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키우며 만난 산후도우미 P에 대한 이야기
우리가 사는 사회에는 수많은 '이모'가 존재한다. 국립국어원은 이모를 '어머니의 여자 형제를 이르거나 부르는 말'로 정의한다. 이를 좁게 해석한다면 나에게는 두 명의 이모가 있다. 어머니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여자 형제로, 어머니와 같은 돌림자를 쓰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정확히 두 명이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나에게는 한 명의 이모가 더 있었다. 우리가 '정자 이모'라고 불렀던 그분은 어머니 가족의 보모였다. 어렸을 때 어머니의 부모로부터 거두어져 숙식을 제공받는 대가로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집안의 어린 아기들을 돌보아 주고 집안일을 거들어 주던 분. 어머니는 그분을 '정자 언니'라고 불렀다. 형제들이 모두 출가한 후 오랫동안, 정자 이모는 어머니와 이모들이 만나는 모임에 항상 함께 나오셨다. 어머니가 나를 그 모임에 자주 데리고 갔기 때문에 똑똑하게 기억한다. 하지만 첫째 이모가 치매에 걸려 사람을 알아보기 힘들어지고 둘째 이모와 어머니가 정치적 견해 차이로 사이가 멀어진 후 그 모임은 자연스럽게 중단되었고, 정자 이모와의 연락도 차츰 줄어들었다.
중요한 것은 어머니가 정자 이모를 '언니'로 인식했다는 것이며, 나는 그분을 다른 이모들과 함께 어머니의 형제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어린 내게 어머니와 정자 이모와의 관계에 대해 명확히 설명해주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나는 앞서 말한 '좁은 의미'의 이모가 아닌, 조금 넓은 의미의 '이모'의 개념을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후 대학에 들어간 후 술집에서 소주를 건네주시는 이모를 만났고, 회사 화장실을 청소하는 이모를 만났으며, 가판대에서 물건을 파는 이모를 만났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우리가 사는 사회에는 수많은 종류의 '이모'가 존재한다는 것이며, 그 이모의 개념을 이해함에 있어 국립국어원에서 사용한 정의를 그대로 가져와도 크게 무리가 없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물론, 이 정의에서 사용된 '어머니'와 '형제'의 개념 역시 상당한 폭으로 확장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이 사회에서 받아들여지는 '어머니'는 누구이며, 그의 '형제'들은 누구인가. 혹은 누구여야 하는가. 이제부터 쌍둥이를 낳은 후 만난 한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이에 대해 논해보려 한다.
우리 부부는 그와의 첫 만남부터 그를 "P이모님"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P"는 그의 성이다. 산후 돌봄 서비스 업체와의 계약서를 통해 그의 전체 이름을 알고 있었지만 우리가 함께 한 몇 달의 기간 동안 그의 이름 전체를 불러본 적은 없다. 그는 우리 집에서 항상 '이모'였으며, 그 자신도 스스로를 "이모"로 지칭했다. 물론 사설 산후 돌봄 서비스 업체에서 고용된(사실 정식 고용된 형태가 아니라 업체에서 산후 도우미를 개인사업자 형태로 등록하게 한 후 형식적으로는 '알선' 명목의 수수료를 부모로부터 받는다. 하지만 산후 도우미는 업체에 여러 가지 측면에서 종속되어 있다. 이러한 편법적 고용유지 형태에 대해서는 별도의 기회를 통해 자세히 이야기하려 한다) 직원들을 지칭하는 공식용어는 '여사님'이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그 호칭 역시 한 번도 사용해 본이 없다. P이모는 이름을 부르기에는 어려운 사이였지만 그렇다고 '여사님'이라고 높여 부르기에는 너무 가까운, 그런 존재였다. P에 대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참 많다. 그에 대해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 이미 마음이 벅차오르고 손 끝이 떨려온다. 이러한 나의 욕망을 최대한 억제한 채, 꼭 이 자리에 기록해야 하는 것에 집중하려 한다.
