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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ng Oct 13. 2023

너희의 종소리가 빛이 되어 나에게 닿을 때

쌍둥이 자녀 태오, 루나와 함께 한 3년 6개월

아버지는 손바닥만 한 크기의 작은 종(bell)을 모았다. 본격적인 취미생활로서의 수집은 아니었고, 안식년을 이용해 다녀온 유럽여행에서 각 나라의 특징이 반영된 공통적인 물건을 기념품 삼아 구입하려던 중 우연찮게 종이라는 대상에 꽂힌 것이다. 해외 출장지나 여행지에서 그 도시의 마그넷(fridge magnet)을 사는 나의 습성과 비슷한 결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왜 하필 종을 모았을까. 그 이유를 살펴보기에 앞서, 열 개가 넘는 그 종들이 아버지에 의해 실제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기억할 필요가 있다. 유년 시절 나의 아버지는 상당히 가부장적인 성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가부장적'이라는 표현을 한 가정의 위계질서가 성인 남성을 중심으로 형성된다는 것으로 이해한다. 우리 가족은 정말 그러했다. 대부분의 의사결정은 아버지에 의해 이루어졌고, 구성원 모두가 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지냈다. 누나는 머리에 염색을 하지도, 짧은 치마를 입지도 못했고, 나는 마당에서 회초리로 쓰일 나뭇가지를 스스로 꺾어와야 했다. 아버지가 호출하면 언제든 냉큼 달려가야 했는데, 그때 아버지가 사용했던 것이 유럽에서 사 온 종들이었다. 


딸랑딸랑. 


종소리가 들리면 방에 있다가도 뛰어가야 했다. 아버지도 처음에는 장난으로 시작했을 것이다. 감기에 걸려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을 때 멀리 있는 나를 부르기 위해 소리치기보다는 종을 흔들어 청량한 종소리를 들려주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루에 몇 시간씩 큰 소리로 강의하느라 항상 목이 쉬어 있던 아버지의 목소리를 기억해 보면 나름 합리적인 판단이었다고 생각한다. 종소리를 듣고 아버지 앞으로 뛰어가면, 아버지는 아주 간단한 지시들, 예컨대 물을 한 잔 떠 오라거나 대문 앞에 떨어진 신문을 가져오라는 것 등을 시키곤 했다. 나는 아버지를 무서워했지만, 싫어하지는 않았다. 어린 나이에도 아버지가 가족을 위해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아버지가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권위적인 태도가 적대적인 것이 아님을 어린 나이부터 체득했던 셈이다. 아무튼, 아버지는 종소리에 반응하는 내 모습이 퍽 재미있었는지 가끔 집으로 친구분들을 초대하거나 대학원생들을 불러 강의를 할 때(아버지는 매 학기 대학원 마지막 수업을 항상 집에서 진행했다. 좋은 전통이었다) 일부러 종을 흔들어 내가 달려오는 모습을 지인들에게 보여주곤 했다. 누군가는 아들을 우습게 보였다는 것에 아버지의 장난이 고약했다고 할 수 있지만, 나는 그 역시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른들의 술자리에서 아버지와 내가 콤비가 되어 짧은 스탠드업 코미디를 하나 선보인 느낌이었기에, '아빠와 무언가를 함께 했다'는 사실이 기뻤다. 


