는 날, 의관을 정제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병원에 간 남편. 그런데 한 시간이 훌쩍 지나도록 집에 오질 않는다. ‘병원은 집에서 도보로 10분도 안되는 거리인데, 대체 뭘하는 걸까. 진찰해보니 안에 무슨 문제가 있어서 조직검사라도 해보는 거면 어쩌지.’ 걱정을 사서하는 체질인 나는 또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상하며 혼자 안절부절했다. 한 20분이 더 흘렀을까, 남편이 묘한 표정으로 귀가했다.
«의사 선생님이 뭐래?! 안에 문제있대? 수술해야 된대?»
불안한 내 눈빛을 읽은 남편은 다소 수줍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게... 사실은 귀지때문이었어.»
황당해하는 내 앞에서 남편은 어쩐지 뿌듯한 태도로 덧붙인다.
«아, 근데 귀지가 엄청 컸어! 거짓말 아니고 진짜 내 손가락 한 마디 길이였다니까. 너도 봤어야 했는데...»
그랬다. 남편 청력 이상의 원인은 귀지였다. 정직함과 올곧음이 황희정승 뺨쳐서 거짓말이라곤 절대 못하는 남편이 손가락 한 마디 길이라고 했으면 진짜로 손가락 한 마디 길이 대왕귀지가 나온 게 맞는 거다.
남편은 백인이라 동북아 사람인 나와는 달리 특유의 젖은 귀지를 갖고있다는 걸 그새 잊고 있었다. 내 귀지는 건조해서 귓속에 쌓이면 구겨진 종이처럼 되어 저절로 밖으로 밀려나오는데, 물기가 많은 남편 귀지는 안에 쌓이면 왁스처럼 굳어버린다는 걸 미처 몰랐다(아니, 상상하기 싫었던 걸지도...).
자기 귀지 크기에 자기도 놀란 남편이 귀지를 발굴해낸(!) 의사 선생에게 혹시 이게 비정상적인 현상이냐 물었지만, 의사 선생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지극히 정상이며, 병원에 규칙적으로 귀파러 오는 사람들도 있다고 대답했단다.
40평생 살면서 귀지 따위를 파러 병원에 가본 적이 없는 나는 타고난 인종적 유전자때문에 겨드랑이 냄새에, 젖은 귀지에, 등털에, 배꼽 보풀을 달고 살아야 하는 남편의 처지가 좀 안쓰러워졌다.
그래도 본인은 귀지가 뽑혀 나가는 순간 갑자기 팡파레가 울리면서 세상의 모든 소리가 귓구멍으로 밀려들어와 흡사 다시 태어나는 기분이었다고 만족해하니 다행이다. 그러면서 ‘예전에 잘 안들릴 땐 내 잔소리를 못들은 척 할 수 있었는데 이제 너무 잘들려서 그럴 수가 없게 됐다’며 등짝 맞을 소리를 하고 앉았다.
이제 2년에 한 번씩 귀지를 파러 병원을 정기 방문하겠다 다짐한 남편. 한 달 고생 끝에 깨달음을 얻었으니 축하를 해줘야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