출산은 순탄치 않았다. 쌍둥이의 공식 용어는 '쌍태아'다. 쌍태아는 기본적으로 고위험군에 속해 임신 중 행하는 거의 모든 검사에서 담당의사의 미간을 찌푸리게 만든다. 어쩌면 장삿속일지도 모르는 비싼 검사들을 통과하는 와중 아내는 결국 대학병원에 한 달 이상 입원을 해야 했고, 쌍둥이는 예상보다 6주 먼저 태어났다. 조리원은 언감생심이었고 우리는 아기들 없이 조용한 아파트에서 매일 짜낸 모유를 병원으로 실어 나르며 아기의 심장에 뚫린 구멍이 닫혔는지, 아직 완성되지 못한 채 바깥공기를 받아들여야 했던 폐는 정상적으로 회복했는지 전화를 통해 소식을 전해 들었다. 아기들은 약 4주가량의 신생아 중환자실(이를 줄여 '니큐(NICU)'라고 부른다) 입원 생활을 마치고 퇴원했다. 미숙아로 태어나 팔다리가 앙상한 아기를 P이모가 현관에서 받아 들었다. 아기를 씻기고 포대기에 싸서 재우고, 모유와 분유를 먹이고, 트림을 시키고, 다시 재우고를 반복했다. 그 와중에 아기와 관련된 물품을 정리한 뒤 우리 부부를 위해 식사까지 차려주었다. 이미 청소와 빨래는 끝나 있었다. 처음 낳아보는 아기를 어찌할 줄 몰라 절절매는 우리에게 구세주나 다름없었다. P이모가 퇴근한 5시부터 출근하는 다음날 아침 9시까지 우리는 전쟁을 치렀고, P이모가 출근 한 이루 거짓말처럼 집은 평화를 되찾았다.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예상했던 시간보다 빠르게 완료되어 있었고,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까지 정리되어 있었다. 손이 무척 빨랐고 몸은 기민했다.
그와 동시에 말도 많았다. 자신을 과장해서 포장하거나 없는 사실을 떠벌리는 유형은 아니었다. 타인에 관심이 많고 직설적인 표현을 두려워하지 않았는데, 당차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아내조차 P이모의 기세에 눌려 제대로 말대꾸를 하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대화 중 상대방을 무시하려는 의도는 거의 발견되지 않았으며, 내가 생각하기에 P이모는 그저 말을 하고 싶은 욕심에 가끔 선을 넘는 경우가 있을 뿐이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P이모는 업체에서 자랑하는 쌍둥이 전문 도우미였다. 앞서 말한 것처럼 손과 몸이 무척 빠르고 단 한순간도 쉬지 않기 때문에 다른 도우미가 아기 한 명을 볼 때 두 명, 세 명을 볼 여력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본인도 수당이 높은 쌍둥이 집에 가는 것을 선호했다. 일은 고되지만 다른 도우미들이 쉽게 할 수 없는 경험을 쌓을 수도 있었다. 문제는 본인의 경험을 지나치게 자세히 다른 집에 가서 이야기한다는 것이었다. P이모가 우리 집에 들어온 처음 한 달 동안, 우리 부부는 원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P이모의 전 근무지였던 다른 쌍둥이네 가족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알게 되었으며, P이모의 다음 근무지에서 우리 가족의 생활상이 드러날 것이 가끔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P이모와의 관계가 두터워지면서 '그것은 또 그것대로 괜찮지 않나'하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P이모의 그 수다스러움을 의무적으로 받아들여주기로 마음먹으면서부터 그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생겨났던 것이다.