2020년 2월, 남아 한 명과 여아 한 명이 아내의 뱃속에서 밖으로 나왔다. 지금도 그 당시 상황을 잊지 못한다. 가벼운 마음으로 차트를 이관하기 위해 방문한 대학병원에서 담당교수로부터 "당장 입원해야 한다"는 말을 들은 다음날부터 한 달가량 입원한 아내는, 출산 예정일이었던 4월 중순보다 약 6주 앞서 제왕절개 수술을 통해 아이를 낳아야 했다. 수술일 당시, 나는 보호자 대기실에서 수술 현황이 나타나는 안내 스크린을 보며 노심초사하고 있었는데, 수술이 마무리되었다는 문구가 뜨자마자 수술실에서 한 무리의 간호사들이 아주 작은 인큐베이터 하나를 끌고 다급히 NICU(Neonatal Intensive Care Unit, 신생아 집중치료실)로 뛰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수술실에서 NICU로 들어가는 그 몇 초의 시간 동안, 나는 인큐베이터 안에 있는 아주 작은 손 하나를 보았다.  그 손을 보는 순간 저릿한 느낌이 들었다. 몇 분 후 두 번째 인큐베이터가 NICU 안으로 쏜살같이 들어갔다. 이후 소아과 주치의로부터 아이들 상태에 대해 간단한 설명을 듣고 병실에서 회복 중인 아내를 만났다. 탯줄을 자를 기회도, 사진을 찍을 틈도 주어지지 않을 만큼 급박한 상황이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어다. 아내 역시 아이들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우리 부부는 아이들의 얼굴을 보기 위해 5일간의 회복기간을 거친 아내가 퇴원하기 하루 전, 산부인과 수간호사에게 개별적인 요청을 해야 했다. 그 수간호사는 소아과에 우리의 사정을 전달해 주었고, '특별히' NICU에 있는 아이들을 잠깐 볼 기회를 얻었다. 당시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부모의 NICU 출입 역시 엄격하게 통제되고 있던 터라 머리부터 발 끝까지 완전 무장을 한 채 들어간 NICU는, 수십 명의 영아들이 간신히 내보내는 미약한 울음소리로 가득했다. 어떻게든 살아보고자 애쓰는 작은 생명들과 그들을 돌보는 의료인들이 함께 죽음에 맞서 조용한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한눈에도 아파 보이는 신생아들을 하나하나 통과한 뒤 마침내 우리 부부가 낳은 아이들 앞에 섰을 때, 놀랍고 흥분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차분한 마음이 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남자아이는 폐기능이 완전히 열리지 않아 2kg을 갓 넘긴 몸으로 무거운 호흡 보조장치를 얼굴에 차고 있어야 했고, 여자 아이는 심장에 구멍이 발견되어 이와 관련된 치료를 받고 있었다. 인간이 이렇게나 작을 수 있다는 사실을 당시 처음 알게 되었다. 내 검지 손가락 두 마디보다도 작은 아이의 발바닥을 바라보던 그 순간, 상당히 많은 것들이 마음속에서 정리되었다. 나는 이들이 부르면 무조건 응하리라. 이들을 살려내기 위해 무엇이든 할 것이다.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소명이었다. 


우리 부부는 꽤 오랫동안 아이를 갖지 못했다. 아내는 결혼 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자녀를 갖는 것에 큰 관심을 보였지만, 나는 조금 시큰둥한 편이었다. 아내를 만나기 전까지 결혼 제도 자체에 회의적이었다. 혼자 생을 마감(?)할 마음으로 직장 근처에 작은 아파트를 하나 구하기도 했다. 나의 유전자를 더 이상 세계에 확장시키지 않고, 그 동네에서 조용히 소멸시키고 싶었다. 그러다 아내를 만났고, 짧은 연애 기간을 거쳐 결혼을 하게 되었다. '이 사람이라면 평생 사랑하며 함께 살 수 있겠다'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결혼을 하였듯, '이 사람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라면 낳아도 괜찮겠다'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아이를 갖자는 아내의 말에 어렵지 않게 생각을 바꾸었다. 하지만 서울에서 맞벌이 신혼부부 생활을 할 당시에는 업무에 지쳐 집에 오면 함께 쓰러져 잠들기 일쑤였고, 각자의 생업에 집중을 하던 터라 아이를 갖는 것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러다 내가 학교에 임용되면서 서울을 떠날 기회를 얻었고, 아내는 미련 없이 직장을 관두고 나를 따라 내려왔다. 생활에 조금 더 많은 여유가 확보되었고, 마음이 편안해지니 이내 아이가 아내의 뱃속에 자리 잡았다. 우리 부부는 3년 넘게 아이가 생기지 않은 초조함에 대전에 있는 난임 전문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있었는데, 정기 검진을 위해 대기하던 중 아내가 "오빠, 나 왠지 이번에 쌍둥이일 것 같아"라고 말했던 순간이 생각난다. 실제로 아내는 의사를 만나고 나오면서 나를 보며 씩 웃었다. 


