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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꽁치킬러 Apr 18. 2023

취리히에 봄이 왔다

눈사람 모가지(?)를 날리는 행사와 함께

매년 4월 셋째 주 월요일이 되면 취리히 벨뷰 광장에 커다란 눈사람 조형물이 세워지고 전통 복장을 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취리히의 고유한 봄맞이 행사, '젝세로이텐(Sechseläuten)'의 하이라이트가 펼쳐진다는 신호다. 

젝세로이텐의 주인공, 뵉(Böögg)

'뵉(Böögg)'이라 불리는 이 조형물은 퀄리티가 의심스러운, 매우 조악한 눈사람 형상을 하고 있다. 눈사람이 의미하는 건 너무나 당연하게도 '겨울'이다. 다들 짐작했겠지만 젝세로이텐은 겨울의 상징인 이 눈사람 조형물을 불에 태우면서 봄을 맞이하는 행사다. 

젝세로이텐의 기원은 중세와 닿아있다. 독일어로 '(오후)6시를 알리는 종소리'를 뜻하는 이 단어는 길고 어두운 겨울을 지나 밝고 따뜻한 새 계절의 시작을 알리는 풍습에서 유래했다. 당시엔 하루 노동 시간을 시 자체에서 엄격하게 관리했는데, 겨울이 지나고 따스한 계절이 되면 오후 6시를 알리는 교회 종소리가 울리자마자 다들 하던 일을 놓고 칼같이 퇴근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기쁨을 다함께 나누자고 만든 행사가 젝세로이텐이다. 역시 동서양을 막론하고 칼퇴는 인류의 영속과 전통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는 존재다. 
젝세로이텐은 하루 전 일요일에 치러지는 사전 행사와 함께 시작된다. 다양한 기관과 조직의 사람들이 참가해서 자신이 속한 그룹을 나타내는 의상을 입고 도시를 행진한다. 아래 사진과 같이 취리히 한글학교 아이들도 해마다 꾸준히 참여하고 있다. 

쏟아지는 비를 뚫고 씩씩하게 행진하는 한글학교 아이들(출처: Frau Kim)

그러나 젝세로이텐의 하이라이트는 뭐니뭐니해도 '뵉 태우기'다. 안을 잘 타는 물질로 채운 눈사람 형상의 뵉을 나무나 짚으로 만든 제단 맨 꼭대기에 올려놓고 맨 밑단에 불을 붙인다. 

불타는 뵉...

이렇게 뵉을 향해 불줄기가 뻗어 올라가는 사이, 전통 복장을 한 사람들이 말을 타고 그 주변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다. 불을 둘러싸고 도는 말들과 함께 사람들의 흥분도 고조된다. 이들이 기다리는 건 단 하나, '뵉의 머리가 날아가는 순간'이다. 뵉의 머리가 터지는 순간까지의 시간 기록이 올해 여름의 날씨를 점칠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뵉의 머리가 터지기를 기다리는(?) 인파

뵉의 머리가 펑! 터지는 순간까지의 시간을 기록해서, 그 시간이 길수록 올해 여름 날씨는 좋지 않다고 미리 가늠하는 거다. 심지어 방송으로 실시간 중계하면서 진행자와 같이 뵉 머리가 터지기를 기다린다. 

가장 빨랐던 해엔 19분 만에 터졌지만, 올해의 경우 꽤나 오래 걸려서 무려 57분을 기다려야했다. 하지만 '올해 여름은 날씨가 안좋겠구나' 하고 미리 슬퍼할 필욘 없다. (당연하게도) 여름 날씨와의 상관 관계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우주로 사람도 보내는 21세기에 이 무슨 생산성 없는 비과학적 행사인가 싶겠으나, 그게 젝세로이텐의 재미다. 


스위스에서 젝세로이텐을 접한지도 벌써 9년이 됐지만, 솔직히 눈사람이 화형(?)당해 죽어가는 모습을 생중계로 보여주는 이들의 정신세계는 여전히 100%이해하기 어렵다. 다른 사물도 아니고 굳이 눈코입 다 있는 사람 모양 조형물에 불을 붙여 머리까지 터지는 모습을 봐야 끝이 나는 행사라니. 은은히 돌아있는 뵉의 눈동자를 보노라면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는 자의 체념과 순응이 느껴져 짠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올해도 어김없이, 뵉의 희생과 함께 취리히에 봄은 찾아왔다. 타는 시간까지 얼마나 걸렸는지, 올해 여름 날씨가 좋을지 나쁠지는 지금 신경 쓸 일이 아니다. 길고 추웠던 겨울이 가고, 희망과 설렘이 기다리는 새로운 계절이 왔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이곳 사람들은 그렇게 봄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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