아내가 가끔 외출을 하는 날, 나는 P이모와 단 둘이 아기들을 보는 기회를 가졌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루 종일 P이모와 1대 1 대화를 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산모였던 아내는 내가 출근하더라도 방에 들어가 휴식을 취했던 반면, 나는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되도록 P이모의 주 근무공간인 거실로 나와 아기들을 돌보는 법에 대해 물어보는 쪽을 택했다. 물론 대화는 거의 대부분 P이모 개인의 이야기로 주제를 바꾸어 굽이굽이 넘실거리기 일쑤였다. 나중에는 아내도 P이모와의 대화에 제법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P이모는 딸이 한 명 있었다. 인근 도시에서 딸과 단둘이 산다고 했다. 원래는 수도권의 한 위성도시에서 미용실을 했는데, 어떤 이유로 인해 P이모의 어머니가 살고 계신 고향으로 딸을 데리고 돌아왔다. "아이 아빠"로 지칭되던 딸의 아버지는 멀리 떨어진 다른 도시에서 일한다고 했다. 그와 이혼을 했는지, 혹은 정말 일 때문에 잠시 떨어져 사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끝내 물어보지 않았다. 그의 삶에서 남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버지를 증오하는 쪽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인간적인 연때문에 잠시 슬퍼지긴 했지만, 결코 동정심이 들지 않았다고 말했다. 아주 분명하게 또박또박 말했다. 그 때문에 너무 힘들었다고. "아이 아빠" 역시 자신의 삶을 내게 풀어내는 과정에서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 가끔 딸아이가 아이 아빠에게 용돈을 받았다는 말을 스치듯 할 때가 전부였다.
대신 그의 삶은 딸이 거의 모든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지금 하는 일도, 과거에 했던 미용일도, 그리고 앞으로 꿈꾸는 계획들까지 그의 삶 구석구석에 딸의 존재감이 육중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몇 번의 실패 끝에 어렵게 가진 아이가 너무 소중해 끌어안고 키웠다는 그는, 이제 십 대 고등학생이 되어 자신의 방으로 발 한 발자국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딸이 야속하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너무나 사랑한다고 힘주어 이야기했다. 그는 매일 딸에 대한 새로운 걱정거리를 우리 부부에게 가지고 왔다. 우리의 하루 대화는 그의 딸에 대한 걱정으로 시작해 우리 부부 나름대로의 해법 제시를 통해 그를 안심시키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사실 우리 입장에서 볼 때 그 걱정이라고 하는 것도 사소한 차원에 불과했다. 예를 들어 학원을 하나 더 보내달라는데 보내야 하는지, 선배들과 주변 바닷가에 놀러 간다는데 허락을 해야 하는 건지, 어제도 소리를 지르며 방으로 들어가는데 가슴이 무너져 내린다던지 하는 것들. 십 대를 거쳐온 내 입장에서 볼 때 이는 '부모와 자녀가 멀어지는' 극히 자연스러운 과정이었지만, P이모는 그것을 처음 겪어보는 중이었으며, 그의 삶을 지탱하는 오직 하나의 이유인 딸과 멀어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에는 딸에 대한 사랑이 너무나 지극했다. 우리 부부가 아기를 처음 낳아 허둥지둥거릴 때 P이모가 옆에서 차분히 많은 것들을 챙겨준 것처럼, P이모가 처음 겪어보는 십 대 소녀의 변화무쌍한 감정과 수험생이 받는 복잡한 차원의 스트레스를 알기 쉽게 풀어 설명하는 것이 그와의 대화에서 나와 아내의 역할이었다.
P이모는 무척 총명했다. 이사 온 날 그대로 방치되어 있던 주방의 수납공간을 자신만의 기준에 맞추어 깔끔하게 정리했다. 아기 목욕시키는 법, 머리 감기는 법, 울지 않게 포대기를 단단히 싸매는 법, 트림시키는 법 등 육아와 관련된 많은 지식을 전수해주었다. 발생할 수 있는 불상사를 대비하기 위해 거실에 카메라를 설치하라고 말한 것도 그였다. 그는 또한 무척 용감했다. 미숙아로 태어나 대학병원 갈 일이 많았던 출생 후 첫 몇 달 동안 P이모는 항상 우리와 동행했는데, 쌍둥이 둘 중 한 명은 반드시 자기 손에 두었으며 풍부한 소아과 내원 경험을 바탕으로 아기들의 피로도를 최소화시키기 위한 방법들을 찾아냈다. 한 번은 채혈을 하는데 미숙한 젊은 의사들이 좀처럼 혈관을 찾지 못해 여기저기 아기의 작은 손을 찌르느라 아기가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이를 보다 못한 P이모는 아기를 의사로부터 뺏듯 안아 들고("그러면 아기 아프잖아요! 이리 주세요!") 다른 채혈실로 달려가 기어코 실력 좋은 의사를 찾아내어 성공적으로(?) 채혈을 마친 후 아기를 안정시키는 것까지 완료했다. 그 과정이 내 눈에는, 뭐랄까, 아기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단지 산후 도우미라는 이유만으로 하기에는 지나치게 과감한, 그런 행동이었다.