"오빠, 내가 쌍둥이라고 했지? 이 사진 좀 봐." 


초음파 사진에는 하얀 점 두 개가 찍혀 있었다. 그 점들이 아이들이라고 했다. 하얀 점 두 개가 내 삶의 목적을 바꾸었다. 그날 병원 주차장에서 양가 부모님께 임신 사실을 전해 드리면서, 나를 위한 삶이 종료되었음을 마음속으로 선언했다. 그날부터 나의 삶은 전적으로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 헌신될 것이었다. 나는 그 누구보다 내 삶이 그렇게 변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쌍둥이는 약 2주의 시간을 NICU에서 보낸 후 순차적으로 퇴원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 어엿하게 이름을 가지게 된 남자아이 태오가 먼저 집으로 왔는데, 그날 밤 나와 아내, 그리고 장모님까지 세 명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음에도 밤새 우는 아기를 달래지 못해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그 후로 초보 부모는 먹이는 것, 재우는 것, 씻기는 것까지 육아의 모든 것을 새롭게 배워야 했다. 운이 좋게도 우리 부부는 아주 좋은 산후 도우미를 만났다. 아주 당차고 씩씩한, 그리고 아이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 넘치는 분이었다. 그분에게 아기를 씻기는 법, 분유를 먹이는 법, 아기를 안아 재우는 법, 운동시키는 법, 그리고 집안을 정리하는 요령까지 신생아 육아의 거의 모든 것을 전수받을 수 있었다. 여자 아이 루나는 2kg이 채 되지 않는 저체중으로 태어났는데,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온 날 도우미 이모님이 매우 안타까워했던 기억이 난다. 그분은 우리 가족과의 업무가 종료된 후에도 한참 동안 함께 연락하며 지냈다. 이모님은 우리 가족을 만날 때마다 루나를 처음 본 날을 회상하며 그렇게 얇고 작은 아기 다리는 처음 봤다며, 당시의 안타까움을 회상하곤 했다.


