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의 커피 문화
이제 한국에서도 커피는 일상의 흔한 음료가 되었다. 그 전엔 대체 뭘 마시고 살았을까 의문이 들 정도로, 요즘 한국에선 커피가 생활의 일부로 자리잡았다. 2018년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커피시장 규모는 10조원에 이르고, 1인당 커피 소비량은 1년에 512잔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보다 훨씬 앞서 일상적으로 커피를 마시기 시작한 다른 나라들은 어떨까. 2018년 조사 결과에 의하면, 세계에서 가장 커피를 많이 마시는 나라는 노르웨이다. 1년 간 1인당 무려 1315잔을 마셨다고 한다. 하루에 평균 3.6잔을 마신 셈이다. 그 다음 나라는 독일. 1인당 1246잔을 마셨단다. 놀랍게도 3등은 스위스다. 에스프레소니 마키아토니 하는 커피 용어가 탄생한 이탈리아를 기대했건만, 당치도 않게 스위스라니?
사실, 스위스 사람들은 기대 이상으로 커피를 자주 마신다. 2017년 기준 1인당 소비량이 1110잔이었으니 하루 평균 3잔 정도를 마신다는 소린데, 이는 우리 시부모님을 봐도 틀린 말이 아니다. 아침에 눈뜨고 한 잔, 점심 때 식후 소화를 돕기 위해 또 한 잔, 저녁을 먹은 뒤 입가심으로 마지막 한 잔, 이렇게 3잔을 마시면 하루가 지난다.
다만, 이곳의 커피 문화는 우리나라와 다르다. 우리나라는 미국식 커피 문화를 받아들여 아메리카노와 라떼, 카라멜 마키아토 등 일단 양이 많고, 우유가 들어가며, 달달한 커피가 주 메뉴지만 이곳은 에스프레소와 카페크렘, (비교적 양이 적은)카푸치노가 일반적이다.
에스프레소와 카푸치노는 워낙 유명하니 그렇다 치고, 카페크렘은 뭘까?
스위스 어느 곳에 가도 흔히 주문할 수 있는 카페크렘(Café crème)은 '크렘'이라는 명칭 때문에 '크림이 들어간 커피가 아닐까?' 상상하기 쉽지만 실은 카페 크레마(Caffè crema)의 다른 이름으로, 에스프레소를 길게 추출한 룽고(Lungo)와 같다. 비주얼은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메리카노와 비슷하나, 물을 타지 않았기에 맛과 색이 훨씬 진하고 양이 적다. 일반 커피잔 한 잔에 담겨 나오며, 각설탕이나 포장설탕, 수저, 우유나 액상 크림, 입을 헹구기 위한 작은 물잔이 딸려오기 마련이다. 취리히 시내에서 받는 평균 가격은 대략 4.5프랑 정도. 그리고 카페 크렘은 언제나 '뜨거운 커피'다. 안타깝게도 차가운 버전은 없다.
더운 여름날 스위스를 여행하다보면 우리나라에서 어디서든 흔히 마시던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이 간절한데, 바나 레스토랑 가서 자신있게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하면 못 알아들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대부분 '아메리카노'라는 명칭 자체를 잘 모르며, '얼음 넣은 커피(iced coffee)'를 상상하며 '아이스 카페'를 주문하면 기대와는 달리 아래 사진과 같이 '아이스크림을 넣은 커피(Eiskaffee-Eis는 독일어로 '아이스크림')'를 받게 될 것이다.
스위스에서 차가운 커피를 마시고 싶다면 다음과 같은 옵션을 추천한다.
1. 커피 전문점에서 가서 '샤케라또(Shakerato)'를 주문한다. 칵테일 셰이커에 에스프레소와 얼음을 넣고 흔든 커피가 예쁜 글라스에 담겨 나온다.(*주의-한국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마시듯 시원하게 들이키고픈데 양이 개미 오줌만해서 혓바닥만 적시고 말 가능성이 매우 높음)
2. 흔한 카페크렘을 주문한 뒤 얼음을 따로 달라고 한다.(*주의-공짜 없는 스위스 특성상 얼음에 추가 요금이 붙을 가능성이 매우 높음)
3. 그냥 스타벅스에 간다.(*주의-주변에 스타벅스가 없을 가능성, 스위스 물가에 맞춘 사악한 가격에 그 날의 엥겔지수가 눈덩이처럼 불어날 가능성이 매우 높음)
4. 스위스식 패스트푸드 햄버거 체인인 '치케리아(Chickeria)'에 가서 점심을 해결하고, 거기 있는 무제한 음료대에서 얼음을 몽땅 받아 나온 뒤 미그로 Migros나 콥Coop같은 수퍼마켓에서 커피음료를 사서 붓는다.(좀 없어 보이지만 점심과 음료를 동시에 해결하면서 우리나라식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가장 비슷하게 구현할 수 있다는 장점)
몸 속 저 깊은 곳에 꿈틀대는 북방민족의 혈통을 주체하지 못하고 한겨울에도 우득우득 얼음을 씹어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얼죽아'가 아니라면, 위 방법으로 어느정도 차가운 커피에 대한 갈증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변화를 싫어하는 스위스인들이지만 트렌드는 거부할 수 없기에, 기본 중의 기본 메뉴인 에스프레소/카페크렘/카푸치노 외에도 미국/호주/영국식 커피를 만드는 작은 커피숍들이 조금씩 눈에 띄는 추세다. 이제 취리히 도심만 해도 'ViCafe'등 꽤 괜찮은 플랫화이트를 맛볼 수 있는 작은 커피집들이 생겨났다.
스위스 사람들의 커피 사랑은 집에서도 이어진다. 어느 가정에서나 스위스 커피머신 '유라(jura)'또는 네스프레소 머신을 흔히 볼 수 있다.
스위스를 여행할 땐, 근처 바나 레스토랑에서 스위스 국민커피 '카페크렘'을 마시면서 화장실도 가고, 숨도 좀 돌려보면 어떨까. 우리나라와 사뭇 다른 이곳의 커피 문화가 흥미롭게 느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