이를 확인한 순간이 하나 있다. 아내가 외출한 어느 날, 나는 서재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방 문을 닫고 조용히 오랜 시간 있었던 나머지 P이모는 나중에 내가 그날 아내와 함께 외출한 것으로 착각했다고 한다. 화장실에 가기 위해 아기들을 재우는 작은 방을 지나치는 순간 그 안에 있던 P이모의 모습이 보였다. 아기를 들어 안고 활짝 웃고 있는 모습. 어쩜 이리 예쁘니, 어쩜 이리 예쁠까, 속삭이며 껴안아주고 토닥거려 주던 P이모의 모습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 순간 이후 나는 P이모가 하는 모든 이야기를 잘 들어주기로 결심했다.
총명하고 용감한 P이모는 이러한 나의 결심을 간파했는지 조금 무리한 부탁도 서슴지 않고 할 때가 있었다. 한 번은 딸아이를 위해 내게 녹음을 부탁했다.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그에게 그 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의 국립대 교수인 나는 조금 다르게 보였을 수 있다. 시험을 잘 치르지 못해 좌절한 딸에게 용기를 주고 싶다던 그의 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나는 당시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좋은 느낌의 단어들을 조합하여 얼굴 한번 보지 못한 한 십 대 소녀의 기분을 살리기 위한 문장들을 만들어내야 했다. 장장 5분에 걸친 녹음파일을 완성하기 위해 심지어 몇 번의 NG컷도 나왔다. 총명한 그는 성에 차지 않는 표현에 대해 과감한 수정을 요구했고, 나는 입시를 앞둔 수험생의 심정을 이해하기 위해 20년 전 어두운 과거까지 소환해야 했다. 나중에 아내에게 진땀을 뺀 이야기를 전해주자 아내는 "그렇게까지 맞춰주어야 하냐"며 나의 무른 성격을 지적했다. 나는 그렇게 해주고 싶었다고 답했다. 진심이었다. P이모는 어느 순간부터 좋든 싫든 나의 '이모'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P이모는 우리 가족과 3개월을 함께 했다. 정부가 산후 돌봄 서비스를 지원하는 기간은 공식적으로 한 달이다. 보건복지부에서 발표한 "2021 산후조리 실태 결과 발표" 보도자료에 따르면, 산모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산후조리 기간은 평균 약 71.1일로 정부의 지원기간과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우리 부부는 사비를 들여 P이모와의 계약을 두 달 더 연장하였는데, 이별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다. 앞서 잠깐 언급한 것처럼 사설 산후 돌봄 서비스 업체는 각 가정에 파견되어 서비스를 제공하는 도우미 '여사님'들을 직접 고용하지 않는다. 이들로 하여금 개인사업자를 등록하게 한 뒤 구매자(산모) 측으로부터 알선비 명목으로 전체 서비스 금액의 일정 부분을 받는다. 이를 위해 구매자에게 도우미의 개인 통장으로 나머지 금액을 송금하라고 유도한다. 이렇게 도우미와 구매자 간 직접 거래하는 것처럼 꾸미는 이유는 4대 보험 등 직접 고용에 따른 부대 비용을 줄이고 매출액을 과소 계상하여 세금을 회피하려는 목적 때문으로 추정된다. 문제는 도우미 여사님들은 업체에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돌봄 서비스 관련 교육을 받아야 하며, 연차가 쌓이면서 내부적인 '직급' 및 처우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즉, 사실상 업체에 도우미가 종속되어 있는 형태인데, 우리는 그 직접적인 증거를 P이모와 업체 간 관계로부터 확인할 수 있었다. 돌봄 서비스 계약은 통상 한 달 단위로 연장된다. P이모처럼 솜씨 좋은 도우미의 경우 이들을 미리 '선점'하려는 문의가 업체로 들어오고, 업체는 이들로부터 소정의 예약금을 받은 뒤 P이모의 향후 일정을 고정시켜 버린다. P이모는 이 점이 못마땅했다. 형식적으로는 개인사업자지만 정작 일하고 싶은 일터조차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는 점이 불공정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와 더 오래 있고 싶어 했다. 하지만 이미 업체 측으로부터 다음 달부터 다른 집으로 가라는 통보를 받은 상태였다. 그는 업체가 '민원' 및 '아빠'에 약하다는 점을 들어 나에게 업체에 항의 전화를 할 것을 부탁했다. 큰소리 내는 것에 아무런 재능이 없던 나는 어쩔 수 없이 용기를 내어 업체에 화를 내는 '척'을 해야 했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P이모는 업체로 불려 가 크게 혼이 났고, 그날 우리는 P이모로부터 "정말 죄송하다"는 문자를 받았다.