나에게는 아기들의 정신건강에 특히 더 큰 염려가 있었다. 흔히 말하는 '가족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삼촌은 정신질환으로 고통받다 일찍 생을 마감했다. 아버지는 스스로를 "가벼운 자폐증 환자"라고 부를 정도로 사회적으로 폐쇄적이었다. 은행 ATM에서 현금인출하는 법조차 모를 정도였던 아버지를 대신하여 가족의 모든 대소사는 어머니가 일임하여 처리해야 했다. 아버지의 여섯 형제 중 결혼한 사람은 막내 고모 한 명뿐이었다. 평균적인 가족의 구성은 아니었던 셈이다. 아이들이 아프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모든 부모의 공통적인 소망이다. 나 역시 아이들이 육체적, 정신적으로 부디 건강하게 성장하기를 간절하게 바랐다. 그래서 유난히 아기들 곁을 떠나지 못하고 세밀하게 관찰하려고 애썼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나중에 그 어떤 후회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혹시라도 내가 잘못해서, 나 때문에, 나의 탓으로 아기들이 건강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때 얻을 상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준일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기들은 24시간 나를 찾았다. 그들이 내게 보내는 신호는 울음소리였다. 울음소리에 즉각 반응하여 그들의 요구사항을 신속하게 파악하고 이에 대응하는 것이 나의 가장 큰 소명이었다. 새벽에 잠을 자지 못해도, 아이들을 돌보느라 동료들에 비해 연구 실적이 조금 떨어져도, 강의가 끝나자마자 집으로 달려와도, 지인과의 식사약속을 1년 동안 단 한 번도 잡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아기가 울면 달려가고, 안아 달래고, 먹이고, 소화시키고, 함께 놀다가 재우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잠시 누웠다가 아기가 울면 벌떡 일어나 또 달려갔다. 비록 아기들은 손과 발이 너무나도 작아 스스로 가벼운 물체를 집어 들기까지도 오랜 시간이 필요했지만, 그래서 아버지가 흔들었던 종은 아마 차마 들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지만, 그들만의 방식으로 나를 호출했다. 나는 그 호출이 즐거웠고, 오히려 고마웠다. 잠이 부족해도, 일이 쏟아져 정신없이 바쁠 때에도, 아이들의 꼬물거리는 모습을 바라보면 모든 걱정과 근심이 씻겨 내려갔다. 태오가 처음 일어나 걸었을 때, 루나가 뒤집기에 성공했을 때, 태오가 처음으로 "아빠"라고 말했을 때, 혹은 그냥 평범한 어떤 날에 나를 보고 웃어주었을 때, '사랑'이 정말 존재함을 느꼈다.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오늘, 당장, 지금 행복하다고 느낄 때는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늘 사후적으로 과거의 행복을 기억할 뿐이었다. 하지만 아기들과 함께 살아가기 시작한 후, 살아가는 매 순간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때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아기들의 호출 신호는 점차  울음소리에서 옹알거림, 그리고 "아빠"라는 호칭으로 바뀌어갔다. 출생 후 3년이 지난 지금은 나를 따로 부르지 않고 살며시 뒤로 다가와 끌어안는다던지, 볼에 뽀뽀를 하는 방식으로도 신호를 준다. 태오는 밥을 먹거나 책을 읽던 중 아무런 이유 없이 갑자기 어깨를 툭 치곤 하는데, 그 행동이 마치 "잘하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와 같은 격려로 느껴져 가끔 울컥할 때가 있다. 루나는 요즘 "아빠랑 있는 게 너무 행복해요."와 같은 감정표현을 자주 한다. 정말 행복해서인지 어디에서 듣고 온 말을 되풀이하는 것인지 알 길이 없지만, 딸바보인 나는 그저 행복하고 고마울 뿐이다. 요즘에도 나는 아이들과 살을 맞대고 잠들어 함께 일어나고 밥을 해 먹어 함께 나눈다. 심지어 만 두 살이 지닌 뒤부터는 내가 근무하는 학교 내 어린이집으로 아이들과 함께 출근하여 등원시키고, 퇴근길에 하원시켜 함께 집으로 온다. 아이들이 있는 교내 어린이집 바로 옆에 교내 식당이 하나 있다. 혹시라도 놀이터로 놀러 나온 아이들을 볼 수 있을까 싶어 점심도 그곳에서 자주 먹는다. 


아버지의 종소리를 기다리는 마음과, 아이들의 "아빠!"라는 외침을 기다리는 마음이 같을까.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버지가 왜 종을 흔들었는지 알 것 같기도 하다. 내 이름 중 하나는 쇠북 종(鐘)을 쓰고, 다른 하나는 빛날 혁(爀)을 쓴다. 어렸을 때에는 내 이름에 불만이 많았다. 종은 소리가 예뻐야 그 역할을 다하는 것이므로 쓸데없이 겉모습이 빛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내 이름의 의미를 조금 더 그럴듯하게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종소리는 귀로 들리기도 하지만, 가끔 환한 빛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나는 실제로 그것을 느꼈다. 아이들이 내 이름을 부르며 뛰어오는 모습에서 내 인생에 한줄기 빛이 내려옴을 느꼈다. "아빠, 공룡 인형 좀 찾아주세요."라고 부탁하는 태오의 눈동자에서 맑은 빛이 새어져 나옴을 느꼈다. 아마 아버지도 종을 흔들었을 때 비슷한 마음이 아니었을까? 종소리를 듣고 뛰어오는 나의 모습에서 무언가를 느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태오와 루나가 나에게 와주어 고맙고, 함께 있어주어 고맙다. 그리고 이런 나를 있게 해 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도 고맙다. 많은 이들이 나에게 빛을 비추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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