만약 업체의 눈 밖에 나서 당장 일이 끊길 경우, P이모는 딸아이를 온전히 키워낼 수 없을 것이라는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한 달 단위로 이루어지는 산후 돌봄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많은 '이모들'은 매 달 일터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려야 한다. 하지만 이들은 법적으로 고용상태를 보호받지 못한다. 법적으로는 '개인사업자'이기 때문이다. 업체로부터 보장받는 4대 보험도 없고, 당연히 월차 및 연차 휴가도 없다. 공휴일에도 사용자 측(산모 측)에서 나와달라고 요구하면 응해야 한다. 본인 가족에 일이 생겨 자리를 비워야 할 때에는 산모에게 싹싹 빌듯 사정해야 한다. 미래가 불안정한 일자리를 가진 노동자가 자신의 목소리를 한껏 높일 수는 없다. 주어진 환경 앞에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 3개월 동안 함께 하며 나는 P이모가 만약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다면, 혹은 남자로 태어났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나은 삶을 살았을 것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총명했고 용감했으며, 조금 말이 많았지만 상대방을 배려할 줄 알았다. 하지만 P이모가 보낸 그 문자는, 당신이 끔찍이 아끼는 딸과 당신의 삶이 한 달 뒤 몹시 불안정해질 수 있다는 현실을 직감한 후 당장 눈앞의 안위를 획득하기 위해 애쓰는 일용직 노동자의 간절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비참한 심정을 느낀 건 P이모만이 아니었다.
P이모를 떠내 보낸 후에도 우리 부부는 8개월 간 다른 이모님과 함께 했다. 그러니까 약 1년여간의 기간 동안 두 명의 산후 도우미와 함께 쌍둥이를 키운 셈이다(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총 세 명이다. 산 후 첫 달에는 P이모와 함께 다른 이모님이 함께 오셨다. 하지만 그 이모는 한 달 뒤 다른 곳으로 가셨다). 누군가를 '키운다'는 개념이 '어머니'를 정의 내림에 있어 핵심적인 요소라고 생각한다. 내 생각에 '어머니'는 누군가를 낳아야 획득되는 개념이 아니다. 미숙하고 불완전하게 태어난 한 인간을 키우는 과정에서 어머니라는 훈장이 주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한 인간을 누가 키우는가? 우리 사회는 불완전한 인간이 사회로 돌아갈 충분한 준비가 되었다고 판단될 때까지(즉, '성인'이 될 때까지) 그 인간을 양육하는 사람을 법적으로 지정해 놓았다. '친권'과 '양육권'이 그것이다. 일반적으로 친권은 한 인간의 생물학적 부모에게 주어지지만 양육권은 생각보다 다양하게 정의되며 판단된다. 그런데, 법적인 권한과 의무를 떠나, 한 인간을 정말로 키워내는 존재는 누구인가? 생물학적 어머니와 아버지가 한 인간의 육성 과정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정말 절대적인가?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수많은 난관에 부딪힌다. 절망적인 순간마다 가만히 손을 내밀어주는 존재들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무사히 올 수 있었다. 완전한 타인이었던 나와 내 가족에게 작은 도움을 주었던 그들 하나하나 역시 모두 내 아이를 키운 존재들이 아닌가? 그렇다면 '어머니'의 개념은 충분히 폭넓게 해석될 여지가 있다.
이 사회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고들 이야기한다.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출산율이 그것을 증명한다. 살인적인 부동산 가격과 극단적으로 경쟁적인 교육시스템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공동체'의 위기는 더 이상 그 공동체가 지속 가능하지 아니할 때 비로소 구성원들에게 발현된다. 한국사회라는 커다란 공동체는 스스로 미래를 창출해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다. 아이를 낳는 사람이 조직에서 죄인처럼 취급당하고 아이를 키우기 위해 경력을 잠시 중단한 사람은 어느새 경쟁에서 뒤처진 사람이 되어있다. 아이를 키우며 일도 해야 하는 이들에게 국가가 해주는 배려는 한 달 남짓한 산후 돌봄 서비스와 매달 조금씩 들어오는 정부 보조금이 전부다. 최소한 한국이라는 사회, 국가라는 시스템이 내 아이를 키워주지는 않는 것 같다. 지금까지 2년 남짓한 기간 동안 내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내 아이를 키워내는 주체는 희생을 개인의 차원에서 받아들이는 작은 공동체의 구성원들이었다. P이모와 그를 뒤이어 우리 집에 도착한 K이모는 분명히 우리 부부의 아이들을 함께 키웠다. 아이들은 그들로부터 보살핌과 따뜻한 감정을 받았다. 그동안 나는 잠시 회사에 가서 일을 볼 수 있었고, 가끔은 부부가 함께 외출하여 차를 한 잔 마시고 올 여유도 주어졌다. 그들과 함께 하는 기간 동안 나는 감히 그들을 내 가족이라고 생각했다. 주변에 넓고 얇게 퍼진 생물학적인 관계는 아주 우습게 느껴질 정도로 우리 부부와 두 명의 이모는 아이들을 함께 키웠다. 아이를 키우는 순간만큼은 같은 가치를 공유했고, 같은 목적 하에 최선을 다해 서로를 배려하고 이해했다. 형제애(fraternity), 혹은 박애(camaraderie)로 번역되는 그 감정이 우리 집에 존재했다. 그렇다면 내 아이들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모두 존재했던 셈이므로, P이모와 K이모는 진실로 '이모'였던 것이 된다.
나는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수많은 이모들이 불안정한 미래에 종속되어 공동체에 의해 정당한 처우를 받지 못하는 한,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공동체의 위기는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이 다른 것에 비해 더 높은 가치를 지니거나, 심지어 신성한 일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하나의 예일뿐이다. 남들보다 훨씬 일찍 회사에 나와 건물 곳곳을 청소하는 또 다른 이모님이 무더운 요즘 어디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지 생각해본다면, 이 공동체가 이모들을 너무 홀대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작은 단위의 연대가 이들로부터 공고해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규모의 공동체는 그 가치를 제대로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시간이 훌쩍 지나 아이들이 두 돌이 될 무렵, P이모는 주말 파트타임 형태로 잠시 우리 가족과 다시 함께 했다. 딸 사교육비에 들어가는 돈이 만만치 않아 주중 돌봄 서비스에 추가하여 주말에도 일을 해야 하는 형편이라고 했다. 그렇게 우리 가족과 반갑게 해후하여 몇 개월의 시간을 보낸 뒤, P이모는 산후 돌봄 서비스를 그만두고 근교 대형 식당에 홀 서비스로 취직했다. 오늘 우리는 그 식당에 방문했고, P이모는 예의 그 시끄러운 목소리와 함께 밝은 얼굴로 아이를 안아 들었다. 다음에는 꼭 먼저 연락하고 오라는 잔소리가 이어졌다. 아이는 이모를 알아보는 눈치였다. 배시시 웃으며 인사하는 모습이 그렇게 느껴졌다. 왜 아니겠어. 이모인데.